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역사>
나이로비에서 협약식을 마친 최치우는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누가 뭐래도 그의 가장 큰 관심 지역은 아프리카 대륙이었다.
하지만 마냥 아프리카에 머물 수만은 없었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는 글로벌 기업이다.
이익의 대부분은 해외 사업에서 발생하고 있다.
최치우는 두 회사의 오너이자 CEO인 동시에 강력한 상징성을 지닌 마스코트다.
그렇기에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굵직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서울에서 어머니의 집밥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최치우는 하루 종일 결재 서류를 검토했다.
오전에 서류를 검토하면 오후와 저녁은 미팅이 줄지어 잡혀 있었다.
웬만한 미팅은 비서팀에서 커트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에게 보고되는 미팅은 꼭 참석해야 할 것들이다.
장관 정도의 명함으로는 최치우를 단독으로 만나기 힘들어졌다.
정제국 대통령도 최치우를 만날 때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장본인이 최치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도 최치우를 어려워하긴 마찬가지다.
오성그룹을 제외하면 시가총액으로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를 뛰어넘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다.
감히 최치우와 각을 세우려는 기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움직인다는 오성그룹의 이지용 부회장도 최치우에게는 한 수 접어주는 분위기였다.
현기 자동차의 홍문기 부회장이 최치우와 충돌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했는지 재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처럼 최치우는 26살의 나이에 한국의 정계와 재계에서 대적할 사람이 없는 위치에 올랐다.
권력과 재력이라는 쌍검(雙劍)을 허리에 차고 전무후무한 아성을 쌓는 중이다.
역사의 중심에 선 최치우는 오늘도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저녁 식사, 누구라고 했었죠?”
“현성 금융의 김종식 회장님과 미팅입니다.”
“피곤해서 그러는데 미루면 안 될까?”
“대표님, 김종식 회장님이 오늘은 꼭 뵙고 싶다고 저에게 신신당부를… 직접 전화까지 해서…….”
비서팀장이 울상을 지었다.
최치우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내가 우리 팀장님 힘들게 할 수는 없지. 예정대로 갑시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다시 비서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 누가 들으면 입을 쩍 벌릴 대화 내용이다.
현성 금융은 국내 굴지의 투자 회사다.
특히 현성 금융이 움직이면 국민연금도 뒤따라 투자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 금융의 역할은 100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현성 금융의 김종식 회장은 잘 나가는 기업가들이 앞다퉈 만나고 싶어 안달을 내는 인물이다.
그러나 상대가 최치우라면 입장이 완전히 달라진다.
반대로 김종식 회장이 최치우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비서팀장을 달달 볶는 것이다.
저녁 일정을 확인한 최치우는 다음 스케줄도 체크했다.
빈틈없이 빽빽한 타임라인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퓨처 모터스에서는 LA의 제우스 파크 행사에 대표님께서 참석이 가능하신지 문의하고 있고요, 뉴욕에서는 윌리엄 뱅크 부사장이 미팅 요청을…….”
비서팀장의 보고를 듣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지기 십상이다.
드넓은 지구에서 최치우를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투자자로 손꼽히는 워렌 버핏은 1년에 몇 번씩 점심 식사 이벤트를 개최한다.
워렌 버핏과 점식을 먹기 위해 100만 달러 이상을 내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한 분야에서 최고에 오른 사람과의 대화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이다.
이제 최치우도 워렌 버핏 같은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물론 버핏은 투자자이고, 최치우는 새로운 사업을 만드는 개척자다.
동일선상에서 두 사람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치우와의 미팅 자체가 영광으로 여겨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렌 버핏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최치우는 거만해지지 않았다.
상황과 환경이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들먹거리는 데 재미를 붙이면 아무리 큰 성공도이라 금방 쪼그라든다.
“팀장님, 우리 사옥 관련해서 국토부 관계자 미팅은 언제였어요?”
“다음 수요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일정 확인 후 다시 조율하기로 말을 해놓아서 변경도 가능할 것 같아요.”
“앞당길 수 있으면 이번 주로 변경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들은 계속 느는데 이러다 금방 좁아지겠어. 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최치우는 다른 무엇보다 직원들의 행복을 중시했다.
열정을 불태우며 미친 사람처럼 일하는 직원들에게 확실한 보상을 줘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회사는 직원들의 열정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널찍하게 느껴졌던 여의도 본사 사무실은 어느새 수많은 직원들로 가득 차고 있었다.
올림푸스는 소수 정예를 추구하지만 사업을 확장하며 직원들이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최치우는 직원들이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일하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옥을 매입하거나 짓는 것도 올림푸스의 성공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직원들에게 쾌적한 근무환경을 제공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우웅- 우우웅-
최치우가 비서팀장과 이런저런 현안을 의논하며 걷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잠시 멈춰 선 그가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했다.
언제 봐도 반가운 이름, 김도현 교수의 전화였다.
“네, 교수님.”
-한국에 돌아왔다고 들었어요. 아프리카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쁘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차라리 사막에서 모래바람 맞는 게 더 편한 것 같습니다.”
최치우는 미소를 지으며 김도현 교수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남아공에서 나이로비까지 무작정 질주했던 일주일이 그리워졌다.
최상급 대지의 정령 나드갈을 만나고, 반군들의 습격을 받았지만 훨씬 즐거웠다.
