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소중한 사람>
TV를 보면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하지만 그 몇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일을 해내는 사람들도 있다.
우선 펜타곤의 천재 요원이자 실세, 잭 앤더슨이 그런 부류였다.
그는 뉴욕 경찰은 물론이고, 최강의 수사력을 자랑하는 FBI를 직접 움직이게 만들었다.
펜타곤의 긴급 요청은 FBI 고위층에서도 섣불리 외면할 수 없다.
사실 펜타곤과 CIA, FBI는 은연중 서로 경쟁하는 사이다.
그렇지만 도울 때는 화끈하게 돕고, 그 빚을 톡톡히 받아낸다.
특히 규모나 세력 면에서 가장 거대한 펜타곤의 요청은 내심 반가운 일이다.
나중에 도움의 대가로 받을 수 있는 혜택도 펜타곤 건물 크기만큼 엄청나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적은 브롱스, 전 요원들에게 다시 전한다. 타깃의 마지막 행적은 브롱스.”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쯤 가린 중년 남자가 무전을 했다.
납치 수색에 특화된 FBI는 벌써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유은서를 납치한 범인들이 브롱스에 숨어들었다는 것을 정확히 알아냈다.
무전을 마친 남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 펜타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롱스는 뉴욕의 우범지대로 떠오르고 있다.
예전에는 맨해튼의 할렘이 손꼽히는 위험지역이었지만, 머나먼 과거의 일이다.
이제 할렘도 엄청난 월세를 자랑하는 핫 플레이스로 바뀐 지 오래다.
그렇게 밀려난 빈민과 갱스터들은 브롱스로 이주했다.
하지만 FBI가 마음먹고 뒤지면 브롱스를 탈탈 터는 건 일도 아니다.
“납치 수법은 프로페셔널 냄새가 나지만… 펜타곤이 신경 쓰는 여자를 건드리다니, 멍청한 놈들.”
FBI의 요원들을 지휘하는 중년인이 얼굴 모를 범인들을 비웃었다.
아마 그들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만약 펜타곤이 엮인 걸 미리 알았다면 훨씬 치밀한 작전을 짤 수밖에 없다.
치익-
중년인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헐리웃 영화 속 탐정처럼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제법 강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유은서를 구하기 위해 미국 최고, 아니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
“최치우의 여자……. 이거 정말 뜻밖에 대어가 걸렸습니다.”
에릭 한센의 푸른 눈동자가 기분 나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먹이를 앞둔 흡혈귀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최치우 때문에 에릭 한센이 입은 타격은 어마어마하다.
그의 여동생이 미국 법원에 구속까지 됐던 것은 약과에 지나지 않는다.
금전적인 손해를 합하면 족히 1조 원은 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오메이슨의 입지도 엄청나게 위축됐다.
네오메이슨은 금융계 영향력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에서 승승장구하며 온갖 정책을 주물러 왔다.
그들이 원하는 정책과 사업은 쭉쭉 키웠고, 눈엣가시인 것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망가트렸다.
네오메이슨의 위세가 여전했다면 전기차 사업은 여전히 수면 위로 부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치우라는 괴물이 등장해 판을 어그러트리기 시작했다.
다 죽어가는 T-모터스를 인수해 퓨처 모터스로 되살렸고, 럭셔리 전기차 제우스 S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요즘 제우스 S는 전 세계에서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고, 체험관인 제우스 파크는 어린이들이 디즈니 월드보다 더 가고 싶은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소울 스톤으로 대체 에너지 산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게 뼈아팠다.
광명과 라이프치히의 소울 스톤 발전소는 일종의 상징이다.
두 곳에서 생산하는 전기로 도시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강한 자극은 없다.
발전소를 지켜본 주요 국가에서 대체 에너지 개발에 투자하게끔 만드는 강력한 동기인 셈이다.
덕분에 석유 기득권 유지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네오메이슨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투자금을 손해 보는 정도가 아니다.
그들이 주도했던 세계의 패러다임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툭 튀어나온 최치우라는 사람 단 한 명 때문에 말이다.
