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화기 너머 에릭의 목소리가 울렸다.
최치우는 흥분하지 않았다.
폰을 붙잡고 화를 내봐야 자신만 우스워질 따름이다.
그가 전화를 건 목적은 따로 있었다.
유은서를 납치하고, 독이 든 캡슐을 먹인 장본인이 에릭 한센이 맞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은서에게 장난을 친 것 같은데.”
-장난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요.
“에릭.”
최치우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에릭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에릭 한센은 이죽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35시간쯤 남았나요? 그때가 되면 장난이라고 말하지 못할 텐데…….
“원하는 걸 정확히 말해.”
-간단합니다. 맨해튼의 한센 빌딩으로 와서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것. 그리고 현장에서 퓨처 모터스 지분을 내게 매각하면 바로 해결해 주겠습니다.
에릭은 퓨처 모터스 지분과 해독제를 바꾸자는 의사를 내비쳤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퓨처 모터스는 제우스 S를 성공적으로 출시했고, 전 세계에 제우스 파크를 오픈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억만금을 줘도 퓨터 모터스의 지분을 안 파는 게 정답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통째로 넘기는 바보가 어딨겠는가.
더구나 에릭 한센과 네오메이슨은 전기차 산업을 망치기 위해 화재까지 일으켰었다.
그들이 퓨처 모터스 대주주가 되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유은서를 통해 기회를 잡았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자신만만하군.”
-퓨처 모터스가 아까우면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됩니다. 난 크게 아쉬울 게 없어요.
“35시간, 그 전에 널 찾아가지.”
-특별히 부드러운 카펫을 깔고 기다리지요. 무릎 꿇기 편하도록.
에릭이 비웃음을 머금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최치우의 말뜻을 다르게 해석했다.
독약이 발효되기 전에 최치우가 자신을 찾아와 굴복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에릭에게 무릎을 꿇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퓨처 모터스 지분이 유은서의 생명보다 소중하기 때문은 아니다.
잭 앤더슨에게 말한 것처럼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넌 지옥을 경험하게 될 거다, 35시간 안에.”
최치우는 분노를 꾹꾹 눌러 속으로 씹어 삼키며 혼잣말을 뱉어냈다.
짧은 전화 통화로 에릭 한센이 주범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차례대로 움직일 일만 남았다.
***
최치우는 유은서의 병실로 돌아왔다.
그는 의료진에게 양해를 구했다.
신호를 줄 때까지 아무도 병실 안으로 못 들어오게 막은 것이다.
병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펜타곤 소속 경호원들에게도 당부를 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신경 쓰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지시였다.
호텔 스위트룸처럼 넓은 병원 특실에서 단둘이 뭘 하려고 출입을 차단하는 것일까.
이상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시를 내린 사람이 올림푸스 CEO 최치우다.
미심쩍은 일이라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다.
최치우의 이름 석자가 갖는 권위는 미국에서도 절대적이다.
잠시 다른 일을 보기 위해 병원 밖으로 나간 잭 앤더슨도 펜타곤 경호원들에게 엄중한 명령을 내려놓았다.
무슨 명령이든 최치우의 말을 자신의 것처럼 따르라고 한 것이다.
철컥-
병실 문을 잠근 최치우가 유은서에게 다가갔다.
그는 불안한 표정을 짓는 유은서를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은서야.”
“응, 치우야.”
“너가 먹은 캡슐은 지금부터 서른 시간 정도가 지나면 독을 온몸에 퍼트릴 거 같다.”
“그냥 협박이 아닌 거지?”
“내가 아는 에릭은 없는 말을 지어내 협박을 할 사람이 아냐. 병원에서 찾아내지 못하는 특수한 독약을 썼겠지.”
유은서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만 하루가 지나면 독이 퍼져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평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최치우는 두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쌌다.
“너가 날 믿어주면… 내 힘으로 독을 해결해 볼게. 조금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일 것 같다.”
“믿을게.”
유은서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최치우가 말을 꺼내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겠어?”
“내가 여기서 너 말고 누구를 믿을 수 있겠어. 그리고 혹시 결과가 안 좋아도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뭐든 편하게 해줘.”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최치우는 유은서를 똑바로 쳐다보며 의지를 다졌다.
“빠르면 30분, 길면 1시간 정도. 대신 예상 못 한 고통이 느껴질 수도 있어. 그래도 절대 크게 움직이지 않고 참아야 해.”
“해볼게, 치우야.”
“그럼 상의를 전부 탈의하고 뒤로 돌아서 앉아줘. 자세는 양반다리, 가부좌를 틀고.”
“응? 옷을 다 벗고?”
“그래야만 해.”
최치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애들 장난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추궁과혈(推宮過穴)로 독기를 빼내기 위해선 한 꺼풀의 옷도 용납할 수 없다.
최치우와 유은서는 커플이던 시절 서로의 모든 것을 보며 사랑을 나눈 사이다.
그렇지만 벌써 몇 년이 훌쩍 지났다.
유은서 입장에서는 갑자기 최치우 앞에서 상의를 전부 벗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알겠어. 잠시만.”
그래도 목숨이 달린 일이다.
유은서가 등을 돌리고 병원복과 티셔츠, 그리고 속옷을 모두 벗었다.
그녀는 상의를 탈의한 채 가부좌를 트는 것까지 마쳤다.
일반 병실과 달리 병상이 워낙 넓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공간이 넉넉했다.
“다 했어.”
최치우는 병상에 바짝 붙어 그녀의 새하얀 등을 마주보고 섰다.
