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대륙의 구원자>
조셉이 운전한 최치우의 SUV가 케냐 국경을 넘었다.
일주일의 여정을 무사히 마친 최치우는 나이로비에서 가장 비싼 호텔 스위트룸을 잡았다.
최치우 덕분에 조셉도 생전 처음으로 스위트룸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실 조셉에게는 호텔 구경도 낯설었다.
최치우가 그를 바로 케냐 경찰이나 인터폴에 넘기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조셉을 통해 줄줄이 굴비처럼 반군들의 연합 세력을 엮어낼 작정이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따지면 조셉은 특급 포로다.
스위트룸에 딸린 작은 옷방을 내준 최치우는 그에게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고 있지만, 선은 확실히 지켰다.
최치우 혼자 밖으로 나갈 때는 조셉의 혈도를 눌러 점혈법을 걸었다.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고 옷방 문을 잠근 채 외출하는 것이다.
조셉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나머지 동료들은 허허벌판에서 땅속으로 떨어지거나 바람의 창에 찔려 죽었다.
그나마 살아 숨 쉬며 좋은 밥이라도 얻어먹는 게 다행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한다.
심지어 최치우 곁에서는 약간이나마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물론 언젠가 조셉은 차가운 감옥으로 직행하게 될 것이다.
반군 소속으로 악행을 저지른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최치우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았다.
반군 연합의 정보를 주는 데 협조한다고 해서 조셉을 그냥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포로를 이용하는 것과 타협하는 것은 다르다.
최치우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다.
지배할 뿐이다.
조셉 역시 최치우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굴복된 상태였다.
“오늘 저녁에는 증언을 하게 될 거다.”
최치우는 옷방 문을 닫기 전, 조셉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줬다.
오늘이 바로 D-DAY다.
나이로비에서 올림푸스는 케냐 정부와 역사적인 투자 계약을 맺을 것이다.
세계를 주목시킬 성대한 행사가 끝나고 나면 파티가 열린다.
하지만 최치우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는 움바투 대통령과 알렉산드로 총장 앞에 조셉을 세울 계획이었다.
뉴욕에서 삼자대면을 했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반군 조셉을 만나는 것이다.
아마 움바투 대통령과 알렉산드로 총장은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외부에서 반군들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대륙 곳곳의 게릴라들이 하나의 연합체를 형성한다는 소식은 금시초문일 게 분명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으면 특단의 대책은 저절로 나올 것이다.
올림푸스 혼자서 나설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UN 평화유지군과 케냐 정부, 나아가 남아공을 포함해 아프리카 주요국 정상들이 공동으로 대응할 사안이다.
어쩌면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로 대륙 연합군이 결성될 수도 있다.
쿠웅-
최치우는 조셉을 가둬둔 옷방 문을 닫고, 스위트룸 밖으로 나섰다.
그는 하루하루, 아니 매시간 역사를 쓰는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는 축제 분위기였다.
도시 전체에 흥겨운 기운이 감돌았다.
경찰과 군인들이 곳곳에 배치되고, 치안 유지를 위해 눈을 부릅떴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글로벌 기업 올림푸스가 케냐와 투자 계약을 맺는 날이기 때문이다.
올림푸스의 명성은 아프리카 중부의 케냐에도 퍼져 있었다.
특히 남아공에서 광산 개발을 하며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케냐 국민들은 올림푸스 덕분에 새로운 직장이 많이 생길 거라 기대했다.
어느 나라든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은 인구가 넘쳐난다.
매년 출산율이 뚝뚝 떨어지는 선진국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있다.
일하고 싶은 인구는 많은데 정작 제대로 된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올림푸스의 투자와 진출은 케냐 국민들에게 가뭄 속 단비 같았다.
벌써부터 올림푸스를 오아시스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올림푸스가 케냐 국민들의 갈증을 해소해줄 거라 믿는 것이다.
최치우라는 이름도 순식간에 고유명사처럼 각인되고 있었다.
원래 최치우는 미국과 아시아, 유럽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의 유명인사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도 영향을 끼쳤지만, 올림픽 금메달을 따며 100m 달리기 세계신기록을 세운 게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세계 주류의 트렌드에서 소외된 곳이다.
올림픽을 챙겨보는 국민의 숫자도 다른 대륙과 비교하면 현저히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치우의 유명세도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올림푸스의 투자 소식이 알려지며 최치우도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케냐의 주요 신문에서 최치우를 보도했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소개하는 특집 방송까지 제작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최치우는 케냐의 움바투 대통령과 재회했다.
남아공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이시환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시환의 공식 직책은 남아공 본부장이다.
올림푸스 내부에서 아프리카에 대해 가장 경험이 많은 사람이 바로 이시환이었다.
케냐 본부가 발족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시환의 도움이 필요하다.
최치우는 여차하면 이시환을 아프리카 대륙의 사업 총괄로 승진시키고, 남아공 본부장과 케냐 본부장을 따로 임명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케냐 정부에서는 움바투 대통령과 장관들이 모두 모여 올림푸스를 맞이했다.
그들에게 있어 올림푸스는 어떤 나라의 대통령보다 더 중요한 손님이었다.
그래서일까.
공식적인 국빈 대우는 아니지만, 사실상 국빈보다 극진하게 편의를 제공했다.
경제 협력을 맺은 나라보다 올림푸스의 투자액이 높기 때문이다.
정치적 위기에 처했던 움바투 대통령은 최치우를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로 여겼다.
