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대륙에서 대륙으로>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최치우는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최치우를 반겼다.
독일 정부가 조직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환영 인파가 아니었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최치우가 시청에 들어서는 길을 양옆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뜻밖의 퍼레이드를 하게 된 최치우는 손을 흔들며 시민들의 환대에 답했다.
“와아아아아-!”
“치우 초이! 치우 초이! 치우 초이!”
짝짝짝짝짝짝짝짝!
말 그대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우승을 하고 돌아오면 이만한 환대를 받을까.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이방인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의 환영 인사를 보여줬다.
최치우도 가슴 깊이 감사를 느꼈다.
테러 사건이 벌어지며 올림푸스와 독일은 보다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게 됐다.
최치우는 진심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고, 누구보다 살뜰하게 유족들을 챙겼다.
그 과정을 지켜본 독일 국민들, 특히 테러가 일어난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은 진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최치우는 테러라는 고난과 역경을 거치며 독일 국민들의 신뢰를 사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자산이다.
앞으로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가 독일에서, 또 유럽에서 비즈니스를 전개하는데 든든한 힘이 될 게 분명하다.
실제로 퓨처 모터스는 자동차 산업의 본고장인 독일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에 오픈한 제우스 파크는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고, 시내 곳곳에서 제우스 S를 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보급형 전기차인 제우스 U가 출시되면 더 많은 판매량이 예상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출발해 한국에 인수된 전기차 회사가 다른 나라도 아닌 독일을 접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 폭스바겐 그룹이 바짝 긴장했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었다.
퓨처 모터스는 최치우의 활약 덕분에 관세 혜택을 받고 있다.
독일 정부도 외국계 회사인 퓨처 모터스에 호의적인 입장이라는 뜻이다.
최치우 한 사람이 일으킨 파장이 전통의 자동차 명문 회사들을 위협할 지경이었다.
“먼 길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대표님.”
시청사 안으로 들어서자 라이프치히 시장이 최치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치우는 시장과 악수를 나누며 밝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시장님.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군요.”
“모두 올림푸스 덕분입니다.”
“시청의 협조로 공사 기간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네요.”
“저희도 한마음입니다. 총리께서는 내일 일찍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축포를 쏘는 준공식 행사는 내일 오전에 열린다.
철의 여인 메르켈 총리도 자리를 빛내기 위해 베를린에서 달려올 것이다.
시장과 인사를 나눈 최치우는 또 다른 반가운 얼굴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유 누나, 시차 적응 잘 하고 있었지?”
“응.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라이프치히 시청 직원들 틈에 문지유가 서 있었다.
최치우와 함께 웹툰 작업을 하며 인연을 맺은 문지유는 올림푸스와 전속 계약을 맺은 지 오래다.
그녀는 최치우의 전생을 다룬 리얼 헌터의 대성공 이후 한국 웹툰계의 유명 작가로 발돋움했다.
양대 포털 사이트의 러브콜을 한몸에 받은 문지유의 차기작은 다름 아닌 올림푸스 스토리였다.
최치우와 올림푸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웹툰을 그리는 문지유는 리얼 헌터를 뛰어넘는 히트를 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사적인 두 번째 소울 스톤 발전소 준공식을 웹툰으로 담아내기 위해 먼저 라이프치히에 와 있던 것이다.
“요즘 바빠서 잘 못 봤는데, 여기서라도 보니까 좋다.”
“역사적인 순간을 그릴 수 있어서 영광이야.”
“누나가 우리의 역사를 기록해 줘서 더 영광이지.”
최치우의 미소에 문지유는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그녀는 오래도록 최치우를 좋아하고 있었다.
어쩌면 고등학생과 편의점 알바 그림 작가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감정이 싹텄는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거대한 위인이 돼버린 최치우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마음을 접었지만, 여전히 최치우만 보면 떨리는 심장은 주체하기 힘들었다.
“요즘 누나 웹툰 덕분에 우리 회사 이미지가 엄청 좋아졌다고 들었어. 어린 학생들도 올림푸스가 어떤 회사인지 잘 알게 됐고. 늘 하는 말이지만 고마워.”
“아니야, 내가 좋아서 그리는 거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어. 아무튼 나는 올라가서 회의 좀 하고 내려올게. 이따 봐, 누나!”
“그래. 고생해, 치우야.”
최치우의 스케줄이 워낙 바빠 두 사람은 한국에서도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문지유와 이야기를 나눈 최치우는 걸음을 옮겼다.
시장과 직원들이 그가 몸을 돌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열릴 준공식을 앞두고 최치우와 의논할 게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최치우는 문지유를 남겨두고 라이프치히 시장실로 움직였다.
금세 한국말이 아닌 영어를 쓰며 시장의 브리핑을 듣는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문지유는 그런 최치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마음을 삼켰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너의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세상이 널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치우야.’
최치우는 7번의 환생을 거치며 언제나 세상의 정점에 우뚝 섰었다.
그만큼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고, 삶이 끝나면 방랑자처럼 다른 차원으로 사라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최치우로 살아가는 현대에서는 다를 것 같았다.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고, 최치우의 이야기를 웹툰으로 기록하는 문지유가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도 문지유의 웹툰을 통해 사람들은 최치우와 올림푸스의 신화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최치우는 늘 그렇듯 역사를 쓰고 있었고, 문지유는 그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엇갈렸지만, 함께 영원히 기억될 발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
독일 정부에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행사를 준비한 티가 역력하게 났다.
