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207화 (207/243)

# 207

<비극적 종말>

임시 주주총회를 마친 퓨처 모터스는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실리콘밸리 사무실에 모인 대주주와 투자자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싸움이었지만, 최치우와 브라이언은 승리를 자신하고 파티를 준비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주총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에릭 한센의 편에서 최치우와 맞선 주주들도 모두 초청했다.

위임장을 내는 대신 현장에 직접 참석한 주주들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이번 일로 최치우에게 찍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앙금을 푸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요식 행위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승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비록 주총에서는 경영권을 걸고 싸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괜한 분란의 씨앗을 남겨둬서 좋을 게 없다.

속마음은 괘씸하더라도 승자의 아량을 보여줘야 한다.

물론 봐주지 말고 상대를 짓밟아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퓨처 모터스에 투자를 한 주주들은 미우나 고우나 같은 배를 탄 파트너다.

한 번쯤은 통 크게 용서를 해줄 필요가 있다.

“우리 함께 더 큰 꿈을 꿉시다. 퓨처 모터스의 비전을 위하여-!”

“비전을 위하여!”

최치우가 한국식으로 건배를 선창했다.

연회장에 모인 투자자들도 그를 따라 샴페인 잔을 높이 들었다.

턱시도를 입은 빅밴드가 재즈 음악을 연주했고, 음식과 술도 풍성했다.

천장에 달린 크리스탈 샹들리에는 퓨처 모터스의 미래를 밝혀줄 것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국의 부(富)가 집중된 실리콘밸리지만, 이렇게 화려한 파티는 자주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최치우의 동향이다.

퓨처 모터스의 주주들은 대부분 무척 바쁘다.

다들 잘 나가기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티에 참석한 것은 최치우와 안면을 트고 싶기 때문이다.

이번 주총에서 최치우 편에 선 사람들은 생색을 내고 싶었고, 에릭 편에 선 사람들은 은근슬쩍 없던 일로 무마하고 싶었다.

최치우는 투자자들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샴페인 잔을 한 손에 든 최치우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5명씩 모여 있는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여러 투자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워낙 많은 주주들이 파티에 참석해서 길게 대화를 나눌 순 없었다.

한 테이블에서 최대한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분이다.

하지만 최치우의 5분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주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톰슨 이사님도 오셨군요. 요즘 톰슨&메이커스의 제품들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 저도 애용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이거 최 대표님께서 우리 고객이실 줄은……. 괜찮으시면 서울 사무실로 한정판 세트를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영광이죠. 제가 꼭 여기저기 자랑하겠습니다.”

“허허허허허!”

최치우는 주요 투자자의 이름과 사업 현황을 정확히 기억했다.

임시 주주총회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스터디를 한 결과였다.

세계 비즈니스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최치우가 일일이 얼굴에 금칠을 해주면 누구든 입이 귀에 걸릴 수밖에 없다.

파티장 분위기가 최치우를 중심으로 후끈 달아오르는 게 당연했다.

“최 대표님, 드릴 말씀이…….”

“편하게 말해주세요.”

간혹 최치우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최치우는 마다하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제가 한센 가문 편을 든 것 같지만, 마지막 순간 위임장을 거두고 대표님과 뜻을 함께했습니다. 혹시 오해가 있으면 안 되기에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 거라면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주총에서 다른 뜻을 보인 주주들의 의견도 존중합니다. 건전한 비판은 언제든 수용해야죠.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저를 다시 믿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역시 우리 대표님의 그릇은 제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습니다.”

“여전히 많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퓨처 모터스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치우는 불안해하는 주주들을 능숙하게 다독였다.

이번 주총에서 에릭의 편을 들었다고 불이익을 주지 않을 거란 신호를 분명하게 줬다.

물론 두 번째는 다를 것이다.

이런 주주총회가 다시 열릴 가능성 자체도 거의 없다.

다만 그때 또다시 최치우와 맞서면 진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된다.

최치우의 아량에 감탄한 주주들도 두 번의 자비는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에릭?’

바쁘게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환담을 나누던 최치우가 눈을 빛냈다.

연회장 뒤쪽 테이블에 에릭 한센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총에서 패배한 에릭은 절망에 빠져 진즉 떠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용케 파티까지 참석한 것이다.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다.’

최치우는 에릭의 꿍꿍이가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는 퓨처 모터스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한센 가문의 자산을 탈탈 털었다.

그렇다고 해서 빈털터리가 된 것은 아니다.

우호 지분을 빼고, 에릭 한센이 보유하게 된 퓨처 모터스의 지분은 그대로 남아 있다.

지분을 팔면 100억 달러, 우리 돈 10조 가까운 현금이 남는다.

무리해서 지분을 사느라 엄청난 손해를 봤지만 그래도 10조면 무시 못 할 자산이다.

그러나 에릭 한센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돈이 얼마 남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최후의 승부를 걸었는데 또 최치우에게 완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네오메이슨의 지도부, 하이 서클에 들어가는 문은 완전히 닫혔다.

이제 네오메이슨에서 버림받지 않을지 고민하는 처지가 됐다.

네오메이슨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으면 한센 가문은 바람 앞 촛불이나 마찬가지다.

수십억 달러의 손해, 우호 지분을 맡긴 투자자들에게 갚아야 할 빚, 그리고 네오메이슨의 낙오자가 됐다는 두려움까지.

에릭의 정신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멀쩡한 상태라면 뉴욕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했을 것이다.

상처뿐인 패배를 당한 에릭이 퓨처 모터스 파티에 남은 것은 멘탈이 깨졌다는 증거다.

최치우는 에릭 한센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리를 지키는지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에릭.”

