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폭군(暴君)의 강림>
맨해튼 남쪽, 월 스트릿은 세계적인 금융 기관의 본거지다.
월가의 금융맨들이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는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지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영향력이 축소됐지만, 여전히 월 스트릿은 수많은 기업들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다.
금융 회사에서 투자 결정을 하면 죽어가던 기업도 살아나고, 반대로 원금을 회수하면 잘나가던 기업도 넘어지기 십상이다.
에릭 한센이 이끄는 한센 패밀리는 월가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자랑한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자금을 대거 운용하며 엄청난 수익률을 내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더 놀라운 사실은 새파랗게 어린 에릭 한센이 굵직한 투자를 진두지휘한다는 점이다.
그의 천재적인 투자 감각과 냉혹한 기업 사냥 노하우는 월 스트릿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대중들에겐 이미지 메이킹을 워낙 잘해놓았다.
언론을 통해 한센 가문의 소식을 접하는 대중들은 에릭 한센을 모험적인 투자자로 생각한다.
돈을 노리는 기업 사냥을 도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어차피 언론은 돈을 주는 사람을 절대 물지 않는다.
그렇기에 밖으로 드러난 이미지를 무작정 믿으면 언젠가 배신감을 느끼기 쉽다.
그나마 에릭의 이미지는 최치우라는 신성의 등장 이후 값어치가 많이 떨어졌다.
최치우는 언론에 거액을 주고 광고 기사를 내지 않아도 삶 자체가 도전이었다.
그는 에릭처럼 북유럽과 유태인 자본을 등에 업고 금융계에 뛰어든 금수저가 아니다.
빈털털이 대학생 시절부터 밑바닥에서 신화를 쓰기 시작한 살아 있는 전설이다.
어쩌면 최치우와 에릭 한센이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필연적인 숙명일지 모른다.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환경, 조건을 비롯해 거물로 성장하며 지나온 길까지.
거의 모든 게 상극이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최치우는 광이 번쩍번쩍 나는 한센 빌딩으로 들어섰다.
여느 빌딩이 다 그렇듯, 넓은 1층 로비 한편에는 차단 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출입증을 발급받은 사람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차단기를 부숴버릴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깐!”
차단기 근처의 경호원이 최치우를 불렀다.
근육질의 흑인 둘이 빠르게 다가왔다.
경호원들의 울룩불룩한 덩치만 봐도 웬만한 사람은 오금이 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최치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경호원들을 노려봤다.
“내가 누군지 모릅니까?”
“아…….”
“엄……”
경호원 두 명이 짜 맞춘 것처럼 당황한 표정으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뉴욕 월 스트릿의 빌딩에서 근무하는 경호원이 최치우의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다.
최치우는 미국 경제 TV와 뉴스의 메인 화면을 장식하는 단골 손님이다.
더구나 에릭 한센과는 여러 번 악연으로 얽혔다.
경호원들이 내밀한 사정까지 알 수는 없지만, 한센 가문과 올림푸스가 비즈니스 영역에서 부딪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신들 보스가 나를 초대했습니다.”
“무,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최치우는 저도 모르게 내공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강력한 기파는 밥 샵이나 샤킬 오닐을 연상시키는 흑인 경호원 두 명을 어린 양처럼 순하게 만들었다.
날고기는 경호원이라고 해봐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는 없다.
최치우가 마음먹고 기운을 흩뿌리기 시작하면 두 사람은 숨도 못 쉴 것이다.
철커덩-
경호원이 최치우를 대신해 차단기를 열어줬다.
최치우는 혼자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인지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피했다.
누구도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지 않았다.
꾸욱!
최치우는 고민하지 않고 최고층 버튼을 눌렀다.
에릭의 사무실은 보나마나 꼭대기에 있을 것이다.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게 취미인 인간이다.
자신의 빌딩에서 머리 위에 다른 사람이 다니게끔 허락했을 리 없다.
띠링-!
엘리베이터가 금방 최고층에 멈춰섰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중간에 단 한 번도 다른 층에서 멈추지 않았다.
최치우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길을 찾았다.
다행히 복도와 연결된 입구는 하나뿐이었다.
에릭 한센 혼자서 빌딩 꼭대기를 사무실로 쓰는 모양이었다.
“최치우 대표님, 저희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최치우가 몇 발자국 뗐을 뿐인데 여직원 한 명이 나타났다.
금발을 단정하게 묶은 그녀는 에릭의 비서 같았다.