네오메이슨의 선봉장 역할을 맡은 에릭 한센이 최치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주제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인줄 알았는데, 당신 덕에 최치우에게 아주 좋은 선물을 하게 됐습니다.”
에릭 한센이 유은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10시간이 넘는 감금에 지쳤지만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의자에 묶여 혈액순환도 안 되고, 탈수 증세까지 찾아왔다.
코앞까지 드리운 죽음의 공포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유은서는 최치우의 여자였다는 자부심으로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난 굴복하지 않아.”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다짐을 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유은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에릭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굴복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최치우와 펜타곤을 움직이게 만든 여자라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겠지요.”
처억!
에릭이 팔을 뻗었다.
그러자 한동안 사라졌다 돌아온 조직원 한 명이 냉큼 달려와 뭔가를 건넸다.
에릭의 손바닥 위에 놓인 건 작은 캡슐이었다.
얼핏 봐선 평범한 알약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러나 무서운 기술력이 응축된 독약이었다.
“이게 뭘까요?”
“…….”
“당신, 바로 최치우의 여자를 죽일 수 있는 독약입니다. 하지만 걱정 말아요. 이걸 먹는다고 바로 죽는 게 아니니까.”
에릭 한센은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 히죽거리며 설명을 계속했다.
몇 년 동안 네오메이슨에게 치명타를 가했던 최치우의 여자인 유은서를 사로잡아 한껏 기분이 업된 것 같았다.
“앞으로 이틀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정확히 48시간이 지나는 순간, 온몸으로 독이 퍼져 손쓸 틈도 없이 즉사하겠지요. 올림푸스에서 만든 프로메테우스를 먹어봤자 48시간을 72시간으로 늘리는 것뿐, 근본적인 해독제는 이 세상에서 나만 가지고 있습니다. 어때요, 놀랍지요?”
설명을 마친 에릭은 강제로 유은서의 입을 벌렸다.
유은서는 고개를 휘저으며 발버둥 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도 화장실 갈 때를 빼고 의자에 10시간 이상 묶여 있으면 기진맥진 쓰러진다.
에릭은 극소량의 물만 먹이며 유은서의 체력을 완전히 소진시켰다.
그렇기에 고개를 몇 번 흔들고 축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는 대로 처먹어야지요. 그게 노예들의 운명이니까.”
에릭 한센은 소름 돋는 섬뜩한 말을 내뱉으며 유은서의 입에 캡슐을 밀어 넣었다.
억지로 캡슐을 삼킨 유은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해독제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는 지독한 약을 먹었는데 정신이 멀쩡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은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 에릭 앞에서 우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빌어먹을 최치우의 여자 아니랄까 봐 제법 독하지만, 그래 봐야 당신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해독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최치우가 나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것이지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치우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럼 당신이 죽어야지요. 그놈의 사랑이 진짜인지 아닌지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끝까지 히죽거린 에릭 한센이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금세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마치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는 것 같았다.
“곧 펜타곤이 따라붙을 테니 깔끔하게 정리합시다.”
에릭 한센은 감정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유은서를 납치한 조직원들은 프로 중의 프로다.
펜타곤이 엮이며 일이 꼬였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철수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FBI가 도착해도 브롱스의 폐공장에서 증거를 찾아내긴 힘들 것이다.
에릭은 조명이 꺼진 공장에 혼자 남겨지게 될 유은서를 돌아봤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다.
유은서가 독약 캡슐 이야기를 꺼내면 최치우는 에릭의 소행이라 확신할 것이다.
그래도 거리낌이 없었다.
물증 없이는 FBI나 펜타곤도 에릭 한센을 함부로 수사하지 못한다.
미국 사회에서 에릭이 휘두르는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에릭은 최치우도 이번만큼은 경거망동하기 힘들 거라고 판단했다.
유은서의 생명이 달린 해독제를 에릭이 가진 이상, 어떻게든 저자세로 협상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저 여자의 목숨을 대가로 뭘 받아낼까? 우선 내 앞에서 무릎부터 꿇려야지. 최치우… 드디어 지난 수모를 갚아주게 됐다.’
