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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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와 알렉산드로 총장, 움바투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다.
언제 다시 한자리에 모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최치우는 강력한 폭탄을 투하했다.
아직 100% 확실한 자료를 모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일이 훨씬 어려워질 것 같았다.
아프리카 인구 말살 정책.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이다.
어려운 협상을 방금 막 마치고 꺼낼 이야기로 어울리진 않았다.
자칫하면 UN과 케냐 정부, 그리고 올림푸스의 삼자협약도 틀어질지 모른다.
최치우는 꽤 많은 것을 걸고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처음 듣는 말인데, 그런 파일이 있단 말이오?”
움바투 대통령이 커다란 눈을 꿈벅거리며 물었다.
최치우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시종일관 바위처럼 꼿꼿한 알렉산드로 총장의 반응이 궁금했다.
“UN 내부에서 음모론처럼 떠도는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법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파일의 존재를 인정했다.
비록 음모론으로 치부했지만, 아예 없는 이야기라고 모르는 척 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최치우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올림푸스에게 있어 아프리카는 광활한 기회의 땅입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프리카가 평화롭게 개발될 때, 인류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발전을 원하지 않는, 오히려 끝없는 혼란과 고통을 원하는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 떠도는 음모론과 다른 내용이 있는 겁니까?”
알렉산드로 총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를 이끄는 제가 근거 없는 음모론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겠습니까? 그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일정을 취소하겠습니다.”
UN 사무총장의 스케줄은 인기 연예인보다 더 바쁘다.
하루에도 여러 개의 공식 행사와 비공식 미팅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일정을 늘리거나 취소하는 것도 쉽지 않다.
대부분 국가수반이나 장관급 이상과 일정을 잡아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 총장은 결단을 내렸고, 움바투 대통령도 뒤따랐다.
“그럼 나도 오늘 스케줄은 비우겠소, 크흠.”
최치우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 분의 시간, 결코 아깝지 않을 겁니다.”
삼자대면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렸다.
어쩌면 헤라클래스를 인정받고, 케냐의 미래를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대화가 오갈지 모른다.
최치우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숨을 골랐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는 기회다.
UN 사무총장과 아프리카 주요국 대통령 앞에서 네오메이슨의 음모를 언급할 수 있는 기회.
일정까지 취소한 두 사람을 실망시키면 머나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반면 오늘 결과에 따라 지름길을 뻥 뚫을 수도 있다.
“자리를 옮기시죠.”
최치우가 두 사람을 새로운 장소로 이끌었다.
역사적인 삼자대면이 예측할 수 없는 영역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
최치우는 에릭 한센만 몰락시킨 게 아니었다.
한센 가문을 짓밟으며 뿌리조차 남기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릭 한센은 퓨처 모터스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거듭 무리수를 뒀다.
덕분에 임시 주총을 소집하고, 최치우를 턱밑까지 위협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최후의 승부에서 절망을 맛본 에릭은 자살 폭탄 테러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에릭의 죽음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죽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진 않는다.
특히 냉정한 비즈니스 정글에서 자살은 최악의 수단 중 하나다.
에릭의 죽음으로 한센 가문의 상속자는 여동생 델피로 바뀌었다.
최치우는 델피와 한센 가문에 정식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에릭 한센의 자살 폭탄 테러 피해 보상 소송은 점점 덩치가 커졌다.
에릭은 우호 지분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했다.
에릭을 믿고 지분을 위임한 투자자들은 한센 가문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었다.
최치우도 가만있지 않았다.
허위 사실에 기초한 불법적인 경영권 위협으로 소송 규모를 키웠다.
수장을 잃은 한센 가문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월 스트릿의 철옹성은 한순간에 모래성이 되어 와르르 부서지고 있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델피 한센은 책임을 회피한 채 잠적했고, 한센 가문이 보유한 자산은 갈기갈기 찢어져 먹잇감이 됐다.
최치우도 전쟁 보상금을 받듯 한센 가문의 자산을 흡수하는데 일조했다.
미국 법원은 무자비한 판결을 내리기로 유명하다.
변변한 로펌 하나 포섭하기 힘들어진 한센 가문이 몰락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한센 가문을 완전히 몰락시킨 최치우는 자산만 흡수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다른 투자자들도 한센 가문의 자산을 나누는데 눈이 빨개져 있었다.
대신 최치우는 한센 가문의 임원들을 포섭하는데 주력했다.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뺏어 오는데 더 큰 신경을 기울인 것이다.
한센 가문의 임원들은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능력자다.
하지만 당장 갈 곳이 없어진 불안한 상태였다.
업계에서도 한센 가문 출신이라면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수장인 에릭이 자살 테러라는 말도 안 되는 결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최치우가 손을 내밀었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과거의 악연은 사소해진다.
냉정하게 말하면 최치우와 에릭의 싸움이었을 뿐, 한센 가문의 임원들은 시키는 대로 움직인 월급쟁이였다.
물론 초고액 월급쟁이였지만, 머리가 아닌 수족인 점은 변하지 않는다.
최치우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한센 가문의 임원들을 받아들였다.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은 어디서든 제몫을 해낼 것이다.
하지만 최치우가 진짜 원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한센 가문의 내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급 정보다.
사실 정보를 얻기 위해 패잔병인 임원들을 스카웃한 셈이었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최치우의 전략은 확실하게 통했다.
한센 가문의 임원들은 새로운 주인의 마음을 사려고 경쟁하듯 내부 정보를 꺼냈다.
