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드러나는 마각>
에릭 한센은 뉴욕 시내에서 가장 비싼 병원에 입원했다.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VIP 환자들을 면밀하게 케어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 병원 특실에는 얼마 전까지 유은서가 입원해 있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에릭에게 납치를 당했던 유은서는 무사히 퇴원했고, 그녀에게 독약을 먹였던 에릭은 훨씬 오래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양쪽 무릎이 박살 났기 때문에 최소 몇 달은 병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까스로 퇴원을 해도 1년 이상의 재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재활은 끝이 안 보이는 싸움이다.
빨리 회복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 절뚝거리며 불구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
그 막연한 불안감이 에릭 한센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냉정한 금융 천재도 불구의 공포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보통 인간이 됐다.
병상에 누운 그의 얼굴은 한껏 더 창백해 보였다.
오직 에릭 한 사람을 위해 고용된 간병인의 숫자만 10명이다.
초호화 병실과 세계적인 의료진, 물 마시는 것부터 화장실까지 모든 일을 도와주는 간병인들도 에릭에게 위로가 안 됐다.
“으으으…….”
멍하게 누워있던 에릭이 분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진통제를 맞지 않으면 계속해서 올라오는 고통은 그의 정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콰앙!
“으아아아-!”
결국 에릭이 병상을 내리치며 짐승처럼 절규했다.
분노와 고통이 쌓이고 쌓여 이렇게 분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데없는 소리에 의사와 간호사가 뛰어왔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이상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에릭을 돌보는 간병인들은 표정 변화 없이 각자의 할 일을 했다.
에릭 한센의 난동이 익숙해진 탓이다.
드르르륵-
그때였다.
누군가 병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에릭 한센은 출입이 제한된 특실에 입원해 있다.
그저 평범한 특실이 아니다.
최고의 대우와 보안 경호를 받는 VIP 전용 층을 통째로 빌렸다.
그렇기에 신분이 확인된 의사와 간호사, 간병인이 아니면 절대 병실로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다.
넉넉한 품의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등장하자 모두 숨을 죽였다.
기계처럼 일만 하던 간병인들도, 거액의 진료비를 받는 의사도 고개를 숙였다.
돈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에릭 한센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던 이들이다.
그러나 중후한 분위기의 중년인 앞에서는 숨소리도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 남자가 미국의 부통령, 마이크 페인스이기 때문이다.
부통령은 세계 최강의 강대국인 미합중국의 공식적인 서열 2위다.
혹자는 부통령 자리가 실권 없는 허수아비라고 비판해도 대통령 유고 시 승계권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에게 문제가 생기면 부통령이 세계 최강대국을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통령은 미국 상원의 의장이며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구성원이다.
이름값 하나로 미국과 세계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다.
그런 사람이 등장했으니 다들 얼어붙는 게 당연했다.
이곳의 의료진들은 그동안 날고기는 유명인사와 거물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다.
하지만 미국 부통령처럼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는 인물은 처음이었다.
만약 부통령이 뭔가 심통이 나서 특수 VIP 병동 폐지 정책을 밀어붙이면 이곳도 문을 닫아야 한다.
그게 바로 재력(財力)과는 또 다른 차원의 힘인 권력(權力)의 무서움이다.
“잠깐 자리를.”
마이크 페인스 부통령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묵직하게 깔린 그의 음성이 울리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병실 밖으로 나갔다.
고작 말 한 마디에 실린 권위가 남달랐다.
모두 나간 걸 확인한 마이크 페인스가 에릭 한센을 내려다봤다.
분을 참지 못하고 난동을 부리던 에릭은 조용히 누워 있었다.
마이크가 나타난 다음부터 마치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 같았다.
“쯧쯧쯧.”
곧이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마이크 페인스는 대놓고 에릭 한센을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다.
월 스트릿의 천재 금융인 에릭 한센을 노골적으로 멸시한 것이다.
금융계에 뻗친 한센 가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아무리 부통령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멍청한 놈.”
“죄송… 합니다.”
마이크 부통령은 에릭을 강하게 질책했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에릭 한센은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반발하는 대신 죄송하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두 사람 사이에 완벽한 상하관계가 성립돼 있는 것이다.
절대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미국 부통령의 권세가 막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금융은 또 다른 영역이다.
이처럼 수직적인 관계가 자리 잡은 것은 무척 이례적이었다.
“최치우가 널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사무실로 찾아와서…….”
“그놈이 사무실에서 네 무릎을 부수는 동안 밖에 있는 비서와 경호원들은 대체 뭐 하고 있었나?”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멍청한! 그 우스꽝스러운 철문, 내가 치워 버리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마이크 부통령이 노기(怒氣)를 쏟아냈다.
그는 한센 빌딩 꼭대기에 위치한 에릭의 사무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철문을 닫으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것도 인지했다.
그래서 경호원들이 손을 쓰지 못했다는 걸 금방 파악한 것이다.
에릭은 병상에 누운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서운 선생님에게 혼나는 병약한 학생처럼 보였다.
금융으로 전 세계를 농락하며 기업을 약탈하는 천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피지컬이 남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릎을 이렇게 박살 낼 정도라니. 어디서 갑자기 그런 놈이 튀어나온 것인지… 쯧쯧.”
마이크 부통령은 에릭의 무릎을 촬영한 사진을 보며 다시 혀를 찼다.
무릎뼈는 인체에서도 가장 단단한 부위 중 하나다.
내부 인대가 끊어지는 경우는 흔하지만, 뼈가 박살 나는 건 드문 일이다.