반면 한국에서는 온갖 머리 아픈 일정과 회의를 소화해야 한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더 편하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심이 섞여 있었다.
-치우 군을 다시 사막으로 보내줄 수 있을 거 같아요.
“교수님, 그 말씀은…….”
-전에 줬던 소울 스톤에서 에너지를 추출했어요.
꽈악-!
최치우는 대답 대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가 또 한 번 큰일을 해낸 것이다.
상급 대지의 정령 노하임의 소울 스톤으로 발전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만약 아프리카에서 얻은 나드갈의 소울 스톤도 활용할 수 있게 되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하나만 건져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2개의 소울 스톤 발전소를 건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연구실로 가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치우 군.
전화를 끊은 최치우는 고개를 돌려 비서팀장을 쳐다봤다.
올림푸스 입장에서는 경사가 났지만, 비서팀장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팀장님, 지금 미래 에너지 탐사대 연구실로 가야겠습니다.”
“그럼 저녁 식사는…….”
“30분, 아니 1시간만 늦게 합시다. 내가 김종식 회장님한테 직접 전화 걸어서 양해를 구하죠.”
“아, 대표님께서 전화해 주시면 김종식 회장님이 엄청 좋아할 것 같으세요.”
비서팀장은 한시름 놓은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 최치우가 저녁 미팅을 또 깨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최치우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마음은 이미 미래 에너지 탐사대 연구실이 있는 S대 공학관에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케냐의 움바투 대통령은 덩실덩실 춤을 출 것 같았다.
***
“교수님!”
최치우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반가움과 기쁨 등 여러 감정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직접 연구실 문을 열어준 김도현 교수도 환하게 웃으며 최치우를 맞이했다.
“치우 군, 고생 정말 많았어요. 나이로비에서도 국위선양을 하다니…….”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것 뿐입니다.”
“아니에요. 남아공에 이어 케냐까지…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올림푸스의 영향력이 드리우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교수님 덕분에 케냐에서 생색 좀 내게 생겼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연구실 안으로 들어간 최치우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의 앞에는 김도현 교수가 손수 내려준 전통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다.
“날씨는 덥지만 그럴수록 몸의 기운을 챙겨야지요. 방금 우려낸 도라지차예요.”
“감사합니다.”
은은하고 알싸한 다향을 음미한 최치우가 본론을 꺼냈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만, 가장 궁금한 걸 먼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소울 스톤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번에 연구한 소울 스톤의 속성은 대지, 즉 땅과 흙이잖아요.”
“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제까지 연구했던 물 속성, 불 속성의 소울 스톤과는 특성이 다를 테니까 말이지요.”
“바람 속성을 빼면 모든 소울 스톤을 다 연구하신 셈이군요. 이 세상에서 교수님이 최고의 소울 스톤 전문가이십니다.”
“과찬이에요. 치우 군이 아니면 소울 스톤의 존재조차 몰랐을 텐데요.”
최치우와 김도현 교수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였다.
혼자서는 오롯이 100%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모이면 200%, 아니 1000%의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소울 스톤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소울 스톤이 없으면 대체에너지를 추출하는 연구를 시작도 못한다.
최치우가 밝은 태양이라면, 김도현 교수는 그의 뒤를 묵묵히 지켜주는 그림자였다.
“아무튼 우리는 대지의 속성 자체에 주목했어요. 이미 대체에너지 분야에서는 지열발전이 화두잖아요?”
“그렇죠.”
“대지는 불에 강하지요. 동양의 오행에서도 불의 상극으로 대지를 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행(五行)에 의하면 화(火)의 상극은 토(土)다.
실제로 대지의 정령은 불 속성 마법을 가볍게 막아낸다.
최치우는 정령들과 싸우면서 오행에 대해 고민한 적은 없었다.
아슬란 대륙과 무림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당연한 상식으로 속성과 상극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답은 간단해요. 대지는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열을 품고 있어요. 그래서 불의 상극인 것이지요.”
김도현 교수가 선문답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과학적인 분석이었다.
세계적 권위의 학자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
사람들은 흔히 불이 뜨겁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지가 품고 있는 열의 강도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보다 더 높다.
그래서 지열(地熱) 발전도 가능한 것이다.
“소울 스톤에 담긴 열 에너지를 추출하신 것이군요.”
“역시 치우 군에게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네요.”
김도현 교수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원리지만, 최치우처럼 직관적으로 빠르게 이해하긴 어렵다.
최치우는 김도현 교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소울 스톤으로 케냐에 발전소를 짓겠습니다.”
“한국, 독일에 이어 케냐라니……. 올림푸스는 정말 이름처럼 글로벌 기업이 되고 있어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하나 더 드릴 게 있습니다.”
최치우가 품에서 나드갈의 소울 스톤을 꺼냈다.
같은 대지 속성이지만 노하임의 소울 스톤보다 황갈색 빛이 한층 진했다.
겉모습만 봐도 훨씬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 소울 스톤은……!”
김도현 교수가 무테 안경을 치켜 올리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최치우는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번째 발전소도 얼른 지어야죠.”
“이 속도라면 우리가 정말 인류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 수도 있어요.”
“교수님께선 이미 역사를 쓰고 계십니다. 저와 함께.”
아프리카 대륙에 네오메이슨의 거대한 음모가 남아 있지만, 최치우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과연 역사를 기록하는 승자는 네오메이슨일지, 아니면 올림푸스일지 오래지 않아 결판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