메르켈 총리의 참석뿐 아니라 주요 부처 장관, 심지어 라이프치히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크푸르트와 쾰른의 시장도 얼굴을 비췄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울 스톤 발전소 준공식이 모든 독일 국민들의 관심을 받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 얼굴을 보이면 정치인 입장에서 나쁠 게 하나도 없다.
오죽하면 프랑크푸르트와 쾰른 시장이 시간을 쪼개서 라이프치히까지 왔겠는가.
발전소 준공은 라이프치히라는 도시의 경사가 아니었다.
독일의 축제였고, 나아가 온 유럽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묵묵히 땀을 흘린 우리 국민들의 저력을, 그리고 불운한 사고에 의해 목숨을 바쳐 밀알이 된 희생자들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소울 스톤 발전소를 시작으로 우리 독일은 대체에너지를 선도하는 친환경 중심 국가로 나아가겠습니다!”
메르켈 총리의 단단하고 옹골찬 연설이 끝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최치우는 새삼 메르켈의 저력을 확인했다.
그녀는 말이 유창한 달변가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투박하게 진심을 전달하는 재주가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독일 국민들이 메르켈을 신뢰하는 것은 변함없는 태도 때문이다.
메르켈 다음으로는 라이프치히 시장이 짧게 축사를 했다.
마지막 순서는 최치우의 몫이었다.
최치우는 기대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단상으로 걸어나갔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최치우를 향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준공식 현장은 독일 전역에 생중계 되는 중이다.
최치우는 생생한 라이브 방송으로 독일 국민들에게 선을 보이게 됐다.
현장에서, 또는 TV로 최치우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메르켈 총리의 연설과 라이프치히 시장의 축사도 인상적이었지만, 역시 클라이막스의 주인공은 최치우다.
프리젠테이션의 달인으로 알려진 최치우가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예측 기사를 쏟아낸 언론도 많았다.
물론 천하의 최치우가 언론의 예상대로 움직일 리 없다.
그는 마이크 앞에서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단상에 서서 가만히 청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예기치 못한 침묵이 길어지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설마 올림푸스의 CEO 최치우가 긴장해서 말문이 막힌 것일까.
그렇다면 대형 사고인 동시에 특종이다.
카메라를 잡은 기자들의 눈이 교묘하게 빛나는 찰나, 드디어 최치우가 입을 뗐다.
“지금 이 순간, 저는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의 대표가 아닙니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연설을 마치고 귀빈석에 앉은 메르켈 총리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사전에 합의된 시나리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우의 말이 이어지며 놀라움은 감동으로 바뀌었다.
“오늘만큼은 감히 대한민국 국민의 대표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나라는 독일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일했던 아버지 어머니 덕분에 대한민국이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은 라인강의 기적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 빚을, 그 고마움을 소울 스톤 발전소로 갚게 됐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최치우가 지난 역사를 언급하며 감사를 표시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글로벌 기업의 CEO가 아닌 대통령이 할 법한 연설이었다.
사실 투자 계약 조건을 떠나 독일 국민들은 소울 스톤 발전소를 라이프치히에 지어줘서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올림푸스의 CEO인 최치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됐다.
깊은 감동은 반전에서 나오는 법이다.
최치우는 이미 몇 마디 말로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후로는 무슨 말을 해도 좋게 들릴 수밖에 없다.
곧이어 연설을 마친 최치우가 마이크에서 몇 발짝 떨어져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땅이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박수가 울렸다.
짝짝짝짝짝-!
심지어 메르켈 총리의 연설이 끝났을 때보다 박수 소리가 더 컸다.
최치우는 다른 나라도 아닌 독일에서, 그것도 가장 사랑받는 정치 지도자로 장기 집권하는 메르켈보다 더 뜨거운 박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어진 커팅 행사에서도 방송국과 기자들의 카메라는 최치우를 쫓아다니기 바빴다.
만약 최치우가 소울 스톤 발전소의 효율성을 자랑했다면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낮추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높아졌다.
전략이라면 소름 끼칠 정도의 계산이고, 진심이라면 더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최치우를 쳐다보는 메르켈 총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준공식이 무사히 끝나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갈 대화가 한층 무거워질 것 같았다.
***
준공식은 성황리에 끝났다.
소울 스톤 발전소에서 생산될 친환경 에너지가 라이프치히는 물론이고, 독일과 유럽 전체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행사는 끝나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최치우는 메르켈 총리와 독대하게 됐다.
다른 사람들을 물리고 통역 같은 배석자도 하나 없는 단독 회담이었다.
라이프치히 시장도, 독일 장관들도 자리를 비워줄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의 연설, 벌써 반응이 어마어마합니다. 정치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메르켈은 대뜸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최치우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편하게 대답했다.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정치라고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죠. 굳이 독일과 한국의 역사를 언급하며 감사한 마음을 드러낸 건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독일이 한국을 도와줬던 것처럼, 다시 세계를 위해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떤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까?”
메르켈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특유의 포커페이스가 나온 것이다.
두 사람은 라이프치히 테러를 겪으며 서로를 아군으로 생각하게 됐다.
독일 정부에 파고든 네오메이슨이라는 공동의 적을 함께 물리친 사이다.
그러나 무조건 덮어놓고 편을 들어주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안에 따라 첨예한 긴장이 형성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일으킬 계획입니다.”
최치우가 먼저 팽팽한 긴장의 끈을 잡아당겼다.
그의 발언에 깜짝 놀란 메르켈이 눈을 크게 떴다.
포커페이스가 깨진 것이다.
“전쟁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네오메이슨이 일으키는 더 큰 전쟁을 막기 위한 예방 전쟁입니다.”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유럽 대륙의 맹주 독일 총리에게 아프리카 대륙의 운명을 터놓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