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205화 (205/243)

# 205

<파국으로>

4월이 됐고, 벚꽃이 여의도 윤중로를 물들였다.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여의도는 꽃놀이를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찼다.

올림푸스 본사가 들어선 빌딩도 관광 코스가 됐다.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올림푸스 본사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실리콘밸리의 구글 본사나 애플 본사에 여행을 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올림푸스도 그만큼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시가총액과 매출 규모로 따지면 여전히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은 오성그룹이다.

하지만 외국에서 두 유 노 코리아(Do You Know Korea)라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올림푸스나 최치우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찰칵- 찰칵!

여기저기서 셀카 찍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혹시 사무실에 드나드는 최치우를 볼 수 있을지 기대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았다.

소녀 팬들이 연예인들의 방송국 출퇴근길에 진을 치는 현상과 비슷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스코트로서 최치우의 인기는 한류스타들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올림푸스 본사 덕분에 여의도 축제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그러나 정작 올림푸스 사무실 내부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임원들이 모인 회의실 공기는 겨울처럼 차가웠다.

창밖에는 봄이 완연했지만, 임원 회의실만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았다.

“우리가 가정한 최악의 시나리오, 그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치우의 입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26살 나이로 100조 원이 넘는 글로벌 기업을 만들어낸 전설적인 CEO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스윽-

최치우가 고개를 좌우로 돌려 임원들을 쳐다봤다.

임동혁 부사장과 김지연 홍보 이사, 백승수 총무 이사는 비교적 익숙한 표정이었다.

예전부터 최치우의 카리스마에 단련이 된 덕분이다.

하지만 새롭게 스카웃된 임원들은 눈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자유분방한 외국인 임원도 마찬가지였다.

최치우는 한 톨의 내공도 쓰지 않았다.

그저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의 CEO라는 존재감만으로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었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실력을 증명하는 것은 성과와 업적이다.

그런 면에서 최치우는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CEO다.

늘 친절하고 미소 띤 얼굴을 보여주는 그가 한 번 무게를 잡으면 직원들은 어마어마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호 지분 확보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최치우의 시선이 임동혁에게 향했다.

다른 임원들은 속으로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동혁 부사장은 자타공인 올림푸스의 2인자다.

최치우의 묵직한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임동혁밖에 없을 것 같았다.

“현재 확신할 수 있는 우호 지분을 더하면 모두 41%입니다.”

“시간은 충분히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직접 뉴욕과 LA, 실리콘밸리를 돌아보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도 미리 했을 텐데요. 이 회의가 열리기 전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탔어야죠. 언제까지 지시를 받고 나서 움직일 겁니까?”

“죄송합니다.”

임동혁도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는 최치우와 장난스레 농담을 주고받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지금 최치우는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설정한 게 아니다.

CEO로서 임원들을 질책하는 자리였다.

“본사에 남아야 할 필수 인력을 제외하면 모든 네트워크를 동원해야 합니다.”

“네, 대표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에릭 한센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산을 쏟아붓는 중입니다. 퓨처 모터스를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기 바랍니다.”

최치우는 괜히 겁을 주는 게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임원들은 여러 글로벌 기업이 앞장서서 스카웃하려는 전문가다.

엄포가 통할 리 없다.

실제로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에릭은 한센 가문의 주요 자산을 매각하며 자금을 확보했고, 굵직한 투자자들에게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다.

아마 지금쯤 30%에 가까운 우호 지분을 확보했을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5%도 안 되는 지분으로도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다.

최치우처럼 개인이 최대주주인 경우는 무척 드물다.

그만큼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의 경영권 방어는 탄탄한 편이었다.

하이에나 같은 사모 펀드도 감히 눈독을 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에릭 한센이 도박판에서 올인을 외치듯 저돌적으로 지분을 매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에릭의 폭주를 막지 못하면 퓨처 모터스 주주총회가 열리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최치우 우호 지분과 에릭 한센 우호 지분의 대결로 주총이 개최되는 것 자체가 안 좋은 뉴스다.

퓨처 모터스의 경영권이 위험하다는 나쁜 신호를 외부에 주는 셈이다.

만약 퓨처 모터스가 흔들리면 올림푸스의 주식 가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는 이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한 지붕 두 가족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1주일. 우리 우호지분을 얼마나 더 확보하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능력을 기대하죠.”

최치우는 임원들을 스카웃하며 업계 최고의 조건을 보장해 줬다.

당연히 그만한 값어치를 해내야 한다.

올림푸스의 임원들에게 첫 번째 실전 테스트가 열린 셈이다.

회의를 마쳤지만 얼어붙은 공기는 풀리지 않았다.

매일 최치우를 따뜻하게 녹여주던 유은서는 4월이 되자 뉴욕의 UN 본부로 복귀했다.

하지만 유은서를 그리워할 틈도 없었다.

소리 없는 전쟁에 퓨처 모터스의 운명이 달렸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을 보자, 에릭.’

최치우는 비즈니스 전쟁으로 에릭 한센을 파멸에 이르게 할 작정이었다.

무릎뼈를 박살 낸 것은 약과였다.

그를 두 번 다시 금융계에 복귀하지 못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가장 먼저 회의실 밖으로 나온 최치우의 주먹에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

임동혁을 비롯한 임원들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주요 투자자와 기관을 만나는 건 기본이다.

밤새 전화기를 붙잡고 애를 쓰기도 했다.

단순히 최치우의 불호령 때문은 아니다.

임원들은 지난 회의를 통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됐다.