최치우 덕분에 케냐 국민들로부터 다시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케냐 국민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UN의 알렉산드로 사무총장이 개입하며 케냐의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게 됐고, 경제 사정도 나아질 게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올림푸스의 케냐 진출은 경제와 정치 두 분야에 모두 숨통을 틔워준 셈이다.
“오늘은 케냐를 비롯해 아프리카의 번영과 평화, 발전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순간에 함께 할 수 있어 크나큰 기쁨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알렉산드로 총장이 기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최치우와 움바투 대통령은 투자 협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사실 사인은 요식 행위였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계약 조건과 세부 사항은 실무진에서 이미 조율을 마쳐놓았다.
두 사람은 각각 올림푸스와 케냐 정부를 대표해 최종 결재를 한 것이다.
“위대한 결단을 내린 케냐의 움바투 대통령님, 올림푸스의 최치우 대표님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UN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아프리카 대륙의 평화 발전에 기여하겠습니다.”
알렉산드로 총장이 말을 마치자 기자단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식인들은 내막을 알고 있었다.
UN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케냐의 정치적 자유를 위해 노력했음을 말이다.
최치우도 움바투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움바투 대통령은 다소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크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 민주화는 필수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요소다.
최치우 덕분에, 그리고 알렉산드로 총장 덕분에 케냐 감옥의 정치범들은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야당 정치인과 용감한 기자들도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발언의 자유를 얻었다.
물론 정치적 자유가 늘어나면 싸울 일도 많아진다.
독재에 비해 민주화는 시끄럽고 복잡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러한 소란과 의견 충돌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백신이다.
‘경제 발전을 기회로 삼아 역사에 남을 지도자가 될지, 아니면 구시대의 잔재가 될지는 당신 손에 달렸어.’
최치우는 움바투 대통령의 옆모습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생각을 했다.
만약 케냐의 대통령이 바뀌어도 어쩔 수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올림푸스와 맺은 투자 협약을 뒤집지 못한다.
그랬다간 경제 발전을 꿈꾸는 케냐 국민들의 원성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처억!
알렉산드로 총장이 자리로 돌아오자 움바투 대통령이 벌떡 일어났다.
잠깐 숨을 고른 그는 단상의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멀리 온 손님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 게 우리 케냐의, 아프리카의 전통이오. 먹고 마시며 역사적인 날을 같이 기념합시다!”
케냐 정부는 다국적 기자단이 참석하는 만찬을 준비했다.
움바투 대통령은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국민들에게도 통 크게 한턱을 냈다.
일주일 전부터 정부에서 특별 교부금을 푼 것이다.
오늘 TV 중계로 협약식을 지켜본 케냐 국민들은 여기저기서 평소보다 거한 저녁상을 차릴 것이다.
“대통령님, 총장님. 만찬에 앞서 먼저 들릴 곳이 있습니다.”
최치우는 움바투 대통령과 알렉산드로 총장에게만 들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좋게 환영 만찬을 알리고 돌아온 움바투 대통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파티 장소로 가지 않을 것이오?”
“가야죠. 하지만 더 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복잡한 일은 다 끝냈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나이로비로 오는 길에 모잠비크의 반군 한 명을 생포했습니다.”
“반군을?”
움바투 대통령이 눈을 크게 떴다.
반군은 민감한 단어다.
아프리카의 모든 정부 관계자는 반군이라고 하면 치를 떤다.
알렉산드로 총장도 근심어린 얼굴로 관심을 보였다.
“최 대표님이 따로 말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각지의 반군들이 연합체를 결성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지원으로 남몰래 세를 불리면서.”
구구절절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움바투 대통령과 알렉산드로 총장은 문제의 심각성을 단번에 인지했다.
특히 움바투 대통령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것 같지만, 그는 험난한 아프리카에서 입지를 굳힌 능구렁이다.
반군들이 외부 지원을 받아 연합을 결성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자는 어디에 있소?”
“호텔에 가둬뒀습니다. 함께 가서 확인하시죠.”
“알겠소. 우리는 만찬에 늦게 참석한다고 일러두리다.”
움바투 대통령이 먼저 일어나 정부 관계자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그 사이 최치우와 알렉센드로 총장은 무거운 눈빛을 교환했다.
케냐에 단비가 내린 오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해야 할 때다.
***
“조셉, 똑바로 대답해. 여기서 너의 운명이 결정된다.”
최치우는 단전에서 내공을 일으켰다.
은은하게 뿜어진 기운이 조셉을 압박하고 있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조셉의 정신은 이미 최치우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
조셉은 최치우 좌우에 선 움바투 대통령과 알렉산드로 총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군지 모르지만 심상치 않은 거물들 같았다.
이 자리에서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말이 진짜인 게 분명했다.
“외부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우는 반군이 얼마나 된다고 했지?”
“우, 우리 말고도 5곳이 더…….”
조셉이 말끝을 흐렸다.
움바투 대통령은 화를 참지 못하고 두터운 손등으로 벽을 때렸다.
퍼억!
“은밀하게 세력을 모으는 신규 반군이 6개나 된다는 말이오?”
움바투 대통령은 알렉산드로 총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UN 평화유지군이 이런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뭘 했냐는 뜻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 총장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전혀 감지하지 못한 위험이 물밑에서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었다.
만약 최치우가 조셉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아프리카 대륙에 엄청난 혼돈이 닥칠뻔 했다.
동시다발적으로 6개의 신규 반군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 사람은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최치우가 나설 차례였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대표님, 설마?”
“맞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6개의 신규 반군 세력을 점령하고, 누가 외부에서 지원을 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