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반전의 시작>
알렉산드로 총장이 칼을 빼 들었다.
케냐에서 최치우와 유은서를 만나고 뉴욕으로 돌아간 그는 한동안 잠잠했었다.
오죽하면 최치우가 알렉산드로 총장의 결심을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 총장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 게 아니었다.
UN 내부에서 은밀하게 감찰단을 조직하고, 유은서가 만든 네오메이슨 리스트의 진위 여부를 판단했다.
그렇게 대략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3월이 끝나갈 무렵, 겨울의 기운을 완전히 벗어 던진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직전이었다.
뉴욕의 UN 본부에서 날아온 소식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본인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섰다.
UN 사무총장의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은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방송사들도 부랴부랴 생중계 일정을 잡았다.
뉴욕과의 시차 때문에 알렉산드로 총장의 기자회견은 캄캄한 밤에 중계된다.
그래도 이만한 뉴스를 놓칠 수는 없었다.
최치우는 여의도의 펜트하우스에서 맥주 한 캔을 따고 TV 앞에 앉았다.
푹신한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알렉산드로 총장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마치 새로 개봉하는 헐리웃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선 기분이었다.
“드디어 나오는군.”
그때 카메라 화면에 알렉산드로 총장의 모습이 보였다.
UN의 직원들을 대동하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원래도 포커페이스로 유명하지만 오늘은 더했다.
뭔가 대단히 중대한 결심을 굳힌 사람의 표정이었다.
UN 본부의 기자실에 모여든 세계 각국의 방송사는 알렉산드로 총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먼저 예고 없는 기자회견임에도 불구하고 UN에 관심을 보여준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마이크 앞에서 의례적인 인사로 회견을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각, 수많은 사람들이 숨죽이며 UN 본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최치우처럼 기대감을 품은 채 생중계를 지켜보는 사람도 있고, 초조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저는 오늘 UN 사무총장으로서 중대한 결심을 내렸습니다. 바로 UN 본부와 지부에서 143명의 직원들을 해고하는 서류에 사인을 했습니다.”
시작부터 폭탄 발언이었다.
최치우는 맥주 캔을 내려놓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어.’
케냐에서 만났던 알렉산드로 총장의 모습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가 한 달의 조사 끝에 빼든 칼은 날카롭게 적의 숨통을 자르고 있었다.
“143명의 직원들은 UN 소속이지만 부정한 세력과 결탁하여 내부 정보를 유출하거나 탈세, 횡령, 자금 세탁 등 불법 거래를 알선했습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고, FBI와 인터폴에 해당 자료를 제출할 예정입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들은 반쯤 넋을 놓았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수위의 발표가 베테랑 기자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더 할 말이 남은 듯 잠시 뜸을 들였다.
지이잉-
수많은 카메라가 줌을 당겨 알렉산드로 총장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에 담긴 고뇌와 고민의 흔적이 HD 화면에 잡혔다.
생중계를 시청하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은 또 어떤 폭탄 발언이 쏟아질지 기다렸다.
월드컵 결승 승부차기보다 더 긴장감 넘치는 순간일 것이다.
아마 인기 스포츠 중계를 제외하면 알렉산드로 총장의 기자회견 시청률은 전 세계 최고치를 기록할 것 같았다.
“UN은 해고 대상자 143명의 불법적인 활동 내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특정 기업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미국 내 기업 6곳은 대규모 자금 세탁과 탈세의 도구로 UN을 이용했습니다. 이토록 대담한 범죄 행위를 UN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내가 잠잠해졌다.
단순한 폭탄 발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UN의 아픈 구석을 스스로 드러내며 개혁 의지를 불태웠다.
이윽고 그가 자신을 찍는 카메라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후 UN을 향한 여러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UN이 세계 시민을 대변하지 않고, 특정 강대국과 대기업의 편의를 봐주는 유명무실한 기구가 아니냐는 비판은 뼈아팠습니다. 우리 UN의 부족한 모습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달라지겠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과 개혁을 통해 세계 시민들이 믿을 수 있는 국제기구로 거듭날 것입니다. 143명의 직원들을 해고하고 관련 기업을 밝힌 것은 UN 개혁의 시작입니다. 향후 FBI 고발과 국제 소송을 통해 불법의 책임을 끝까지 묻겠습니다. 어떠한 책임도 사무총장인 제가 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핵폭탄급 발표에 이어 감동적인 반성문을 읽은 알렉산드로 총장이 말끝을 흐렸다.
