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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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과 올림푸스는 무자비한 포식자 같았다.
알렉산드로 총장과 최치우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손을 잡았다.
기자회견 이후 UN 내부의 숙청 작업은 화끈하게 진행됐다.
뜸을 들이고 말 것도 없었다.
한 번에 143명의 직원을 해고한 것부터 UN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혁이다.
하지만 해고는 시작에 불과했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그들을 FBI와 인터폴에 고발했다.
사안이 워낙 중대한 만큼 곧장 수사가 시작됐고, 143명의 직원들은 모조리 출국 정지를 당했다.
물론 멕시코 국경을 이용해 도피할 수도 있다.
그러면 자신이 부정부패를 저지른 스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다.
네오메이슨 입장에서는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143명 중 누군가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른다.
네오메이슨은 마치 종교 집단처럼 충성심으로 무장한 세력이다.
그렇지만 사람 일은 장담할 수 없다.
궁지에 몰리면 조직을 배신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네오메이슨의 실체가 단번에 탄로 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는 법이라고 했다.
이렇게 비밀이 알려지고, 조금씩 꼬리가 잡히다 보면 언젠가 몸통이 걸리게 마련이다.
독일 라이프치히 테러 사건에서부터 시작된 최치우의 집념, 그리고 유은서와 함께 만들어낸 뜻밖의 수확까지.
올림푸스와 UN의 협공으로 인해 네오메이슨은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세계 질서를 지배해 온 기득권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세계정부 UN에 잠입시킨 143명, 그들만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문제의 시발점은 독일에서 불법적으로 빼돌린 자산이다.
복잡한 세탁을 거쳐 독일의 자산을 흡수한 미국 기업들도 조사 대상에 올랐다.
FBI와 미국 국세청은 발 빠르게 해당 기업의 자금을 동결시켰다.
수사가 끝날 때까지 주요 자산을 매각하지 못하게 조치한 것이다.
네오메이슨은 알짜 조직원과 함께 어마어마한 자산도 꽁꽁 묶이게 됐다.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한때 세상을 움직이던 두 조직의 전쟁과 합병 이후 최대 위기였다.
하지만 네오메이슨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리 없다.
네오메이슨의 최상위 그룹, 하이 서클 멤버인 마이크 페인스 부통령은 에릭 한센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잘나가는 금융 천재로 승승장구하다 최치우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된 에릭 한센은 이를 갈고 있었다.
에릭이 휘두를 복수의 칼날이 어디를 관통하게 될지,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
-대표님, 직접 보고드릴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요.”
최치우는 임동혁의 전화를 받았다.
여의도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는데 마침 보고할 일이 생긴 모양이다.
“나 잠깐 회사 좀 다녀올게.”
“안 좋은 일이야?”
“모르겠어. 부사장님 콜이네.”
“조심히 다녀와.”
침대에서 일어난 최치우는 하얀 이불에 묻혀 있는 유은서와 대화를 나눴다.
잠이 덜 깬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도 귀여워 보였다.
곧 뉴욕의 UN 본부로 복귀할 그녀는 요즘 최치우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장거리 커플이 되기 전, 둘만의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보내는 것이다.
쏴아아아-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튼 최치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준비를 해도 30분이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올림푸스 본사도 여의도, 그의 펜트하우스도 여의도에 있기 때문이다.
“사옥을 지으면 출퇴근이 불편해지겠다.”
최치우는 뜨거운 물로 온몸을 적시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몇 달 전부터 올림푸스는 사옥을 건설하기 위해 서울 시내 부지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여의도 같은 중심지에는 마땅한 부지가 없다.
새로운 빌딩을 올리려면 마곡이나 가산디지털단지 같은 외곽으로 나가야 한다.
“정 안 되면 여의도 빌딩을 사버려야지.”
최치우는 대수롭지 않게 혼잣말을 이어갔다.
여의도 빌딩 한 채의 가격은 수천억 원이다.
1조가 넘는 빌딩도 적지 않다.
하지만 최치우가 마음을 먹으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듯 빌딩을 살 수 있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의 시가총액은 100조를 넘고도 상승세가 꺼지지 않았다.
최치우의 개인 자산도 평범한 사람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불어났다.
혼자서 내는 세금이 웬만한 기업보다 많을 지경이다.
절세를 위해서라도 여의도 빌딩처럼 고가의 매물을 사는 게 나을지 모른다.
일반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삶.
최치우는 바닥부터 시작해 천외천 라이프 스타일의 주인이 됐다.
그러고도 적당히 만족하기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뚝-
샤워를 마친 최치우가 옷을 챙겨 입었다.
유은서는 침대에 누워 그를 지켜봤다.
평화롭고 따뜻한 아침이었다.
지금 같은 날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뉴욕과 서울,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다시 멀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두 사람은 현재에 충실하기로 다짐했다.
“나 진짜 간다.”
“오래 걸릴까?”
“어떤 용건일지 몰라서. 가봐야 알 거 같아.”
“그럼 난 장 보고 있을게. 점심이나 저녁 차려줄 테니 연락해.”
“일찍 들어올게, 최대한.”
최치우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집 밖으로 나왔다.
스물여섯 평생을 통틀어, 아니 7번의 환생 전체를 놓고 봐도 가장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철컥-
그러나 현관문을 닫고 나온 최치우는 눈빛부터 달라졌다.
