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진군>
세 사람이 비밀리에 모였다.
뉴욕 시내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미국의 파파라치는 얼마나 끈질긴지 모른다.
국내의 언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집념으로 유명인을 쫓아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와 알렉산드로 총장, 케냐의 움바투 대통령은 소리 소문 없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세 명이 만나기로 약속한 호텔 최고층은 며칠 전부터 완벽하게 통제가 됐다.
뉴욕 경찰도 UN 사무총장의 주요 일정에는 최대한 협조를 한다.
기자들과 파파라치의 끈기가 아무리 대단해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을 친 것이다.
100명이 들어와도 남을 연회장 안에는 오직 세 사람밖에 없었다.
심지어 호텔 직원의 출입도 허락되지 않았다.
UN과 뉴욕 경찰 소속의 경호원들도 연회장 바깥에서 출입구를 지켰다.
도청 장치를 수색하는 작업도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이뤄졌다.
그야말로 물 샐 틈도 없이 깐깐하게 사전 준비를 마친 장소였다.
괜히 유난을 떠는 게 아니었다.
알렉산드로 총장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비록 UN이 종이호랑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세계 정부라는 칭호는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알렉산드로 총장은 국제 사회의 정세를 뒤바꿀 수 있다.
움바투 대통령도 만만치 않다.
영향력의 범위는 좁지만, 집중도는 알렉산드로 총장을 뛰어 넘는다.
케냐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국가로 손꼽힌다.
특히 중부 지역에서 케냐의 발언권은 막강하기 짝이 없다.
움바투 대통령은 케냐를 통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프리카 대륙을 움직이는 극소수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최치우 역시 설명이 불필요한 인물이었다.
올림푸스는 소울 스톤을 비롯해 다양한 비즈니스로 인류의 미래를 선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퓨처 모터스는 세계 자동차 시장의 지형을 바꾸는 중이다.
최치우는 지구의 진보를 10년 이상 앞당긴 혁신적인 리더로 거론된다.
인기와 명예, 그리고 자산으로 따지면 알렉산드로 총장과 움바투 대통령을 능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뜨거운 화제를 낳을 게 뻔했다.
게다가 알렉산드로, 움바투, 최치우는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시간을 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보안 유지에 각별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올림푸스의 케냐 진출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겠습니다.”
알렉산드로 총장이 입을 열었다.
올림푸스와 케냐 정부는 사전 조율을 마쳤다.
남아공본부장 이시환이 케냐의 장관들을 만났고, 구두 계약까지 성사시켰다.
움바투 대통령과 최치우는 오늘 처음 만나지만 벌써 몇 번이나 통화를 하고 서신을 주고받았다.
사실 둘이 따로 만나 도장만 찍으면 되는 일이다.
올림푸스의 케냐 진출에 UN이 관여할 부분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 총장과 삼자대면을 성사시킨 이유가 있었다.
“총장님, 아시는 것처럼 아프리카의 치안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올림푸스가 케냐를 통해 중부로 진출하게 되면 온갖 게릴라와 반군들이 이빨을 드러낼 겁니다. 하지만 케냐 정부의 군대를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최치우가 본론을 꺼내며 움바투 대통령을 쳐다봤다.
판을 깔았으니 직접 나서서 마무리를 지으라는 뜻이었다.
“크흠, 흠. 총장도 알다시피 우리가 추가적으로 병력을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소? 그렇다고 UN 평화유지군을 전투가 일어날지 모르는 현장에 배치할 수도 없고…….”
알렉산드로 총장은 눈치가 빨랐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최치우와 움바투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두 분이 말을 맞추고 온 것 같은데, UN에 바라는 게 무엇입니까?”
“올림푸스 남아공본부에 소속된 사설 무장단체, 헤라클래스의 케냐 진출을 UN이 묵인해 주면 좋겠습니다.”
최치우는 빼지 않고 희망 사항을 말했다.
UN은 아프리카 곳곳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놓았다.
병력 자체는 여러 나라에서 차출한 것이다.
그러나 평화유지군을 최종적으로 지휘하는 역할은 UN이 맡고 있다.
지금까지 헤라클래스는 남아공의 울타리 안에서 커왔다.
하지만 케냐를 기점으로 영역을 넓히고, 규모를 대폭 키우려면 UN 평화유지군의 묵인이 필요하다.
최치우는 케냐 진출을 명분으로 삼아 헤라클래스 병력을 1,000명까지 늘릴 생각이었다.
헤라클래스를 단순한 사설 무장단체가 아닌, 아프리카의 웬만한 정부군을 제압할 수 있는 특수부대로 만들려는 것이다.
“상당히 곤란한 부탁이라는 것은 대통령과 대표님 모두 아실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쉬운 상대가 아니다.
UN 내부의 네오메이슨을 쓸어버리며 최치우와 손을 잡았지만, 사안에 따라 얼마든지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초강대국 미국의 압력과도 맞서 싸우는 외골수다.
최치우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난 환생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됐다.
최치우가 경험한 차원마다 알렉산드로 총장 같은 강골(强骨)은 반드시 존재했었다.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도, 당근으로 회유하는 것도 어렵다. 명분을 주는 게 최선이지.’
최치우는 알렉산드로 총장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명분을 준비했다.
아프리카의 발전과 평화.
UN 입장에서 이보다 중요한 명분은 많지 않다.
“올림푸스는 케냐에 소울 스톤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로 총장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기업 투자와 소울 스톤 발전소는 맥락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주요 선진국들이 소울 스톤 발전소를 유치하지 못해 안달이다.
이제 몇 달만 지나면 독일 라이프치히도 발전소의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북미나 유럽, 아시아가 아닌 아프리카에 세 번째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지을 수도 있다니.