웬일로 조금 머뭇거린 그가 말을 이어갔다.
“UN의 썩은 부분을 도려낼 수 있도록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은 올림푸스의 치우 최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덕분에 UN은 다시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럼 이것으로 기자회견을 마치겠습니다.”
TV를 지켜보던 최치우도 적잖이 놀랐다.
설마 알렉산드로 총장이 자기 이름을 언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개혁안을 발표한 알렉산드로 총장은 최치우에게 공을 돌렸다.
유은서는 UN 직원이기에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강단이 있는 양반이야. 제대로 사고를 쳤군.”
최치우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TV를 껐다.
기자들이 질문 세례를 쏟아냈지만 알렉산드로 총장은 유유히 사라졌다.
모든 입장을 밝혔기에 추가 질문을 받는 게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어차피 FBI와 인터폴에 자료를 넘기면 알렉산드로 총장의 발표가 사실인지 차차 입증될 것이다.
“칼을 휘두를 줄 알았는데 대포를 쐈어.”
최치우는 알렉산드로 총장의 기자회견을 높이 평가했다.
해고당한 143명이 전부일지 모르지만, UN 내부의 네오메이슨 조직원을 상당수 걷어낸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치부를 드러내면서 UN이 탈세와 자금 세탁 통로로 이용된 것을 인정했다.
알렉산드로 총장이 말한 미국 내 기업 6곳은 모두 네오메이슨 소유일 것이다.
만약 FBI가 해당 기업의 자금을 동결하면 네오메이슨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기껏 독일에서 자산을 매각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 돈세탁을 한 게 무의미해진다.
“UN 내부의 네오메이슨을 소탕했고, 주요 기업의 자금까지 동결시키는데 성공하면… 팔 하나는 잘랐다고 생각해도 되겠다.”
최치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미국 정부가 아닌 UN을 공략해 네오메이슨을 치는 작전이 100%, 아니 200% 먹혔다.
여명 작전의 첫 걸음부터 밝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웅- 우우웅- 우우우웅-
늦은 시간임에도 최치우의 스마트폰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 총장의 생중계를 지켜본 기자들이 전화를 거는 것이다.
대체 UN에 어떤 도움을 줬고, 어떻게 내부의 부정부패를 밝혀낼 수 있었는지.
기자들 입장에서는 궁금한 게 넘칠 수밖에 없다.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를 경영하느라 바쁜 최치우가 UN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것도 UN 사무총장이 직접 최치우의 이름을 거론하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영화로 만들어도 비현실적인 일이 생중계로 증명된 것이다.
삐빅!
최치우는 전화를 받지 않고 폰 전원을 꺼버렸다.
전 세계적인 관심을 누구보다 자주, 많이 받아본 사람이 바로 최치우다.
그는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나서서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는 것, 궁금증을 더욱 커지게 만드는 것.
관심에 휘둘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게 정답이다.
전화기를 끈 최치우는 드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향했다.
오늘 밤은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푹 자고 일어난 아침, 최치우는 아프리카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았다.
밤새 꺼뒀던 폰을 켜자마자 수백 통의 부재중이 최치우를 반겼다.
하지만 모두 무시하고 시간을 맞춰 걸려온 이시환의 전화만 받았다.
“어떻게 됐어?”
-너가 케냐로 오면 내일 당장에라도 대통령이 일정 다 취소하고 만날 기세야.
이시환의 목소리가 시원시원하게 들렸다.
그는 올림푸스의 특사로 케냐 정부를 방문했다.
요아힘 마빈 전 총장이 다리를 놓아줬고, 최치우가 여명 작전의 2단계로 케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반응은?”
최치우는 들뜨지 않았다.
어차피 케냐 입장에서는 올림푸스의 투자를 대대적으로 반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조건이다.
올림푸스는 당장의 수익보다 미래를 바라보고 남아공, 케냐를 비롯한 아프리카에 투자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조건을 무작정 외면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실리는 맞춰가며 투자를 진행해야 한다.
절대 손해는 안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은 글로벌 대기업이자 주식회사를 이끄는 CEO의 책임과 의무다.
