#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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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와 메르켈 총리의 독대는 예상 시간을 훌쩍 넘길 만큼 길어졌다.
이따금 독일 정부의 공무원들이 안으로 들어와 메르켈 총리에게 다음 일정을 알려줬다.
하지만 그때마다 메르켈 총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어떤 일정보다 최치우와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젓는 메르켈 총리는 단호함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줬다.
나름 힘깨나 쓰는 독일의 고위 공무원들도 감히 총리를 설득할 엄두조차 못 냈다.
그저 메르켈 총리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사실 마냥 기다리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바깥의 사람들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최치우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기에 약속을 생명처럼 여기는 메르켈이 다음 일정을 모조리 취소시킨 것일까.
단순히 소울 스톤 발전소가 주제는 아닌 게 분명하다.
나중에라도 내막을 알게 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치우는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공언했다.
이미 UN 사무총장과 케냐 대통령도 동의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유럽의 맹주이자 국제 정치 무대의 키 플레이어인 메르켈 총리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프리카 인구 말살 정책이라니… 지나친 과대망상 리포트를 너무 고평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네오메이슨이 추진하는 음모를 부정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아프리카 인구 말살 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무계한 시나리오로 가득 차 있다.
동시다발적 내전을 일으키고,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대량살상무기와 생화학 무기를 터트리는 스토리는 영화로 만들기도 힘들다.
그런데 네오메이슨은 황당한 시나리오를 현실로 만들 준비를 착실히 해왔다.
최치우는 다양한 증거를 내밀며 메르켈 총리를 설득했다.
외부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신규 반군이 세를 불리고 있고, 연합체를 결성했다는 증언이 결정타였다.
이제 좀 중동이 조용해졌다, 싶은 시기였다.
북한은 호시탐탐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날만 노리고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 대륙에서 또 다시 내전의 불씨가 번진다면, 세계는 과연 그만한 혼란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것저것 고민하고 인내하기 싫은 여론이 들불처럼 타오를지 모른다.
그러다보면 정말로 대량 살상 무기를 아프리카 대륙에 퍼붓는 그림이 실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명분은 반군 퇴치와 진압이지만, 무고한 민간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게 뻔하다.
“총리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최치우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메르켈 총리를 압박했다.
국제 무대에서 최치우처럼 메르켈을 몰아붙일 수 있는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독일의 총리라는 무게감은 웬만한 정치인을 숨도 못 쉬게 만든다.
하지만 최치우는 지위에 위축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메르켈과 여러 번 호흡을 맞추며 속내를 터놓은 사이다.
진정한 파트너가 되려면 가장 어려울 때 손을 잡아야 한다.
바로 지금, 아프리카 대륙의 위기를 미리 감지한 순간이 서로의 신뢰를 시험할 타이밍이다.
“UN 평화유지군의 전투 병력 확충을 옹호하고, 유사 시 우리 독일의 정치력으로 미군의 개입을 막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메르켈이 한 자, 한 자 고심해서 내뱉었다.
최치우는 메르켈의 정치력을 요구했다.
독일이 유럽 국가들을 이끌고 한목소리를 내주면 알렉산드로 사무총장에게 힘이 실린다.
그래야만 수월하게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
최치우는 특히 미군의 개입을 막는 데 방점을 뒀다.
“아시는 것처럼 올림푸스는 펜타곤의 파트너입니다. 그러나 펜타곤과 미국 정부 곳곳의 강경한 극단주의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미국 군수업체 주식을 다량으로 확보한 네오메이슨은 결국 미군을 움직이려 들겠죠.”
“미군이 개입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미군은 폭주 기관차 같습니다. 한번 질주를 시작하면 누구도 브레이크를 밟기 힘들죠.”
전쟁은 살아 있는 생물과 비슷하다.
마음대로 시작했다고 해서 원할 때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세계최강의 무력과 규모를 자랑하는 미군이 개입하면 전쟁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오를 것이다.
미군은 전쟁을 수행하게 되면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한다.
그게 원칙이다.
최치우는 UN 평화유지군과 헤라클래스만으로 내전의 불씨를 꺼트릴 작정이었다.
