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세계정부>
최치우는 전임 UN 사무총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UN 본부에서 열렸던 세계 기업가 포럼에 참석해 연설을 했고, 그때 요아힘 마빈 총장을 만나 덕담을 들었다.
요아힘 마빈 총장이 올림푸스를 칭찬한 게 언론 기사로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공식 행사에서 UN 사무총장을 만나는 것과 따로 독대를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UN는 세계정부라고 불린다.
실권은 크지 않지만, 미국과 중국 같은 강대국도 UN의 정책과 결정을 존중하고 있다.
그렇기에 UN을 이끄는 사무총장은 막대한 권력을 지녔고, 임명 과정에서부터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임명이 된 다음에도 UN 사무총장은 온갖 견제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권한이 크면 그만큼 시기하고 질투하는 힘도 덩달아 커진다.
따라서 오해를 살 수 있는 기업인과의 독대는 UN 사무총장에게 금기 사항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요아힘 마빈 이후 새롭게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알렉산드로 마커스는 성격이 칼 같기로 유명하다.
덴마크 출신인 알렉산드로는 미국 정부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사무총장이 됐다.
그러나 취임 이후 행보는 미국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했다.
그는 여러 이슈에서 철저하게 중립적인 입장을 지켰고, 미국 정부의 요청을 묵살한 적도 많았다.
미국 외교가에서는 두 번 다시 북유럽 출신 사무총장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물론 알렉산드로 마커스 사무총장이 반미(反美) 성향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특이한 스타일이었다.
이전 사무총장들은 미국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혹은 노골적 반미 성향을 보여왔다.
그런데 알렉산드로 총장은 사안에 따라 다른 선택을 내렸다.
중립이라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이상향에 불과한 위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중립지대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누구의 편도 아니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중립을 추구하는 알렉산드로 총장의 뚝심은 인정해야 될 것 같았다.
대신 그만큼 최치우가 알렉산드로 총장을 독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됐다.
여러 국가들이, 특히 미국이 눈에 불을 켜고 알렉산드로 총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중이다.
만약 UN 사무총장이 기업인과 비밀스러운 미팅을 하면 당장 음모론을 만들어 퍼트릴지 모른다.
화려한 인맥과 정치력으로 무장한 임동혁도 뾰족한 수를 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3월이 됐고, 곧 벚꽃이 필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퓨처 모터스의 제우스 파크는 도시의 명소가 됐고, 제우스 S의 판매량은 줄어들 줄 몰랐다.
두 회사의 합산 시가총액은 100조를 진즉 넘기고 150조 원을 향해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올 여름 라이프치히의 소울 스톤 발전소가 완공되면 150조는 무난히 넘기고 남을 것이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 올림푸스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최치우는 네오메이슨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카드를 손에 넣었다.
유은서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낸 그 카드를 허무하게 낭비할 순 없다.
반드시 UN에서 폭탄을 터트려 네오메이슨이 어렵게 세탁한 자금을 날려 버릴 것이다.
최치우는 목표를 정했다.
그는 난관이 있다고 해서 목표를 바꾸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미션이지만, 어떻게든 알렉산드로 총장을 만나서 유은서의 리스트를 넘긴다.
목표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최치우의 시계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
“이 사람은 패스.”
“왜 그러십니까? 가장 유능한 인재입니다.”
“눈빛이 탁합니다. 두 마음을 품을 사람이에요.”
“아니, 그런…….”
최치우가 눈빛을 운운하자 임동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최치우는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세상 진지한 얼굴로 서류를 넘겼다.
“이 사람은 오케이.”
“스펙으로는 조금 처지지 않습니까?”
“스펙을 뛰어넘는 스토리가 있잖아요. 우리 올림푸스에 잘 어울리는 인재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결정에 무슨 말을 덧붙이겠습니까.”
임동혁은 한숨을 내쉬고 최치우가 결재한 서류를 다시 넘겨받았다.
두 사람은 올림푸스의 임원 인선을 마무리했다.
백승수를 총무 이사로, 김지연을 홍보 이사로 승진시켰고 임동혁은 총괄 부사장이 됐다.
뿐만 아니라 여러 경로를 통해 추천받은 세계적인 인재들을 임원으로 스카웃했다.
최치우의 결재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선망하는 로켓 올림푸스에 올라타게 될 것이다.
“오래 걸렸습니다.”
결재 서류를 챙긴 임동혁이 입을 열었다.
임원 선임은 작년 중순부터 나왔던 이야기다.
그런데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람을 뽑는 것, 특히 리더인 임원을 뽑는 것은 정말 중요하니까. 사람 하나 잘못 들이면 집안이 폭삭 망한다고 들었습니다. 돌다리를 여러 번 두드려도 모자라지 않은 일입니다.”
“대표님이 마지막까지 고심해서 내린 결정이니 믿고 따르겠습니다.”
“임 이사님, 아니 이제 부사장님이라 불러야겠군요. 부사장님이 다들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주세요.”
“당연한 말씀을. 어리버리할 틈도 없이 팍팍 굴리겠습니다.”
임동혁이 사악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최치우는 새로 임원이 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었다.
재계의 망나니였던 임동혁은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오직 최치우 앞에서만 구박을 받으며 깨질 뿐, 다른 직원들은 임동혁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한다.