-우리도 비장의 카드를 오픈하지 않았으니 구체적인 조건을 듣긴 힘들었어. 그치만 단순히 간만 보는 느낌은 아냐. 지금 케냐 대통령 지지율이 간당간당한 건 알고 있지?
“그래? 정치적 위기인가.”
-응, 그래서 돌파구가 필요한데 우리가 투자하거나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지으면 대박인 거지. 대통령이 목숨 걸고 우리 쪽 조건 다 맞춰주려고 할걸.
이시환의 설명을 들으니 케냐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최치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이시환을 남아공본부장으로 보내놓은 보람이 느껴졌다.
이시환은 미처 알기 힘든 아프리카 국가의 내밀한 사정을 속속 알고 있었다.
덕분에 최치우가 중요한 판단을 내리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다.
“형이 책임지고 그쪽 대통령이랑 미팅 일정 잡아줘.”
-요아힘 전 총장을 통하지 않고?
“장관이랑 만나게 다리를 놔줬으니 그걸로 충분해. 여기서 더 부탁하면 나중에 갚아줄 게 너무 많아져.”
-오케이, 접수 완료. 대표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나만 더. 우리가 소울 스톤 발전소를 케냐에 지어주면 남아공 정부에서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그럴 가능성이 크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남아공의 섭섭함을 풀어주는 것도 형 역할이니까, 믿고 맡긴다. 그래도 되겠지?”
-월급쟁이는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이번에 새로 개발한 광산 두 곳에서 나는 수익을 남아공 정부에 뿌리면서 무마해 볼게.
“그 정도면 나쁘지 않네. 남아공 정부가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게릴라 반군 정보도 추려줘. 헤라클래스를 움직여서 대신 소탕해 주면 고마워할 테니까.”
-라져.
“고생해.”
최치우는 웃음기 띤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서로 장난스럽게 농담하듯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이야기였다.
최치우는 케냐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설령 노하임의 소울 스톤이 연구 과정에서 박살 나도 상관없다.
당장 발전소는 못 지어도 다른 시설 투자는 추진할 수 있다.
어떻게든 케냐를 교두보로 삼아 아프리카 중부를 장악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남부의 핵심 파트너인 남아공도 챙겨줘야 한다.
어려운 미션이지만 올림푸스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질주하고 있다.
딩동댕동- 딩동댕동-
그때였다.
초인종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최치우가 사는 여의도 펜트하우스는 아무나 벨을 누를 수 없다.
경비실에 신분증을 맡기고 이중, 삼중의 보안 절차를 거쳐야 겨우 초인종이라도 누를 수 있다.
그만큼 철저하게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벨을 누르는 손님이 있다니, 최치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터폰을 확인했다.
“어?”
인터폰 화면을 본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유은서의 새하얀 얼굴이 화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삑!
얼른 열림 버튼을 누른 그는 현관문 앞에서 유은서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예정에 없는 방문이라 약간 얼떨떨했지만, 그녀가 아침부터 찾아왔다는 게 마냥 반가웠다.
“서프라이즈!”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은서가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두 손 위에 도시락이 올려져 있었다.
“진짜 깜짝 놀랐어.”
“방해한 거 아니지?”
“아냐, 어차피 사무실에 늦게 나가려고. 일찍 가봤자 기자들이 귀찮게 할 거 같아서.”
최치우는 어젯밤 알렉산드로 총장의 기자회견 때문에 또 다시 전 세계 주요 뉴스를 장식했다.
온갖 방송사와 언론사들은 이미 최치우가 어떻게 UN 개혁에 도움을 줬는지 상상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보나마나 올림푸스 여의도 본사는 취재진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치우 너랑 소소하게 축하 파티라도 하고 싶어서 왔어. 아침 안 먹었지?”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잘됐다. 일단 들어와.”
“집에는 처음이네.”
“그러게.”
최치우와 유은서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알렉산드로 총장이 UN 내부의 네오메이슨 143명을 숙청하면서 유은서도 걱정 없이 뉴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서로 떨어지는 건 아쉽지만, 충분히 축하할 일이다.
최치우는 유은서가 손수 만든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승리의 기쁨을 즐겼다.
네오메이슨의 팔다리를 잘랐으니 이제부터 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편하게 승리를 만끽해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