에릭은 다른 곳도 아닌 뉴욕에서 최치우에게 굴욕을 당한 적이 있다.
그 빚을 갚아줄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유은서를 남겨두고 떠나는 에릭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오래도록 맺혀 있었다.
***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한 최치우는 잭 앤더슨의 전화를 받고 맨해튼의 병원으로 향했다.
전용기를 준비하고, 인천공항에서 뉴욕까지 날아오는데 17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사이에 펜타곤은 유은서의 신병을 확보했다.
정확히 말하면 FBI가 나서서 그녀를 찾아낸 것이지만, 어쨌든 최치우는 펜타곤 덕을 톡톡히 봤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확실하게 대가를 치를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은 유은서의 안전을 직접 확인하는 게 먼저다.
병원에 도착한 최치우는 VIP들이 입원하는 특실로 안내를 받았다.
어떤 병실에 유은서가 입원했는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간호사들에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유은서의 병실 입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겠습니다.”
최치우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경호원들은 한눈에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세계 어디서나 얼굴이 명함이 되는 사람, 펜타곤 소속 경호원들마저 긴장시키는 사람이 바로 최치우다.
“대표님.”
병실에 들어가자 잭 앤더슨이 보였다.
최치우는 그에게 목례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유은서의 안위가 가장 궁금했기 때문이다.
“치우야…….”
다행히 유은서는 괜찮아 보였다.
뉴욕 최고의 병원 특실답게 병상은 호텔 침대처럼 넓었다.
유은서는 핼쑥해진 안색으로 누워 있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최치우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누워있는 유은서의 손을 꼭 잡은 최치우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너무 늦었지.”
“난 괜찮아. 진짜 괜찮아. 너한테 폐를 끼친 것 같아서 미안해.”
“어떻게 된 일이야?”
최치우는 유은서의 상태가 안정적임을 확인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때 뒤쪽에 있던 잭 앤더슨이 나섰다.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최치우는 잭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유은서가 의심스러운 금융 거래를 추적했고, 갑자기 납치를 당해 독약을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잭의 설명을 들은 최치우는 곧장 한 사람을 떠올렸다.
“에릭 한센. 감히-!”
최치우가 분노를 터트렸다.
유은서를 의식해 기운을 억제했지만, 최치우의 눈앞에 서 있는 잭 앤더슨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느꼈다.
펜타곤의 천재 요원을 움츠러들게 만든 최치우가 화를 삼키며 말했다.
“그런 짓을 벌일 사람은 에릭 한센뿐입니다. 당장 조사하고, 해독제를 받을 수 없겠습니까?”
“그건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어렵습니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한센 가문을 함부로 건드리면 펜타곤도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피해자인 유은서 씨의 증언을 제외하면 어떤 증거도 없는 상황입니다.”
“48시간 뒤에 즉사한다는 독약은 어떻습니까?”
“이곳에서 정밀 검사를 마친 결과 유은서 씨의 체내에서 독성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발견을 못 한 거겠지. 에릭이, 그리고 은서가 없는 말을 지어냈을까.”
최치우가 숨을 죽이며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 맺힌 분노가 예사롭지 않았다.
잭 앤더슨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최치우는 펜타곤에서 컨트롤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잭, 펜타곤의 도움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언젠가 이 대가는 반드시 갚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내 방식대로 합니다. 펜타곤은 여기에서 빠지면 고맙겠습니다.”
천하의 펜타곤에게 빠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에 몇 명이나 될까.
최치우는 서슴없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작심하고 화를 낸 적은 거의 없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사안이 다르다.
에릭 한센은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오가며 장난을 쳤다.
유은서의 몸에 독약 캡슐을 심어 넣은 게 에릭의 가장 큰 실수였다.
“하지만 대표님, 여기는 뉴욕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센 가문의 힘은…….”
“펜타곤이 대신 걱정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은서의 독약도, 에릭의 죗값도 내가 직접 해결할 테니까.”
최치우의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천재 중의 천재로 불리는 잭 앤더슨도 최치우가 무슨 일을 벌일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뉴욕의 어두침침한 하늘 아래에서 감당하기 힘든 사단이 일어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