“후우-”
깊은 숨을 들이마신 최치우가 단전의 내공을 끌어 올렸다.
추궁과혈은 본래 상대의 기운을 자극해 혈도를 뚫어주는 수법이다.
하지만 그 원리를 응용하면 몸 안에 숨어든 독을 제거할 수도 있다.
대신 내공 소모가 만만치 않다.
자칫 잘못하면 추궁과혈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주화입마에 빠진다.
최치우는 주화입마라는 리스크를 감수하며 유은서의 등 뒤에 선 것이다.
“시작할게. 마음 단단히 먹어.”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거야.”
유은서의 대답을 들은 최치우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뜨거운 내공이 가득 차 있었다.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고 유은서의 혈도에 손가락을 꽂았다.
푹- 푹푹!
운동선수도 감당하기 힘든 점혈(點穴)이 이어졌다.
유은서는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통을 참아냈다.
우선 에릭이 먹인 독약 캡슐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캡슐은 진즉 위에서 녹았을 것이다.
문제는 독기(毒氣)다.
캡슐을 타고 유은서의 몸으로 들어온 독기는 앞으로 35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숨어 있다.
인간의 몸에는 혈도가 있고, 단전에서 시작된 기운이 혈도를 따라 전신을 돌아다닌다.
독기 역시 기경팔맥 혈도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슈슈슈슉-
최치우는 두 눈을 감았다.
모든 정신을 추궁과혈에 집중시켰다.
그의 내공이 유은서의 몸으로 들어가 전신 혈도를 따라 돌아다니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유은서의 몸 안 곳곳을 탐색하고 다니는 셈이다.
그래서 추궁과혈을 하다 보면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서로의 기운이 섞이고, 혈도 구석구석을 헤집는 것은 일반적인 스킨십과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지금은 독기를 찾느라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다.
그러나 추궁과혈이 끝나면 두 사람은 서로의 내밀한 부분을 보여준 일체감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찾았다!’
최치우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에 희열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캡슐의 독기는 유은서의 운월혈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운월(蕓月)은 쇄골 아래에 위치하는 혈도다.
기를 운용하는 데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위치지만, 여기서 독 기운이 폭발하면 인체에 치명적이다.
심장과 머리에 가깝기 때문에 말 그대로 즉사할 확률이 높다.
에릭 한센이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치우가 혈도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고, 백회혈에서 단전으로 이어지는 주요 혈도만 확인했다면 깜빡 놓쳤을 것이다.
“좀 많이… 아플 거 같다.”
최치우는 유은서에게 한 번 더 경고를 했다.
그리고 내공을 모아 운월혈로 집중시켰다.
“으음…….”
결국 유은서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마 그녀는 쇄골에 뜨거운 쇳덩이를 붙인 듯 엄청난 통증을 느낄 것이다.
독을 불태우기 위한 최치우의 내공이 쇄골 아래에 모였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실수로 은서를 잃는다. 정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최치우는 물의 정령왕 우라노스와 싸울 때만큼 전력을 다했다.
그때의 실수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지만, 여기서 실수하면 유은서가 죽는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긴 마찬가지다.
화르르르륵-!
운월혈에 모인 최치우 내공이 한순간 기염을 토해냈다.
“아아-!”
유은서가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용케도 몸을 뒤틀거나 흔들진 않았다.
여전히 최치우의 두 손은 그녀의 등에 딱 붙어 내공을 조종하고 있었다.
“크흐음!”
이윽고 거친 소리와 함께 유은서가 검은색 핏덩이를 토해냈다.
병상의 하얀 이불과 시트가 붉게 물들었지만, 최치우의 표정은 더없이 환해졌다.
“끝났어. 다 됐다, 은서야.”
그녀의 등에서 손을 뗀 최치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유은서는 아직 통증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건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쇄골이 계속 뜨거워.”
“아마 화상을 입은 것처럼 한동안 불편하겠지. 그래도 곧 나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
최치우는 유은서를 다독였다.
독 기운을 불태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후속 조치까지 꼼꼼히 챙길 작정이었다.
“올림푸스에 산신령이라고 불리는 어르신이 있어. 곧 한국에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를 탈 거야. 그분이 널 돌봐줄 테니 예전보다 더 건강해지겠다.”
최치우는 올림푸스 제약 파트에서 고문으로 일하는 산신령 허철후를 뉴욕으로 불렀다.
덩달아 한강대교에서 구해준 박우식도 함께 호출했다.
허철후 옆에서 보고 배우면 박우식이 한의사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넌 이제… 다시 서울로 가는 거야?”
유은서가 벗었던 옷을 챙겨 입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최치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등을 돌린 유은서는 보지 못했지만, 진한 살기가 묻어나온 무서운 미소였다.
“아직 뉴욕에서 할 일이 남았어. 내 소중한 사람들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야지.”
“소중한 사람…….”
“간호사 불러줄게. 쉬고 있어.”
최치우는 유은서를 남겨두고 병실 밖으로 나섰다.
독약을 해결했으니 에릭 한센에게 대가를 받아낼 차례다.
1초도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최치우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결할 것이다.
“한센 빌딩으로 갑시다.”
노란색 택시에 올라탄 최치우가 목적지를 말했다.
뉴욕 월 스트릿 중심부에 우뚝 선 한센 빌딩.
그곳에서 에릭 한센의 죄를 물을 것이다.
“무릎을 꿇으라고? 무릎뼈를 산산조각 내줄 테니 기대해라, 에릭.”
택시 뒷좌석에 앉은 최치우가 에릭 한센을 향한 분노를 되새겼다.
그의 잔인한 경고가 곧 현실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