“이거 이거… 축하합니다. 리빙 레전드, 치우 최. 역시 대단해요. 내게 붙기로 약속한 투자자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돌려버리다니.”

“좋은 승부였다. 오랜만에 위기감을 느꼈어.”

“딱히 위로는 안 되네요. 그래서 말인데…….”

에릭이 말끝을 흐렸다.

최치우는 공허하게 텅 빈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봤다.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잠깐은 시간을 내줄 수 있겠지요?”

“그러지.”

패배를 인정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을까.

무엇이든 최치우가 에릭을 피할 이유는 없다.

에릭 한센이 자랑하던 영역, 금융과 비즈니스의 무대에서 최치우가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무력을 이용해 에릭의 무릎뼈를 박살 냈을 때보다 훨씬 통쾌하고 뿌듯했다.

최치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을 섰다.

연회장에 딸린 작은 방에서 에릭과 둘이 대화를 나누려는 것이다.

딸칵-

방문을 잠근 최치우가 에릭을 바라봤다.

“따로 할 말이 뭐지?”

“네오메이슨.”

에릭 한센이 자기 입으로 네오메이슨을 언급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최치우는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리며 에릭의 불안한 시선과 떨리는 손끝을 주시했다.

“네오메이슨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최치우가 정곡을 찔렀다.

덕분에 에릭은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언제 다시 최치우와 같은 방에 있게 될지 모른다.

오늘이 지나면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눌 기회도 없을 것이다.

“너 때문에… 그래, 너 때문에! 하이 서클의 문턱에서 미끄러져 소모품 취급을 받게 됐지!”

“하이 서클?”

“세상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지구의 인구까지 결정하는 하이 서클이 될 수 있었는데, 너만 아니었으면! 니가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에릭 한센이 폭주하고 있었다.

죽음을 통보받은 환자는 여러 단계를 거친다.

절망, 포기, 거부, 분노, 순응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에릭 한센은 마치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 같았다.

절망의 단계를 지나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셈이다.

“으아아아-! 죽어, 죽어라! 최치우!”

고막을 때리는 절규를 토해낸 에릭이 오른발을 들었다.

호리호리 비쩍 마른 체구로 발차기를 하려는 것이다.

부우우웅-!

그런데 발차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허공이 찢어지며 묵직한 바람 소리가 울렸다.

게다가 발차기의 각도도 높았다.

에릭의 정강이가 최치우의 왼쪽 옆구리를 노리고 사선을 그렸다.

퍽!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최치우는 왼팔로 에릭의 발차기를 막았다.

‘빠르다. 그리고 강하다!’

방심했다면 옆구리에 정타를 맞을 뻔 했다.

제때 가드를 올렸지만 왼팔을 감싼 정장 자켓이 찢어져 버렸다.

팔이 욱신거리는 게 파괴력이 만만치 않았다.

일반인, 특히 에릭처럼 병약한 스타일의 남자가 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이야아아-!”

에릭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다리를 들었다.

최치우는 그의 무릎에 기계가 장착됐음을 파악했다.

퍽! 퍼억! 퍼퍽!

에릭 한센은 쉬지 않고 오른발, 왼발을 야구방망이처럼 휘둘렀다.

이만한 속도와 힘, 지구력은 인간계 최강자인 리키도 상대하기 버거울 것 같았다.

근력을 10배 이상 부풀리는 로보티컬 칩은 비실비실한 에릭을 순식간에 엄청난 강자로 만들었다.

최치우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올림픽 금메달을 땄어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했다면 대책 없이 당했을 것이다.

지금쯤 에릭의 무지막지한 발차기에 곤죽이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치우는 육체의 능력으로 인간계를 한참 초월한 존재다.

에릭의 발차기를 묵묵히 막아낸 최치우가 결단을 내렸다.

‘위험한 기술이다. 이 기술이 적용되면 네오메이슨의 군대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어.’

로보티컬 칩을 장착한 병사들은 일당백의 위용으로 전쟁터를 휩쓸 것이다.

에릭 한센 대신 특수부대 출신 용병이 로보티컬 칩을 장착하면 얼마나 더 강해지겠는가.

최치우는 에릭을 멈추고, 그의 무릎에 뭐가 박혔는지 알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쉬이익-

발차기를 막기만 하던 최치우가 사라졌다.

아니, 너무 빨리 움직여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에릭의 동체 시력으로 최치우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보티컬 칩은 하체 근력을 비정상적으로 강화시킬 뿐이다.

그마저도 아직은 부작용과 후유증을 해결하지 못했다.

에릭의 발차기 파괴력은 놀라웠지만, 최치우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콰악!

공간을 뛰어넘은 최치우가 에릭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줄이 꽉 잡힌 에릭은 숨을 켁켁 거리며 괴로워했다.

산소가 차단되자 두 다리를 움직일 힘도 없었다.

“네오메이슨이 너한테 무슨 장난을 쳤는지 알아야겠다, 에릭.”

“크허어억…….”

에릭은 볼썽사납게 신음을 흘릴 따름이었다.

최치우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목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 순간, 에릭이 축 늘어진 손가락을 겨우 움직였다.

삑-!

기어코 로보티컬 칩을 폭발시키는 비밀 버튼을 누른 것이다.

펜타곤에서 쫓겨난 악마적 천재 론 폴 박사는 버튼을 누르면 전방의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파바바바바박-!

에릭의 무릎 두 쪽이 터지며 수백 발의 총알 파편이 폭발했다.

하필 가까이 붙어있던 최치우는 로보티컬 칩에서 폭발한 총알 세례를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파바박! 파파파팍!

엄청난 폭발음과 매캐한 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자폭 공격으로 두 다리를 잃은 에릭도, 방금까지 그의 목을 잡고 서 있던 최치우의 모습도 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