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96화 (196/243)

# 196

***

최치우의 행색은 탐험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한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등산복도 챙겨 입지 않았다.

청바지에 운동화, 간편한 바람막이가 전부다.

사실 그의 온몸이 무기인 셈이고, 단전에 자리 잡은 뜨거운 내공도 있기에 복장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카이오와 그랜드 파크는 전문 탐험가들도 선뜻 주파하기 힘든 지역이다.

딱히 유명한 장소가 아니어서 인적도 드물다.

그렇기에 청바지 차림으로 험준한 자연을 가로지르는 최치우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최치우는 공원 초입에서 두 명의 커플 탐험가를 만났다.

하지만 이미 그들과 한참 거리를 벌렸다.

그랜드 파크에 들어선 지 반나절 가량이 지났고, 최치우의 속도는 보통 사람이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게다가 최치우가 이동한 루트 또한 일반적인 트래킹 코스와 달랐다.

그는 어느새 문제의 장소에 다다랐다.

평범한 여행객이 며칠은 고생해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위치다.

최치우는 싱크홀이 연달아 발생해서 땅이 흉측하게 쩍쩍 갈라진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거 참…….”

그가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만약 이런 싱크홀이 도심에 발생했다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자연공원에서 발생해 다행이었다.

카이오와 그랜드 파크는 비인기 지역이라 언론도, 정부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싱크홀이 다수 발생하자 몇 번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취재를 한 게 전부였다.

덕분에 최치우도 정보를 입수했지만, 활발한 후속 보도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군.”

최치우는 내공을 끌어 올려 감각을 예민하게 활성화 시켰다.

하지만 괜한 일이었다.

반경 몇백 미터 안에서 사람의 그림자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이만하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활개 쳐도 된다.

문제는 하늘이다.

스윽-

최치우는 고개를 들어 쨍하게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미국이 보유한 인공위성망을 이용하면 최치우가 정령과 싸우는 현장을 포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다른 때 같으면 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공위성이라고 해서 지구 전체를 현미경처럼 감시하는 만능은 아니다.

최치우의 목적지를 모르는 상태에선 백악관이 직접 나서도 인공위성 좌표를 맞출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잭 앤더슨은 미행을 붙인 덕분에 최치우의 목적지가 카이오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펜타곤의 위성이 카이오와 그랜드 파크를 감시 지역으로 촬영하고 있다면.

그럼 최치우가 마음 놓고 능력을 발휘하기 꺼려질 수밖에 없다.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는 편인데…….”

최치우는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잭 앤더슨은 펜타곤 상부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

여러 정황으로 봐서 그가 독단적으로 미행을 지시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인공위성 좌표를 마음대로 움직이진 못했을 것이다.

중동의 국경 지대나 독도 같은 분쟁 지역은 인공위성의 상시 촬영 지역이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는 카이오와 그랜드 파크에 값비싼 인공위성 시스템을 낭비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야겠군.”

최치우가 판단을 내렸다.

펜타곤의 위성에 촬영을 당할 확률은 낮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은폐 지형을 이용하면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천혜의 자연이 어우러진 카이오와 그랜드 파크에는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널려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바위 아래에서 정령을 불러내 싸우면 위성이 떠도 실체를 촬영할 수 없다.

생각을 마친 최치우가 몸을 움직였다.

싱크홀 가까이에서 정령의 기운을 느끼고, 적당한 위치에서 마법을 펼치려는 것이다.

사실 최치우의 인공위성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정령은 특유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독도 인근에서 물의 정령왕 우라노스와 싸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도는 분쟁 지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미국의 위성이 24시간 촬영하는 장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라노스의 아우라가 주위를 뒤덮어 위성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두 눈으로 현장에서 직접 보지 않는 한, 현대의 카메라로 정령의 모습을 담아낼 수는 없다.

만약 촬영이 가능했다면 UFO 목격담처럼 온갖 사진이 떠돌아 다녔을 것이다.

타닷! 타다닥!

최치우는 다람쥐처럼 재빠른 몸놀림으로 험한 지형을 가로질렀다.

곧이어 싱크홀이 연쇄적으로 나타난 곳에 접근한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흉하게 움푹 파인 검은 구멍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싱크홀 주변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갑자기 땅이 쩍 갈라지는 데 빠져서 목숨을 잃은 동물들도 꽤 많은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장난이 아닌데.”