하나씩 따로 보면 별로 영양가 없는 정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조각 한 조각 퍼즐을 맞추면 커다란 그림이 완성된다.
한센 가문의 임원들 중에는 네오메이슨의 하부 조직원도 있었다.
그는 언제 네오메이슨이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최치우는 그에게 든든한 경호망을 제공했고, 네오메이슨이란 조직에 대해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인구 말살 정책이라는 파일도 정보들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툭 튀어나왔다.
삐빅-
최치우가 USB를 노트북 컴퓨터에 연결하고 키보드를 눌렀다.
그러자 연결된 대형 화면에 PPT가 떠올랐다.
PPT의 첫 번째 페이지는 네오메이슨 조직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네오메이슨. 막강한 금융 자본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조종하는, 아니 조종한다고 믿는 조직입니다. 이들은 충성을 바친 조직원들에게 부귀영화를 보장합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조직이 비밀스럽게 운영될 수는 없죠. 철저한 점 조직 형태를 지키면서 신념의 전사를 키웁니다.”
“신념의 전사?”
움바투 대통령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냉철한 자본 조직과 신념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네오메이슨은 사이비 종교와 비슷합니다. 자신들이 과거부터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배해 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죠. 그렇기 때문에 한번 가입한 사람들이 목숨까지 바치는 겁니다.”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배한다……. 막강한 힘을 갖고 타락해 버린 음지의 UN이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비슷합니다.”
최치우는 알렉산드로 총장의 비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UN과 네오메이슨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양지에 UN이 있다면 네오메이슨은 음지의 세계 정부 역할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동안 네오메이슨은 금융과 석유를 중심으로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렇기에 한 세대 앞서 전기차를 개발한 퓨처 모터스는 네오메이슨이 용납할 수 없는 회사입니다. 퓨처 모터스의 전신인 T-모터스 공장에 불을 지르고, 에릭 한센이 무리하게 경영권을 노린 것도 네오메이슨을 배경에 두고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움바투 대통령은 스케일 큰 이야기에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그는 똑똑하고 유능한 지도자는 아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손꼽히는 정치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움바투 대통령을 잘 다독여야 아프리카를 단결시킬 수 있다.
최치우는 움바투와 알렉산드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브리핑을 계속했다.
“네오메이슨은 로우 서클, 미드 서클, 하이 서클이라는 세 단계로 구성돼 있습니다. 로우 서클의 멤버들은 점 조직의 일원일 뿐입니다. 라이프치히 테러 이후 독일 정부에서 숙청을 당한 공무원들, UN에서 해고당한 143명의 직원들 다수가 로우 서클입니다. 그리고 라이프치히 테러를 사주한 마르코 슈테겐, 독일 교통부장관의 보좌관이었죠. 그는 미드 서클이었습니다. 에릭 한센은 미드 서클에서 가장 높은 존재, 사실상 하이 서클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하더군요.”
“에릭 한센이 미드 서클이라면 하이 서클은 대체…….”
“어마어마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전 세계를 상대로 판을 벌린 사이비 교주들이죠. 아마 정체가 밝혀지면 우리가 아는 유명한 얼굴들이 꽤 나올 겁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알렉산드로 총장과 움바투 대통령은 지구의 70억 인구에서 상위 1%에 드는 거물이다.
두 사람이 접하는 정보의 레벨은 일반인들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오메이슨의 실체는 사뭇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다.
최치우는 아직 아프리카 인구 말살 정책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삑-!
PPT의 두 번째 화면이 떠올랐다.
화면에는 지구의 인구 증가율과 대륙별 인구 증가율이 그래프로 정리돼 있었다.
“선진국은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의 출산율 증가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70억을 돌파한 지구의 실제 인구는 80억이 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죠.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의 인구는 통계에 정확히 잡히지 않으니까.”
“인구가 늘어나면 지구가 한계에 도달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인위적으로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인구 말살 정책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나 인구를 줄이기 위해서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죠.”
“전제 조건?”
“첫째,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둘째, 안전하고 선별적으로 인구 말살이 가능할 것.”
“그런 조건은 비인도적… 아니, 인위적으로 인구를 줄이는 정책 자체가 비인도적이지만.”
“네오메이슨은 인도주의를 따지지 않습니다, 총장님.”
최치우가 다시 한번 차가운 현실을 환기시켰다.
네오메이슨은 망상에 빠진 사이비 종교와 달리 현실에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들의 음모를 파악해야 한다.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지역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프리카.”
이번에는 움바투 대통령이 대답했다.
멀뚱거리던 그의 얼굴은 강렬한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네오메이슨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체감이 된 것이다.
“네오메이슨은 아프리카 대륙에 재해와 전쟁을 일으키려 합니다. 선진국과 동떨어진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군수업과 물류업이 호황을 맞이하고, 정체된 세계 경제가 뜨거워지겠죠. 당연히 네오메이슨도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될 겁니다. 또 아프리카 대륙에 국한된 재해와 전쟁이기 때문에 미국, 유럽 같은 서방국가는 인구 말살의 영향에서 안전하게 비껴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무지막지한…….”
움바투 대통령이 주먹을 불끈 쥐고 식은땀을 흘렸다.
분노와 황당함, 두려움 등 복잡한 감정이 뒤얽히고 있었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말없이 최치우가 띄운 PPT 화면을 노려봤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최치우는 두 사람을 향해 결정타를 날렸다.
“우리가 손을 놓고 있으면 아프리카 인구 말살 정책, 이 시나리오는 언젠가 현실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