지역 균형 발전을 주장하는 UN조차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최치우는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소울 스톤 발전소가 들어서면 케냐와 아프리카 중부가 어떻게 바뀔까.
먼저 그동안 투자를 망설이던 국가와 기업이 앞장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올림푸스는 국제 사회에서 불패의 신화를 쓰고 있다.
최치우가 대대적인 투자를 결정한 국가, 그 자체가 보증수표인 셈이다.
무작정 난개발을 일삼던 아프리카의 분위기도 사뭇 달라질 것 같았다.
소울 스톤 발전소는 친환경 대체에너지 기술의 정점으로 불린다.
이제까지 친환경은 선진국의 전유물이었다.
산업화 시대의 수혜를 누린 선진국이 뒤늦게 친환경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반면 한창 성장하기 급한 개발도상국에게 친환경은 거추장스러운 짐이었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데 친환경이라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소울 스톤 발전소는 기존의 상식을 파괴한다.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하고, 동시에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면서 공해 물질을 거의 배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21세기가 시작되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프리카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여전히 미개한 대륙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돌아다닐 정도다.
바로 그곳에 인류가 만든 친환경 과학 기술의 정수인 소울 스톤 발전소가 세워지는 것이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어마어마한 변화의 물결이 아프리카를 뒤덮을 거라 생각했다.
“UN이 헤라클래스를 묵인해주면 정말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지을 겁니까?”
거절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최치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림푸스는 그 어떤 기업보다 아프리카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낙후된 남아공 광산지대가 올림푸스의 진출 이후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진정성을 믿어주십시오.”
알렉산드로 총장과 최치우가 핑퐁을 주고받는 사이 움바투 대통령은 커다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합의를 해야 움바투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끼어들어 초를 치는 것보단 가만히 있는 게 최치우를 도와주는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 총장은 만만하지 않았다.
갑자기 질문의 화살을 움바투 대통령에게 돌렸다.
“대통령님, UN이 올림푸스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면 케냐가 가장 큰 이득을 누리겠습니다.”
“흠, 뭐 꼭 그렇다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케냐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정곡을 찔린 움바투가 움찔했다.
설마 UN 사무총장이 대놓고 케냐의 정치 불안을 언급할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최치우가 나서지 않고 알렉산드로 총장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올림푸스에 해가 되는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았다.
“소울 스톤 발전소가 들어서면 움바투 대통령님의 지지율도 수직 상승할 것 같습니다. 올림푸스 덕분에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게 될 테니 케냐에서도 좋은 보상 조건을 제시했을 것이고, 안 그렇습니까?”
“크흠, 흠, 흠.”
알렉산드로 총장은 최치우와 움바투가 맺은 계약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최치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움바투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총장은 넘어왔다. 깽판을 칠 거면 길게 말할 필요도 없으니까.’
최치우는 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알렉산드로 총장이 날카롭게 추궁하는 이유는 하나다.
움바투 대통령에게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UN의 수장은 케냐 대통령의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도 갑자기 케냐가 정치적 격변기를 맞이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발전, 그게 UN이 아프리카에 바라는 유일한 것입니다. 대신… 야당 정치인과 언론사 기자들에 대한 탄압은 적당히 하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언제 탄압을 했다고 그러시오, 총장?”
“감옥에 갇힌 기자들부터 석방하십시오. 무기한 가택 연금을 지시한 야당 정치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도. 어차피 올림푸스가 투자를 하고, 케냐 경제가 살아나면 대통령의 인기는 높아질 텐데 무엇이 그리 걱정이십니까?”
“크흐음……. UN이 내정을 간섭하는 것은 아니리라 믿소.”
“내정 간섭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받아들인다면 헤라클래스의 케냐 진출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최치우는 때가 왔음을 느꼈다.
그는 움바투 대통령과 동맹을 맺은 게 아니다.
올림푸스는 케냐가 필요할 뿐, 움바투 대통령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더구나 알렉산드로 총장의 조건은 모두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UN이 헤라클래스를 묵인하면 우리는 약속대로 케냐에 대한 투자를 이행하겠습니다.”
최치우는 UN에게 조건을 내밀었고, UN은 케냐에게 또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물고 물리는 삼각관계에서 가장 약자는 움바투 대통령이다.
올림푸스의 투자가 성사되지 않으면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은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알겠소, 내 통 큰 결단을 내리지. 기자들을 석방하고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리다. 지긋지긋한 야당 놈들도 마음껏 떠들라고 하겠소.”
“UN에서 정식으로 합의문을 보내겠습니다.”
“그거야 총장 마음대로 하시오.”
움바투 대통령이 UN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나름대로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최치우는 눈을 빛내며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움바투 대통령이 케냐의 정치적 자유를 높이게 되면 전 세계가 UN을 칭찬할 것이다.
알렉산드로 총장의 명예와 입지도 그만큼 더 탄탄해질 것 같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 차라리 잘 됐다. 총장도 얻어가는 게 있어야지.’
이로서 세기의 삼자대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움바투 대통령은 원하는 대로 올림푸스의 투자를 받게 됐고, 최치우는 UN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기회의 땅 케냐로 진군하면 된다.
알렉산드로 총장도 케냐 대통령을 설득해 평화적인 조치를 이끈 공을 세웠다.
실제로 가장 많은 파이를 획득한 사람은 단연 최치우였다.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의 경제권, 그리고 병력까지 최치우가 거머쥐게 됐다.
최치우가 이토록 아프리카에 집중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총장님, 대통령님. 어렵게 모였으니 꼭 드리고픈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아프리카 인구 말살 정책이라는 파일을 알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