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
사막의 밤은 뜨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콤했다.
최치우는 복잡한 생각을 잠시 꺼두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겨우 하룻밤이다.
해가 뜨면 UN의 전현직 사무총장을 만나 승부를 걸어야 한다.
더구나 케냐에서의 일정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왕 아프리카까지 날아온 김에 남아공본부를 돌아보기로 했다.
이시환이 지키고 있는 남아공본부와 한껏 규모가 늘어난 헤라클래스가 궁금했다.
매일 보고를 받지만, 직접 두 눈으로 현장을 확인하는 것은 다르다.
특히 헤라클래스의 현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미국 특수부대 출신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인원을 불린 헤라클래스는 얼마나 강해졌을까.
실리콘밸리로 파견을 나갔던 리키도 남아공에 복귀했다.
리키는 최치우를 제외하면 지구에서 가장 강한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가 통솔하는 헤라클래스의 위명은 진즉 아프리카 남부를 뒤덮었다.
머지않아 헤라클래스는 비장의 무기가 될 것이다.
“또 일 생각하지?”
그때 유은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고작 하룻밤이 전부인 휴가를 즐기면서 최치우는 자기도 모르게 헤라클래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 병인가보다.”
“워커홀릭도 좋지만, 이럴 땐 나한테 더 집중해줘.”
유은서의 입술이 유독 붉게 빛났다.
두 사람은 수영복 하나만 걸친 채 사막이 보이는 야외 스파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피로를 풀어주는 따뜻한 물, 별장 지배인이 가져다준 샴페인, 그리고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사막의 은하수.
모든 게 완벽했다.
게다가 꽤 늦은 시간이라 별장을 관리하는 지배인과 직원들도 퇴근했다.
아무도 없는 둘만의 공간이다.
최치우는 정말 머릿속 전원을 내렸다.
이런 순간마저 일 생각으로 가득 채우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사죄의 의미로 마사지 해줄게.”
“마사지?”
“받고 나면 온몸이 개운해질 거다. 장담해.”
최치우가 미소를 지으며 유은서의 등을 돌렸다.
곧이어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와 등을 누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마사지 흉내를 내는 게 아니었다.
아주 약하게 내공을 실어 유은서의 기혈을 눌러주는 것이다.
고도의 점혈법이 가미된 마사지는 기의 순환을 촉진시킨다.
기가 혈도를 타고 제대로 흐르면 묵은 피로도 금방 해소될 수밖에 없다.
“음… 아-!”
이따금 묘한 소리가 유은서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기분 나쁘지 않은 근육통, 그리고 몸의 안과 밖이 모두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때? 차원이 다르지.”
“계속 생각날 거 같아.”
“앞으로 자주 해줄게.”
유은서가 돌아앉아 최치우를 와락 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두 사람은 커다란 스파 욕조 안에서 하나로 포개어져 떨어질 줄 몰랐다.
시간은 멈춘 듯했고, 하늘 위 은하수만 천천히 흐르며 둘을 지켜봤다.
최치우와 유은서는 케냐 사막에서 진정한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다양한 색깔로 밤을 물들였다.
최치우도 비로소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요아힘 전 사무총장의 행사는 성대했다.
그러나 무턱대고 화려하진 않았다.
아프리카의 빈민들을 돕기 위한 자선 행사라는 점을 의식한 모양이다.
사실 요아힘 전 총장은 개인 자산이 수천억 원에 달하는 부자다.
최치우처럼 클래스가 다른 거물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디서도 꿇리지 않는 자산가인 셈이다.
그렇기에 최치우와 유은서가 어젯밤을 보낸 별장처럼 럭셔리한 공간도 여럿 소유하고 있었다.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요아힘 전 총장이 꾸준히 자선 활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치겠지.’
최치우는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미소를 짓는 요아힘 전 총장을 바라봤다.
물론 순수하게 좋은 의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욕심 없이 하기 힘든 행동들이 조금씩 보였다.
마냥 나쁜 일은 아니다.
능력과 소신을 가진 사람이 정치에 뛰어들어 세상을 바꾸는 건 긍정적인 일이다.
‘정치라, 정치.’
최치우는 문득 정제국 대통령에게서 받은 제안을 떠올렸다.
최연소 문화부장관이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것.
충분히 실현 가능 한 길이다.
‘아마 언젠가는…….’
최치우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행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에게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도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요아힘 전 총장이나 알렉산드로 총장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는 것 같았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의 CEO이자 100m 달리기 세계신기록 보유자인 최치우는 어린 아이도 얼굴을 아는 스타가 됐다.
전현직 UN 사무총장과 나란히 서 있어도 존재감에서 밀리지 않았다.
세계정부 UN의 수장을 능가하는 거목으로 성장했다고 자부해도 될 만하다.
“최치우 대표님, 케냐에서 열린 오늘 행사에 참석하신 특별한 뜻이 있으신가요?”
용감한 기자 한 명이 대뜸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공식적인 발언 순서가 끝났는데 돌출 행동을 한 것이다.
경호원들이 재빨리 달라붙었지만, 최치우가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최치우는 마이크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여유롭게 대답했다.
“오늘 행사를 주최하신 요아힘 마빈 전 UN 사무총장님, 그리고 자리를 빛내주신 알렉산드로 마커스 사무총장님. 두 분 모두 제가 대단히 존경하는 국제사회의 어른입니다. 더불어 아프리카의 평화와 기아 해결이라는 문제에는 올림푸스가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앞으로도 두 분의 UN 사무총장님과 함께 아프리카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꺼이 요아힘 전 총장님의 초대에 응하게 됐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었다.