그게 최소한의 희생으로 더 큰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제조업 강국인 우리 독일은 수혜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명분을 납득한 메르켈 총리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방향을 돌렸다.
그녀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독일 국민들은 피를 흘리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으로 인한 경기 호황의 혜택을 누릴 것이다.
아프리카 인구 말살 정책은 네오메이슨만 이익을 보는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그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서양의 선진국 대부분이 승자가 되는 시나리오다.
그렇기에 진정 위험한 외통수였다.
계산기를 두드린 선진국 정부는 모른 척 입을 닫을 확률이 높다.
과연 독일도, 메르켈 총리도 이익을 따라 움직일까.
최치우는 다른 결과를 기대했다.
패전국의 멍에를 쓰고 유럽의 맹주가 되기까지, 독일은 뼈저린 반성을 거듭해 왔다.
자국의 이익만을 좇은 결과가 두 번의 세계대전이었다.
역사에서 배운 게 있다면 메르켈의 독일은 다른 선택을 내릴 것이다.
“유럽 대륙은 아프리카 대륙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절의 착취부터 노예 무역까지… 그 빚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죠. 독일이 먼저 빚을 갚는다면 다른 국가들도 뒤따르지 않겠습니까?”
최치우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절대 흥분해서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뻑하면 목소리를 높이는 건 하수들의 특징이다.
고수는 마음을 움직이는 데 집중한다.
이윽고 메르켈 총리가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D-DAY를 언제로 정했습니까, 대표님.”
“빠르면 9월, 늦어도 10월. 가을이 지나기 전에 결실을 보려 합니다.”
“우리 독일 사람들은… 빚지고 못 사는 성격입니다.”
메르켈이 결단을 내렸다.
최치우는 미소가 번지는 걸 숨기지 않았다.
철의 여인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면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다.
알렉산드로 사무총장도 UN 평화유지군의 전투 병력을 확충하는데 큰 부담을 덜게 됐다.
최치우는 라이프치히에서 두 번째 소울 스톤 발전소의 시작을 축하했다.
동시에 메르켈 총리를 아군으로 만들며 아프리카를 구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치우와 메르켈 덕분에 유럽 대륙이 아프리카에게 진 과거의 빚을 아주 조금이나마 갚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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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 총장은 아프리카에 파견된 UN 평화유지군의 전투 병력을 늘리는 데 집중했다.
UN 사무총장을 이빨 빠진 호랑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명성에 비해 실제 권력은 약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사무총장이 작정하고 일을 추진하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대부분의 사무총장은 안보리 상임 이사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는 것뿐이다.
실제로 UN 사무총장은 엄청난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
쓰지 않아서 몰랐을 뿐, 마음먹고 나서면 전투 병력을 대폭 증강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아마 몇 달이 지나면 아프리카 평화유지군의 덩치가 갑자기 커졌다는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상임 이사국에서 사무총장을 견제하며 이유를 따질지 모른다.
그러나 최치우와 알렉산드로 총장이 합의한 D-DAY는 늦어도 10월이다.
두 사람은 상임 이사국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기 전에 모든 일을 마칠 계획이었다.
물론 성공적으로 반군 연합을 진압해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UN 사무총장의 직권이 있다고 해도 상의 없이 전투 병력을 늘린 것, 그리고 절차를 어기고 선제공격을 지시한 것 모두 문제 삼을 게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알렉산드로 총장의 조기 퇴진을 요구할 수도 있다.
최치우는 그때를 대비해 라이프치히에서 메르켈 총리를 포섭한 것이다.
독일이 알렉산드로 총장을 밀어주면 후폭풍을 버티는 게 가능하다.
어느 정도 책임을 질 수는 있어도 조기 퇴진은 막을 수 있다.
그렇기에 알렉산드로 총장도 부담을 덜고 전투 병력 증강을 추진하게 됐다.
최치우는 마치 그림자 속 칼날 같았다.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을 조정하고 있었다.
헤라클래스 역시 가만히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남아공을 거점으로 케냐까지 진출한 헤라클래스는 베테랑 용병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용병 세계에서는 헤라클래스가 돈주머니를 풀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리키와 함께 동고동락한 초창기 멤버들에 미군 특수부대 출신들이 헤라클래스의 1진이다.