경호원들이 1층에서 최치우가 왔음을 알렸고,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동안 마중 나올 준비를 마친 것이다.
최치우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곧이어 한눈에 봐도 호화스러운 전용 로비와 접객실이 펼쳐졌다.
여러 명의 여자 비서들, 그리고 다섯 명의 경호원들이 한센 빌딩 최고층에 상주하고 있었다.
오직 에릭 한센만을 위해 배정된 인력이다.
돈 낭비, 인력 낭비지만 과시하기 좋아하는 에릭의 성격이 엿보였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도 탁 트인 공간에서 직원들과 똑같은 책상을 쓰는 세상이다.
그에 반해 빌딩 최고층을 혼자 쓰는 에릭의 사무실은 왕궁을 연상시켰다.
한센 빌딩이라는 자신의 성을 짓고, 꼭대기에서 세상을 깔보는 젊은 왕.
그게 바로 에릭이 그리는 자기 모습이었다.
스윽-
최치우가 등장하자 여자 비서들과 경호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에릭을 곁에서 보좌하는 그들에게도 최치우는 보기 드문 유명인이다.
아마 에릭의 측근들인 만큼 올림푸스와 한센 가문의 악연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도 있다.
최치우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잔챙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한센 가문이라는 왕궁에서 온갖 패악질을 부린 젊은 왕, 에릭 한센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최치우를 안내한 비서가 굳게 닫힌 철문을 가리켰다.
일반적인 사무실 문이 아닌, 은행의 대형 금고와 같은 철문이 기계음을 내며 좌우로 열렸다.
지이이이잉!
자동 장치의 도움 없이 사람의 힘으로 열 수 없는 철문이다.
에릭은 보안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굳이 철문을 설치한 것은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비서와 경호원들도 100%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최치우가 활짝 열린 철문을 지나쳐 들어갔다.
그러자 뒤쪽에서 다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가지 하는군.”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감이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온몸에 문신을 해서 스스로를 강하게 보이려 노력한다는 심리학 가설이 있다.
마찬가지로 두꺼운 철문은 에릭 한센의 불안한 정서를 증명하는 상징이다.
철문 안쪽, 크리스탈 샹들리에와 대리석을 비롯해 온갖 진귀한 소품으로 장식된 화려한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에릭은 한센 빌딩 꼭대기를 중동 왕족의 연회실처럼 꾸며놓았다.
“생각보다 여유로운 것 같습니다. 들어오자마자 무릎부터 꿇을 줄 알았는데. 아니면 그만큼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겁니까?”
에릭은 호랑이 가죽을 통째로 덮어놓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이죽거리는 모습을 보니 눌렀던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아직 확인할 게 남았다.
최치우는 에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 안에 CCTV 같은 건 없겠지?”
“나만의 공간인데 CCTV를 설치했을 리가. 왜? 무릎 꿇는 모습이 녹화라도 될까 봐 겁이 납니까?”
에릭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그는 곧 최치우가 무릎을 꿇을 거라 확신했다.
유은서에게 먹인 독약 캡슐을 48시간 안에 해독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뉴욕 최고, 아니 세계 최고의 명의를 불러와도 그 짧은 시간 안에 해독을 할 수는 없다.
심지어 독이 발동하려면 아직 30시간 넘게 남았다.
독약 캡슐을 먹고 고작 18시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최치우가 일찌감치 포기를 하고 해독제를 받기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CCTV도 없고, 방음은?”
“약한 모습 보이지 말아요, 치우.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바깥에선 알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무릎을 꿇고 그동안의 무례를 진심으로 사과하면 됩니다. 그다음 퓨처 모터스의 지분을 매각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 바로 해독제를 전해주겠습니다.”
에릭 한센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그는 느긋하게 앉아 최치우가 복종하는 모습을 감상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엄청나게 넓은 개인 집무실의 공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월 스트릿 중심에 우뚝 솟은 한센 빌딩의 최고층, 철문으로 닫힌 그곳에서 최치우가 가면을 벗어던졌다.
고오오오오-!
그는 작심하고 내공을 뿜어냈다.
소림사 금강나한권의 정명공대한 기운이 아니다.
평생 야전을 떠돌며 정파와도 싸우고 마교와도 싸웠던 투신(鬪神).
오직 한 사람, 최치우의 전생인 천하제일검 이태민과 우정을 나눴던 고독한 늑대 권왕의 아랑권이다.
아랑권의 기운이 폭사 되자 안 그래도 하얀 에릭의 낯빛이 완전히 창백해졌다.