까딱 잘못하면 전기차 시대를 열어가는 퓨처 모터스 경영권이 넘어간다.

퓨처 모터스는 GM의 공장을 인수하고, 뉴욕과 홍콩 등 대도시마다 제우스 파크를 열면서 한창 잘나가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제우스 S의 후속 모델 생산 이야기도 급부상하는 중이다.

퓨처 모터스의 정상화를 위해 올림푸스는 사운(社運)을 걸었었다.

최치우가 과감한 투자를 통해 T-모터스를 인수하고, 사명을 퓨처 모터스로 바꾸지 않았다면 전기차 시대는 한참 뒤에 도래했을 것이다.

기껏 고생고생 다 해서 퓨처 모터스를 세계 최고로 만들었는데 밥그릇을 뺏길 수는 없다.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는 냉정하다.

창업자도 쫓겨나고, 일등공신이 영업 기밀을 빼돌리는 정글이다.

최치우와 브라이언이 퓨처 모터스를 성공시킨 공로를 인정해달라고 말해봐야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경영권은 그렇게 지키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지분 싸움이다.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해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 전부다.

“오늘 위임장을 보내주신다고요? 감사합니다! 대표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의도 사무실에서 백승수가 또 한 명의 투자 기관 대표를 설득했다.

보통 개인이나 단일 기관에서 지분을 0.1% 이상 소유하면 주요 투자자 대접을 받는다.

0.1%라고 해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퓨처 모터스 시가총액의 0.1%면 무려 수백억 원이다.

0.1% 투자자 10명을 모으면 1%가 된다.

지분 1% 차이로 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이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절대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헬로, 디스 이스 디렉터 승수 백 오브 디 올림푸스.”

백승수는 쉬지 않고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외국 기관에 접촉하는 모양이다.

굳이 눈여겨보지 않아도 백승수를 비롯한 임원들이 얼마나 열심인지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사무실 군기가 바짝 잡혔다.

최근 올림푸스는 전시 비상 상태였다.

총을 쏘고 미사일이 날아오는 전쟁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최치우는 곧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거라 예상했다.

상대가 올인을 외치면 이쪽에서도 카드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게 포커 테이블의 룰이다.

에릭 한센은 노골적으로 올인 전략을 쓰고 있었다.

이제는 월 스트릿의 투자자들도 에릭이 퓨처 모터스를 노리는 걸 알게 됐다.

그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십조의 자금을 쓰고, 감당하기 힘든 약속으로 지분 위임장을 받는다는 사실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물론 월 스트릿의 금융인들도 에릭의 전략에 고개를 내저었다.

한센 가문의 자산을 탕진하며 퓨처 모터스에 집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오메이슨의 대계(大計)를 위해, 그리고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이유야 무엇이건 최치우와 에릭의 전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올림푸스에서 최선을 다해 우호 지분을 확보하고 있지만, 주주총회가 열리는 것까지 막기는 힘들었다.

실리콘밸리의 퓨처 모터스 본사에서 열릴 임시 주주총회.

그곳에서 두 명의 젊은 천재가 이어온 질긴 악연이 정리 될 것 같았다.

***

끝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에릭 한센을 필두로 한 적대 세력은 임시 주주총회를 요청했다.

안건은 간단했다.

퓨처 모터스의 경영 및 재무 상황 점검이다.

물론 자신들의 지분이 앞서면 경영권을 요구하겠지만, 그러한 야욕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다.

최소 30%가 넘는 지분을 확보한 투자자들은 경영 현황을 확인할 권리가 있다.

나름 정당한 명분이 있기에 이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매번 주총 소집을 요청하면 거절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퓨처 모터스가 설립되고 처음으로 임시 주총을 요청받은 것이다.

만약 거절할 경우 최치우와 브라이언은 비난의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다.

중립적인 입장의 언론과 투자자들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낼 게 뻔하다.

어차피 피한다고 마냥 피할 수 있는 싸움도 아니다.

퓨처 모터스 이사회는 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승인했다.

이사회도 최치우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사실상 최치우가 주주총회에서 제대로 승부를 보자고 판을 깐 것이다.

“대표님, 저는 조금 걱정이 됩니다.”

주총이 열리는 날, 브라이언이 최치우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잠을 못 잤는지 브라이언의 안색이 나빠 보였다.

최치우는 그를 쳐다보며 자신감을 심어줬다.

“우리가 위임장까지 받으며 확보한 우호 지분은 모두 48%입니다. 에릭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40% 이상은 모았겠죠.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주총에 참석해서 결정을 내리려는 투자자들의 마음은… 모자란 2%는 내가 채우겠습니다.”

“이런 일로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게 속이 쓰립니다.”

“브라이언, 퓨처 모터스는 과거의 벤처 회사가 아닙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을 움직이는 글로벌 기업이죠. 앞으로 이보다 더한 도전도 많을 겁니다. 마음을 강하게 먹어요.”

“네, 대표님. 약한 모습을 보여 드려 미안합니다.”

“미안은 무슨. 이럴 때 의지하라고 있는 게 CEO 아니겠어요?”

천생 엔지니어인 브라이언을 다독인 최치우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최치우도 누구 못지않게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치우가 흔들리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침착과 냉정을 유지하는 것, 그게 최치우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이 싸움의 끝을 봅시다.”

최치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간만 지나면 임시 주주총회가 시작된다.

에릭 한센도 나타날 것이다.

과연 오늘 밤 샴페인을 터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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