남아공과 케냐에서 거액을 안기며 스카우트한 대원들은 2진으로 재편됐다.
헤라클래스 1진의 병력이 대략 200여 명, 2진은 최근 두 달 사이 무려 500명까지 늘어났다.
최치우는 9월까지 1000명을 채우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잘 훈련된 특수 병력 200명과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 출신 800명, 도합 1000명의 무장 단체는 아프리카에서 웬만한 국가 정규군 부대를 압살할 수 있다.
머릿수는 많아도 아프리카의 군대 대다수가 오합지졸이기 때문이다.
반면 헤라클래스의 전투력은 독보적이다.
미군 특수부대 방식의 체계적인 강훈련이 거듭되고, 무엇보다 무기와 보급의 질이 다르다.
덩치를 키운 UN 평화유지군과 최강의 외인부대 헤라클래스.
여기에 케냐와 남아공 정부군 등 최치우와 알렉산드로 총장을 믿고 힘을 보태는 국가들이 나서면 드넓은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파란을 일으킬 수 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3차대전에 버금가는 혼란을 준비해 온 네오메이슨을 고작 몇 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따라잡아야 한다.
최치우의 진두지휘로 장작은 착착 쌓이고 있었다.
불이 붙는 순간, 아프리카에 쌓아 놓은 장작들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를 것이다.
최치우는 순수한 불꽃으로 검은 대륙에 드리운 네오메이슨의 음모를 모조리 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바빠도 밥은 잘 챙겨 먹어. 끼니 거르지 마, 알았지?
“어머니랑 같은 이야기를 하네. 혹시 두 사람 짠 거 아니야?”
-짜긴 뭘 짜. 여자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했어. 그러니까 어머님이랑 내 말 들어.
“알았어. 밥부터 먹을게.”
-그럼 자고 일어나서 또 연락할게, 치우야. 오늘도 힘내.
“잘 자.”
최치우는 뉴욕에 있는 유은서와 전화 통화를 마치고 미소를 지었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로 신화를 쓰고, 남몰래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거물이지만 소중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웃음이 절로 번진다.
다른 차원에서의 전생과 현대의 삶이 다른 점이었다.
최치우는 여느 전생 못지않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인간적인 마음을 상실하지 않았다.
과거의 환생에선 생존, 또는 강함 그 자체를 위해 인간성을 뒤로 했다.
그래야만 환생한 차원의 정점에 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처음으로 어머니라는 이름의 가족을 만나고, 소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똑똑-
그때 누군가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먼저 보고를 하지 않고 곧바로 대표실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은 올림푸스 내부에서 몇 명 없다.
“들어오세요.”
최치우가 입을 열었다.
보나 마나 임동혁 부사장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임동혁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대표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결과는?”
“컨펌입니다. 평양 특사단의 경제인 대표단… 오성 이지용 부회장과 대표님으로 확정이 됐습니다.”
최치우가 검지를 들어 임동혁을 가리켰다.
남들이 보면 삿대질을 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서만 통하는 칭찬 사인이다.
“정제국 대통령이 대표님께 진 빚을 잊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빚을 쉽게 잊어버릴 캐릭터는 아니죠. 그래서 득 될 게 없으니까.”
“청와대 홍보수석실에서 내일 오전 언론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김지연 이사한테 말해서 우리 쪽 보도자료 준비시키세요. 그리고 부사장님도 고생 많았습니다. 대통령이 우호적이긴 해도 청와대 비서실장이 상당히 깐깐하다고 들었는데.”
“아닙니다. 그만한 늙은 여우를 다독거리는 것쯤이야 껌입니다.”
임동혁은 정재계에서 활약하는 유일한 재벌 2세 출신의 로비스트나 다름없다.
타고난 인맥과 네트워크에 미친 승부욕까지, 그는 올림푸스의 2인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로서 최치우는 두 개의 칼을 꺼냈다.
하나의 칼은 아프리카를, 또 하나의 칼은 북한을 겨누고 있다.
그의 무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