캘리포니아 북부를 불태운 대형 산불도 장난이라고 넘길 수준은 아니었다.

독도의 이상 기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모른다.

물론 카이오와 그랜드 파크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하진 않았다.

그러나 무작위로 발생한 싱크홀 때문에 자연이 엄청나게 훼손을 당했다.

싱크홀을 일으킨 대지의 정령이 도심으로 움직인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사고가 터질 것이다.

“대체 어딜 봐서 이게 자연의 균형을 맞추는 건지 모르겠다.”

최치우는 우라노스의 항변을 떠올렸다.

정령들의 장난, 또는 횡포가 자연의 균형을 맞춘다는 말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 따위 균형이라면 안 맞는 게 낫지.”

최치우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자기 키보다 몇 배는 큰 암석 밑으로 걸어갔다.

고인돌을 연상시키는 바위 밑에서 마법을 펼쳐 정령을 불러낼 작정이었다.

이만한 싱크홀을 연달아 일으켰다면 최소 중급 이상의 정령일 것이다.

이미 물의 정령왕을 소멸시켰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대지의 정령은 약삭빠르고 교활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최치우는 아슬란 대륙에서 정령술사가 대지의 정령을 다루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을 되살리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술수에 휘말리지 말고, 초장에 잡아야 해.’

마음을 먹는 최치우가 마나를 품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6서클 빙결 마법, 프로즌이 캐스팅됐다.

“프로즌-!”

쩌적! 쩌저저적!

눈앞에 위치한 싱크홀 하나가 통째로 얼어붙었다.

8서클 블리자드의 축소판이지만, 프로즌의 위력은 매번 볼 때마다 놀라웠다.

뻥 뚫린 싱크홀의 검은 구멍이 새하얀 얼음으로 가득 찬 광경은 초현실적이었다.

마음껏 땅에 구멍을 내고 다닌 대지의 정령이 반응할 수밖에 없다.

‘나와라…….’

아니나 다를까.

최치우가 기대한 것처럼 대지의 정령이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영악한 대지의 정령은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다.

자신의 영역이 침범 당하는 걸 잠시도 못 견디는 성향을 갖고 있다.

쿠그그긍-

싱크홀 아래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최치우가 얼음으로 꽁꽁 덮어버린 바로 그 싱크홀이었다.

푸화악!

이변이 일어났다.

땅 밑에서 흙기둥이 솟구치며 얼음을 와장창 깨부쉈다.

6서클 마법인 프로즌의 얼음 덩어리를 밀어낸 흙기둥은 최치우의 키만큼 자라났다.

싱크홀 아래에서부터 치솟은 180㎝ 높이의 흙기둥은 절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정령이 개입하지 않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츠팟!

최치우가 잠자코 서 있자 섬광이 번쩍였다.

동시에 흙기둥이 무너지고, 그 안에서 커다란 전갈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황갈색 빛을 번쩍이는 전갈의 몸 길이는 건장한 성인 남성과 비슷했다.

저만한 크기의 전갈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최치우는 주먹을 쥐며 흙기둥 속에서 등장한 전갈을 쳐다봤다.

‘노하임이군.’

상급 대지의 정령 노하임이 카이오와 그랜드 파크에 싱크홀을 만든 주범이었다.

“그르르르르…….”

노하임이 낮게 그르렁거리며 최치우를 위협했다.

상급 정령이기에 최상급이나 정령왕처럼 인격을 갖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선명한 적의(敵意)를 표출하고 있었다.

왜 자신의 영역에 침범해 얼음으로 싱크홀을 덮느냐는 항의다.

최치우는 노하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장난을 적당히 쳐야지. 싱크홀 한 두 개면 몰라, 이렇게 수십 개를 만들면 정령의 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그르르르-!”

최치우가 순순히 물러날 것처럼 보이지 않자 노하임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상급 정령들은 인격이 없지만 지능까지 낮은 것은 절대 아니다.

최치우는 노하임이 교활한 술수를 쓸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프로즌!”

그는 다시금 6서클 빙결 마법을 펼쳤다.