작정하고 망치로 내려치지 않는 이상 보통 사람은 남의 무릎 뼈를 부수기 어렵다.
“그놈이 발로 네 무릎을 밟았을 뿐이라고 했나?”
“다른 도구는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발로 밟아서 무릎 뼈를 산산조각 내는 게 가능하다는 걸 믿기 힘들다. 네놈의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니고?”
“밟히는 순간, 트럭에 깔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체중도 얼마 안 나가는 놈일 텐데…….”
마이크 부통령이 인상을 썼다.
곧이어 그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에릭 한센의 부상보다 훨씬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거슬리는 보고서를 쓴 UN의 직원도 풀려났고, 보고서 원본도 회수하지 못했고?”
“면목이 없습니다.”
만약 에릭의 몸이 멀쩡했다면 병상에 누워있지 않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을 것 같았다.
쿵!
마이크 부통령이 단단한 주먹으로 병상을 내리쳤다.
중환자의 안정을 방해하는 행위지만, 그는 에릭의 상태를 신경 쓰지 않았다.
“원본을 회수하고, 그 여자는 죽여 버리라는 게 어려운 명령인가?”
“아닙니다…….”
“그런 간단한 명령도 수행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큰일에 함께하겠나, 에릭 한센!”
마이크 부통령의 진중한 분노가 에릭의 새하얀 살갗을 파고들었다.
유은서의 납치를 지시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마이크 페인스 미국 부통령이었다.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비밀이다.
미합중국 부통령이 네오메이슨 소속, 그것도 에릭 한센을 하수인처럼 부리는 고위 관계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지구가 뒤집힐 것이다.
최치우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독일 정부를 비롯해 UN에도 네오메이슨이 있으니 당연히 미국 정부에도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부통령은 급이 다른 자리다.
설마 그만한 지위에 오른 인물이 네오메이슨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네오메이슨은 돈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거물이 되는 것과 정치로 거물이 되는 것은 다른 길이다.
연관성이 없지 않지만, 야구와 축구처럼 명백히 다른 게임인 것이다.
그런데 네오메이슨이 경제와 금융에 이어 미국 부통령을 배출하며 정계까지 장악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최치우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고 비밀스러운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그 여자가 최치우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기치 못하게 엄청난 미끼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 더 좋은 결과를 위해 한 일입니다.”
“더 좋은 결과? 그래, 우리는 오직 결과로 말한다. 과정이나 동기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 그래서 네가 얻은 결과가 고작 이건가? 최치우에게 모욕을 당하고, 그 여자의 보고서는 놈의 손으로 넘어갔고, 우린 꼬리를 밟혔고, 넌 병신이 되기 일보직전이고!”
병신이라는 말에 에릭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마이크 부통령 앞에서 찍 소리도 못하는 처지다.
그렇지만 에릭은 아직 자신의 부상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이크 부통령은 에릭의 변화를 감지했다.
“왜? 병신이 될 거라고 하니 기분이 나쁜가?”
“꼭… 두 다리로 우뚝 서 그놈에게 되돌려줄 겁니다.”
“최치우에게 복수를? 네가? 매번 당하기만 하면서 무슨 수로!”
“방법이 있습니다. 제 모든 것을, 아니 한센 가문의 전부를 걸고 최치우와 올림푸스를 몰락시키겠습니다.”
에릭의 각오가 남달라 보였다.
최치우에게 큰 코를 다치고, 이제는 다리까지 쓰지 못할 지경이 됐다.
더는 추락할 구석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이크 부통령은 에릭의 비장한 각오를 주목했다.
병실에 들어서 줄기차게 채찍을 휘두른 그가 처음으로 당근을 내밀었다.
“잘 들어라, 에릭. 우리의 기술로 너에게 예전보다 더 튼튼한 다리를 줄 수 있다.”
“네?”
“아직 실험 단계지만, 로보티컬 칩을 이식하면 네 다리로 2m 넘게 점프를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귀찮은 재활 과정 따위 겪지 않고도.”
“그럼 제게 칩을 이식해 주십시오.”
“그에 따른 부작용은 모두 너의 몫이다.”
“감당하겠습니다.”
에릭의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기약 없는 재활을 벗어나 확실하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마이크 부통령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을 계속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그 보고서 덕택에 올림푸스는 우리의 그림자를 알아내고, 독일에서 미국으로 회수한 자금을 동결할 것이다.”
“그것만은…….”
“내가 정부의 힘을 동원해 최대한 막아봐야지. 하지만 보고서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막을 수는 없다. 길어야 고작 1년이다. 그 안에 한센 가문의 저력으로 최치우를 쓰러트려라.”
“알겠습니다. 반드시 놈을 시궁창에 밀어 넣겠습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마이크 부통령은 뒷말을 붙이지 않았다.
에릭 한센도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한센 가문은 모든 것을 잃고, 네오메이슨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가문의 자산은 네오메이슨의 다른 사람들에게 흡수될 것이고, 에릭의 직계 가족은 영문도 모른 채 살해당할 게 분명하다.
이것이 네오메이슨의 힘을 빌려 성장한 가문의 숙명이다.
마이크 부통령과 돌이킬 수 없는 악마의 계약을 맺은 에릭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한 걸음도 물러날 곳이 없다.
로보티컬 칩을 달고 일어설 에릭은 최치우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할 것이다.
네오메이슨도, 에릭 한센도 최치우라는 슈퍼 스타의 등장으로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