하필이면 그런 임동혁의 후임이 된 신입 임원들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그건 그렇고, UN 사무총장 미팅 말인데.”
최치우가 화제를 돌렸다.
임동혁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기울였다.
백방으로 연결고리를 알아봤지만 쉽지 않았다.
재벌 2세인 임동혁의 인맥으로도 알렉산드로 총장을 만나긴 힘들었다.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요아힘 전 총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좋은 방법을 알려주더군요.”
“아……!”
임동혁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퇴임을 했어도 전직 UN 사무총장은 여전히 각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게다가 현직에서 물러나면 UN의 여러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결국 최치우와 인연이 있는 요아힘 전 총장이 실마리였던 것이다.
“다리를 놓아주는 것입니까?”
“요아힘 전 총장이 주최하는 자선 행사가 케냐에서 열립니다. 알렉산드로 총장도 초대를 받아 참석할 예정입니다. 그 행사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도록 힘을 써주기로 했습니다.”
“역시!”
임동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렇게 되면 떳떳하게 알렉산드로 총장을 만날 수 있다.
미국 정부도 알렉산드로 총장에게 딴지를 걸기 어려울 것이다.
자선행사에서 만난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 미국만 치졸해지기 때문이다.
“행사가 끝나고, 요아힘 전 총장이 몇몇 귀빈들만 초청해 티타임을 가질 겁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끼어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10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알렉산드로 총장과 먼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말을 마친 최치우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임동혁도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용기 일정을 잡겠습니다. 누구와 동행하시겠습니까?”
“은서와 같이 갈게요. 리스트를 직접 만든 사람이고, UN 소속이니 알렉산드로 총장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겁니다.”
“케냐에서 두 분이 뜨거운 시간을 보낼 것 같습니다.”
“부사장님.”
임동혁의 농담을 들은 최치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정색했다.
그러자 임동혁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 밖으로 도망갈 준비를 했다.
“케냐 날씨가 워낙 덥지 않습니까. 그럼 이만 업무 때문에 나가보겠습니다.”
최치우는 후다닥 나가는 임동혁을 쳐다보며 웃음을 참았다.
올림푸스의 시작과 끝은 최치우지만, 그 중간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버티고 서 있다.
임동혁도 올림푸스의 중간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표현하지는 않았다.
“다 알고 있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최치우가 눈을 돌렸다.
대표의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명을 위해 만년필을 든 최치우는 전투에 임하듯 서류와 싸움을 시작했다.
***
올림푸스 전용기가 케냐로 날아갔다.
전용기 승객은 단 두 명, 최치우와 유은서였다.
유은서는 3월까지 휴가를 받았고, 4월부터 UN 본부에 복귀할 계획이다.
최치우는 그 전에 UN 사무총장으로부터 확답을 받고 싶었다.
알렉산드로 총장이 네오메이슨의 존재를 아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그 다음 UN 내부의 네오메이슨을 소탕할 의지가 있는지 물어볼 것이다.
만약 알렉산드로 총장의 생각이 최치우와 다르다면 유은서를 다시 UN에 보내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적진 한 가운데로 유은서를 돌려보낼 수는 없다.
여러모로 케냐에서 많은 게 결정 될 것 같았다.
“정말… 괜찮을까?”
최치우 옆에 딱 붙어 앉은 유은서가 걱정스런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UN 소속이지만 사무총장을 따로 만날 기회는 없었다.
쉽게 말해 대기업 신입사원이 회장을 독대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그런데 최치우 덕분에 케냐에서 알렉산드로 총장을 함께 만나게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어마어마한 진실이 담긴 리스트를 보여주고, UN 내부에 네오메이슨이 있다는 이야기도 꺼내야 한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같이 있잖아.”
“새로운 총장님이 좋은 분이시면 좋겠어.”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소신이 뚜렷한 거 같은데, 뚜껑을 열어봐야지.”
최치우는 섣불리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그는 언제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하는 편이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에 하나 알렉산드로 총장이 네오메이슨일 경우도 가정해야 한다.
모든 수를 대비해야 백전백승의 신화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최치우는 유은서를 다독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뜨거운 열사의 대륙, 검은 진주 아프리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케냐에 도착한 최치우와 유은서는 요아힘 전 총장이 준비해 준 차를 탔다.
요아힘 마빈 전 총장은 아프리카의 영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최치우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특히 남아공에서 최치우는 은인으로 통한다.
올림푸스 남아공본부가 광산을 개발하며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아공을 제외한 아프리카 다른 지역에서는 요아힘 전 총장의 인기가 더 높았다.
웬만해선 글로벌 스타인 최치우의 인기를 능가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요아힘 전 총장이 아프리카의 맹주로 입지가 단단하다는 뜻이다.
“도착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모시러 오겠습니다.”
리무진 기사는 한참을 달려 최치우와 유은서를 내려줬다.
두 사람은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펜션 형태의 초호화 별장에 묵게 됐다.
완전히 독립된 공간으로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케냐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고맙습니다. 요아힘 전 총장님께도 인사를 전해주세요.”
“네,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리무진 기사는 최치우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는 푹 쉴까?”
“좋아!”
최치우는 유은서의 손을 꼭 잡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바라보며 보낼 하룻밤이 기대됐다.
내일이면 전현직 UN 사무총장 두 명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
최치우도 그들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세계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다.
휘이이이-
사막의 열기를 담은 바람이 최치우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