차가운 마나가 모였고, 노하임이 딛고 선 땅이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최치우는 얼어붙은 땅 위로 화염을 쏟아냈다.

“인페르노-!”

이제 6서클 마법을 연속해서 펼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옥에서 잠시 빌려온 화염이 노하임의 몸통을 노리고 불꽃을 뿜어냈다.

파다다닥!

땅에서 벽이 올라와 불꽃을 막았다.

노하임은 흙과 땅을 자유자재로 이용했다.

단단한 대지의 방벽은 인페르노의 불꽃을 막아내고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

흔히 불과 물을 상극이라 생각하지만, 화염의 진짜 천적은 흙이다.

압도적인 파괴력이 아니면 흙이나 바위를 태우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페르노로는 잡을 수 없겠어. 헬파이어를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최치우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현대에서 8서클의 벽을 넘지 못했다.

자연 재해를 일으키는 8서클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상급 정령은 가볍게 소멸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대체해야 한다.

8서클 마법 없이도 정령왕을 잡아낸 최치우다.

아무리 까다로운 대지의 정령이라 해도 상급일 뿐, 최치우는 속전속결로 소멸시킬 자신이 있었다.

푸욱- 푸슈슉!

그때 노하임이 반격을 시작했다.

최치우의 땅 밑에서 흙기둥이 미친 듯이 솟구쳤다.

가만히 있으면 흙기둥에 삼켜져 꽁꽁 갇힐 것 같았다.

타앗!

최치우는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경공을 펼쳤다.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흙기둥이 올라오는 걸 한발 앞서 감지해 피했다.

그러자 노하임도 패턴을 바꿨다.

싱크홀을 만든 것이다.

쿠콰콰쾅-!

최치우의 발밑이 좌우로 갈라지며 뻥 뚫렸다.

흙기둥은 요리조리 잘 피했지만 싱크홀은 훨씬 범위가 넓다.

노하임이 만든 싱크홀에 빠지면 그걸로 끝이다.

일단 한번 붙잡히면 빠져나가기 힘든 함정을 만드는 게 대지의 정령이다.

방심했다간 캄캄한 흙구덩이 아래에서 질식할 수도 있다.

“어림없다!”

최치우는 공중으로 높이 떠올라 사자후를 터트렸다.

방금 전까지 그가 서있던 자리는 싱크홀이 됐다.

노하임은 최치우를 올려다보며 또 다른 싱크홀을 만들었다.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져 착지할 공간마저 미리 없애려는 것이다.

슈우우욱-

하지만 최치우의 선택은 남달랐다.

그는 노하임이 서있는 곳을 목표로 떨어져 내렸다.

에릭 한센의 무릎을 박살냈던 천근추의 위력을 담아 황갈색 전갈 대가리를 노린 것이다.

쐐애액!

천근추의 힘이 실리자 추락, 아니 낙하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졌다.

노하임도 설마 최치우가 자신을 노리고 공중에서 떨어질 줄은 몰랐다.

잠깐 움찔한 노하임이 전갈 꼬리로 땅을 내리쳤다.

그 순간, 노하임의 좌우에서 땅이 일어나며 방패를 만들었다.

흙과 바위로 만들어진 대지의 방패가 두 겹으로 쌓인 것이다.

‘기다렸다!’

최치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낙하하는 자세 그대로 금강나한권의 최종 비기인 천보일권을 펼쳤다.

우우우웅-

파파파파팍!

백보신권보다 강력한 소림사의 절기가 대지의 방패를 박살냈다.

강철도 찢어버리는 천보일권의 권기(拳氣)는 좌우에서 솟구친 대지의 방패를 먼지로 되돌렸다.

한 치 앞도 알아보기 힘든 자욱한 먼지가 피어났고, 그 틈으로 최치우의 신형이 내리꽂혔다.

콰드드득- 쿠웅!

최치우는 천근추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노하임의 머리통을 밟았다.

천근의 무게가 실린 다리에 짓밟힌 노하임은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소멸됐다.

카이오와 그랜드 파크의 지축을 울리며 우뚝 선 최치우는 이마에 흐른 땀방울을 닦아냈다.

최치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황갈색 소울 스톤을 집었다.

상급 대지의 정령, 노하임의 소울 스톤이 미래 에너지 탐사대 연구실에 새로운 과제를 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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