에릭 한센은 독감에 걸린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대체 무슨… 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징벌의 시간이다.”
쿵!
에릭이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섰다.
확실히 에릭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아랑권의 기운에 맞서 일어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하긴,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세계 금융을 움직여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의 일자리를 갖고 놀 수 있겠는가.
“이렇게 나오면… 당신이 아끼는 그 여자는 죽습니다. 해독제가 필요 없어요?”
“응, 필요 없어.”
최치우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곤 일어선 에릭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뛰어들었다.
퍽-!
묵직한 타격음이 울렸다.
최치우의 정권이 에릭의 명치에 정통으로 꽂혔다.
“우우욱!”
에릭은 그 자리에서 점심에 먹은 걸 모조리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굴릴 틈도 없었다.
고귀한 귀족 신분을 자랑하던 에릭 한센이 토사물을 질질 흘린 채 꺽꺽거렸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최치우는 주저앉은 에릭의 오른쪽 무릎을 밟았다.
단순히 짓밟은 게 아니다.
내공을 이용해 천근추(千斤錘)의 힘을 실었다.
천근은 무려 600㎏을 뜻하는 단위다.
말 그대로 600㎏이 넘는 힘이 최치우의 발에 실려 에릭 한센의 오른쪽 무릎을 박살 냈다.
“끄아아아아아아!”
입가에 토사물을 묻힌 에릭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절규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두 팔을 휘저으며 몸부림치지만, 천근추의 위력이 실린 최치우의 발은 기둥처럼 꿈쩍도 안 했다.
에릭이 아무리 크게 비명을 질러도 밖에선 들리지 않는다.
CCTV도 없고, 방음도 완벽하다.
평소에는 외부로부터 에릭을 든든하게 지켜준 철문이 장애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엄살 떨지 마.”
“크으윽- 그만, 제발 그만!”
“아직 멀었다.”
최치우가 발을 옮겼다.
이번에는 에릭의 왼쪽 무릎이 타겟이었다.
쿵-!
역시 천근추의 힘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에릭 한센은 왼쪽 무릎마저 산산조각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
“끄아아악! 거걱… 거거걱…….”
급기야 에릭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통증이 임계점을 넘기고, 비명을 지를 힘도 남지 않아 쇳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너 하나 죽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지만, 비즈니스로 결판을 내는 게 목표였다. 이 세상의 법칙으로, 너희가 가장 자신 있는 방법으로 싸워서 이기고 싶으니까.”
최치우는 에릭 한센과 지겹도록 부딪치면서도 비즈니스 이외의 방법을 찾지 않았다.
분명한 소신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토사물과 침을 질질 흘리며 반쯤 정신이 나간 에릭을 내려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 난 올림푸스를 키워서 비즈니스로 너와 네오메이슨을 나락에 떨어트릴 생각이다. 하지만 그 선을 먼저 넘으면 이렇게 갚아줄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한국에서 트럭으로 날 덮친 것도 너희가 벌인 짓이지? 어디 계속해 봐. 다음엔 무릎이 아니라 두개골을 부숴줄 테니.”
어설픈 협박이나 경고와는 차원이 달랐다.
최치우는 이미 에릭 한센의 양쪽 무릎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당장 병원에 가도 100% 회복은 어려울 것이다.
아마 평생 두 다리를 온전히 쓰기 힘들지 모른다.
최소한 몇 달에서 몇 년은 절뚝거리며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최치우는 에릭의 자존심과 멘탈을 유리처럼 부숴 버렸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뇌수가 뽑히는 고통을 경험한 기억은 에릭에게 영원히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최치우 앞에서 토사물을 흘리고, 넋을 놓은 채 비명을 지르며 절규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준 것도 영혼의 상처다.
“경찰에 신고해. 올림푸스의 최치우에게 짓밟혔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전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되길 원한다면.”
에릭 한센은 절대 경찰에 신고할 수 없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은 아니다.
네오메이슨은 수면 아래에서 은밀히 움직이기를 원한다.
경찰이 개입하고, 온 세상이 관심을 가지면 유은서 납치 사건의 전말도 밝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네오메이슨이 에릭의 신고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최치우는 만신창이가 된 에릭을 남겨두고 등을 돌렸다.
제어할 수 없는 폭군이 한센 빌딩 꼭대기에 강림했다.
겨우 5분 정도였지만, 폭군은 에릭 한센의 철옹성에서 오만함을 바닥까지 무너트렸다.
그 여운이 아직까지도 드넓은 공간을 떨어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