최치우는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았다.
올림푸스를 은근슬쩍 부각시켰고, 동시에 요아힘 전 총장과 알렉산드로 총장의 얼굴에 기름칠을 해줬다.
근처에서 최치우의 답변을 듣고 있던 두 사람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요아힘 전 총장은 대놓고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최치우가 작정하고 자신의 행사를 띄워줬기 때문이다.
반면 알렉산드로 총장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연설을 할 때도, 사진을 찍을 때도 크게 웃지 않았다.
최치우의 노골적인 칭찬에도 크게 동요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역시 소문대로 빈틈이 없군.’
최치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 총장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 정부와 각을 세울 정도로 배포가 큰 인물이다.
칭찬 한 번에 마음을 열었다면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어차피 승부는 한 방에 나게 돼 있다.’
요아힘 전 총장이 자리를 마련해 주면 유은서와 함께 결정타를 날릴 것이다.
UN 소속 직원이 목숨을 걸고 만든 네오메이슨 리스트, 과연 그 앞에서도 알렉산드로 총장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할지 궁금했다.
자선 행사의 공식 순서가 끝나갈 무렵, 최치우는 눈을 돌려 유은서를 찾았다.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UN 실무 직원들과 섞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알렉산드로 총장과 함께 케냐로 온 UN 직원들은 유은서를 반갑게 맞아줬다.
‘은서는 UN에서 참 행복해 보인다.’
최치우는 밝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서가 계속 UN에서 일하며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알렉산드로 총장의 협력이 필요하다.
곧 있을 티타임을 기다리는 최치우의 각오가 더욱 굳세어졌다.
***
요아힘 전 총장은 약속을 지켰다.
자선 행사에 참석한 VIP들만 따로 모아 티타임을 가지는데, 10분 일찍 알렉산드로 총장을 부른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알렉산드로 총장도 전직 UN 사무총장의 부탁을 거절하긴 어려웠던 것 같다.
최치우와 유은서는 약속된 방 안에서 알렉산드로 총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
곧이어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수행원 없이 혼자 들어온 알렉산드로 총장의 안색은 다소 냉랭해 보였다.
유명해도 너무 유명한 기업인 최치우와 따로 만난다는 게 부담스러운 탓일까.
사실 오해를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이다.
최치우가 부정한 청탁을 위해 케냐까지 날아와 자리를 마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총장님, 꼭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최치우는 뻔한 인사를 생략했다.
어차피 자선 행사에서 얼굴을 익혔다.
이제와 다시 인사를 하고, 의미 없는 격식을 차리기엔 10분이란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는 혁신적인 기업이라고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이런 구태의연한 방식을 쓰다니… 많이 실망스럽습니다.”
60대지만 눈빛이 형형하게 살아 있는 알렉산드로 총장이 정곡을 찔렀다.
강직한 성격답게 적당히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최치우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봤다.
“총장님께 부탁을 드리려고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닙니다.”
“그럼 굳이 이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UN의 직원이 자기 직무를 수행하다 납치를 당하고, 죽을 뻔했습니다. 따라서 UN을 이끄는 총장님의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황당한 이야기다.
최치우는 UN 사무총장에게 대뜸 책임을 지라고 따졌다.
모 아니면 도.
과연 알렉산드로 총장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휴가를 낸 직원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시종일관 당당하던 알렉산드로 총장이 말끝을 흐렸다.
얼음장 같던 그의 표정도 아주 약간이나마 녹은 것 같았다.
최치우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확신했다.
‘알렉산드로 마커스 총장은 네오메이슨이 아니다!’
연기를 하는 거라면 최치우의 눈을 속일 수 없다.
현대에서는 20대 중반이지만 최치우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지 모른다.
눈앞에서 최치우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치우는 말없이 옆에 선 유은서를 가리켰다.
“은서 유, UN의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 직원이며 저의 소중한 사람입니다.”
“……!”
알렉산드로 총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방에 들어와서 유은서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최치우의 여비서라고 생각했는데 UN의 직원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은서는 의심스러운 금융 거래 내역을 추적했고, 그로인해 납치를 당했습니다. 생명의 위협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UN의 수장인 총장님께서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치우는 마치 학생을 혼내는 선생님처럼 준엄하게 말했다.
세계정부라 불리는 UN 사무총장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지구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치우는 개의치 않고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은서는 직속 상사에게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납치를 당했죠. 아시겠습니까? UN 내부에 얼마나 많은 스파이들이 들어와 있는지!”
“자초지종을… 처음부터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알렉산드로 총장이 대화에 응할 의지를 보였다.
충격요법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최치우의 작전이 먹힌 것이다.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꺼냈다.
제법 긴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 자리에 앉자는 것이다.
알렉산드로 총장이 의자에 앉는 순간, 10분의 시간제한은 사라지게 된다.
터억-
결국 세 사람 모두 의자에 앉았다.
유은서는 직접 뉴욕에서 겪은 일을 소개하며 네오메이슨 리스트를 건넸다.
불법적 거래 내역이 기록된 리스트를 확인하는 알렉산드로 총장의 눈썹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혹감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느껴졌다.
“이들이… 대체…….”
최치우는 리스트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알렉산드로 총장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네오메이슨. 이제 그들을 뿌리 뽑을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