정신을 다잡고 전투 태세를 취할 때다.
비즈니스 정글의 세계에서 나사 빠진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한 번의 실수로 혼자만 모든 것을 잃는 게 아니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에 운명을 건 수많은 사람들도 덩달아 추락하게 된다.
최치우가 느끼는 막중한 책임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이었다.
“오랜만에 달려볼까.”
엘리베이터를 탄 최치우는 지하 주차장 대신 1층 버튼을 눌렀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가볍게 뛰면 10분밖에 안 걸린다.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까 부담스럽지만, 오늘은 왠지 차를 타고 싶지 않았다.
출근 복장도 청바지에 티셔츠, 얇은 재킷 한 장이라 조깅하기 딱이다.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면 머리도 맑아진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임동혁의 호출은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최치우는 여러 경우의 수를 검토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여의도의 포근한 날씨가 그를 반겨주고 있었다.
***
“에릭 한센이 퓨처 모터스 주주들을 만나고 있다?”
“그렇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지분 양도를 권유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넘어간 주주들도 꽤 있습니다.”
“파격적 조건이라면… 원래 가격보다 높은 액수를 쳐주는 것밖에 더 있어요?”
“혹은 다른 투자 기회나 사업적 이익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손해를 감수하며 퓨터 모터스 지분을 늘리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임원 인사를 통해 부사장이 된 임동혁의 보고 내용은 예상대로 심각했다.
최치우는 네오메이슨과 에릭 한센이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의외였다.
에릭은 금융 거래에서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스타일이다.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하며 이익에 집착한다.
멀리서 보면 과감한 투자를 즐기는 것 같지만, 실상은 천지차이다.
그런데 임동혁의 보고 내용이 사실이라면 월 스트릿의 천재 또는 약탈자답지 않았다.
“에릭 한센이 퓨처 모터스의 미래 가치를 바라보고 장기 투자를 할 가능성은 없잖아요?”
최치우의 물음에 임동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손해를 보며 지분 확보에 열을 올리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설마 이렇게 대주주가 되려는 건…….”
최치우는 자기가 말을 하고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금융과 재무 전문가인 임동혁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러기 위해선 너무 많은 자금이 필요합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한센 가문의 자산 방어가 위험해질 만큼 무리한 투자를 하겠습니까?”
“궁지에 몰린 쥐라면, 고양이를 물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죠.”
최치우는 헛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에릭 한센을 그저 한 사람의 비즈니스맨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가 단지 한센 가문의 수장이라면 복수보다 자산을 지키고 키우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네오메이슨의 정체성이 앞선다면, 눈엣가시 같은 최치우를 공격하기 위해 이판사판 막장 싸움을 걸 수도 있다.
물론 네오메이슨의 선봉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온 에릭 한센은 버리기 아까운 카드다.
금융계를 장악한 한센 가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네오메이슨이 인류의 미래를 지배하는 큰 그림을 그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일한 걸림돌인 최치우를 막기 위해 에릭 한센이라는 카드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한센 가문의 자산을 탕진해도 다시 키우면 그만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처럼 번번이 최치우에게 앞길을 가로막히는 것보단 낫다.
“임 부사장님.”
최치우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언제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해야 한다.
그게 한 치 앞을 모르는 비즈니스 정글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네, 대표님.”
“내 지분과 브라이언, 그리고 우리 쪽 우호 지분을 합치면 얼마 정도입니까?”
“대표님이 퓨처모터스 지분 20%를 가진 단일 최대 주주이고, 브라이언 CTO가 10%, 확실한 우호 지분을 합하면 45%에서 50% 사이일 것 같습니다.”
“우호 지분으로 분류된 투자자들, 펀드들 동향 파악해주세요. 에릭 한센이 치킨 게임을 벌일지도 모릅니다.”
치킨 게임은 누군가 물러설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달리는 걸 뜻한다.
먼저 물러서면 패배하게 되고, 끝까지 버티면 커다란 충돌이 일어나 둘 다 망할 수 있다.
무림에서는 이런 전법을 동귀어진이라 부른다.
쉽게 말해 나도 죽고 너도 죽는 싸움이다.
임동혁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눈치였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냉정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에릭 한센이 그렇게까지 나오겠습니까? 지금처럼 무리하게 퓨처 모터스 지분을 확보하다간 한센 가문이 휘청거립니다.”
“한센 가문보다 나를 쓰러트리는 게 더 중요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최악을 대비합시다. 브라이언에게도 연락을 해줘요.”
“알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뉴욕으로 가서 우호 지분을 체크하겠습니다.”
“제우스 S가 잘 팔리고 있는데, 또 괜한 구설수에 오르면 퓨처 모터스 분위기가 가라앉을 겁니다.”
최치우는 지시를 내리고도 계속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에릭 한센에게 연달아 어퍼컷을 날렸고, 반격도 모두 받아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제 막 수상한 사인을 감지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선(死線)에서 단련된 최치우의 본능적 감각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에릭 한센이 이 싸움 한판에 전부를 걸었다면?’
최치우는 한센 가문의 자산만을 염두에 뒀다.
에릭이 돈을 떠나 목숨까지 걸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부서진 무릎에 로보티컬 칩을 이식받은 에릭 한센은 최치우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길고 질긴 악연이 머지않아 클라이막스에 다다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