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
최치우는 미국 출장 일정을 조율했다.
그가 미국에 가는 건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
퓨처 모터스 본사가 실리콘밸리에 있고, 뉴욕에 제우스 파크를 열었다.
그렇기에 자주 미국을 오가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의 주요 투자자, 기관, 세계적인 VIP들도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귀찮은 일이지만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며 네트워크를 다지는 것도 CEO의 업무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 말고 진짜 목표는 따로 있었다.
최치우는 콜로라도 국립공원의 이상 기후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 대지의 정령이 개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최치우는 물의 정령, 그리고 불의 정령에서 소울 스톤을 얻었다.
어쩌면 처음으로 대지의 정령을 상대하고 색다른 특성의 소울 스톤을 확보할지 모른다.
최치우는 콜로라도에서 목적을 완수하면 펜타곤의 잭 앤더슨을 만날 생각이었다.
독도에서 물의 정령왕 우라노스를 소멸시키고 폭풍우를 잠재웠는데 펜타곤이 관심을 보였다.
그들의 의향을 확인하고, 쓸데없는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한 번은 만나야 될 것 같았다.
“이번에도 정신없이 바쁘겠군.”
최치우는 비서팀에서 정리해 준 일정을 확인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중간중간 억지로 짬을 낼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이다.
사람들은 대기업 총수가 놀고먹으면서도 돈을 벌 거라 착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가진 게 많아지면 그만큼 잃기도 쉬워진다.
더 높은 곳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상 유지라도 하려면 죽어라 달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동산으로 임대료를 받는 건물주와 비즈니스를 일군 사업가는 태생부터 다르다.
최치우는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기에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우웅-
그때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전화는 아니고 메시지가 온 모양이다.
최치우는 별 생각 없이 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치우야, 도와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최치우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유은서다.
뉴욕에 살고 있는 그녀가 갑자기 SOS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삐이이- 삐이이- 삐이이-
애꿎은 연결음만 울릴 뿐, 통화가 되지 않았다.
최치우는 시계를 보고 뉴욕 시간을 확인했다.
뉴욕은 지금 늦은 밤이다.
유은서가 이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칠 가능성은 제로다.
돈을 요구하는 스팸 메시지나 보이스피싱 같지도 않았다.
최치우는 곧장 잭 앤더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 현지에서 펜타곤의 파워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표님?
잭이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난데없이 최치우가 직통 전화를 거는 경우는 무척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인사도 생략하고 용건부터 말했다.
“잭, 방금 뉴욕에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UN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 소속 유은서, 다시 말합니다. 유은서가 내게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이후 연결이 안 됩니다.”
-UN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 소속 직원 은서 유. 맞습니까?
“맞습니다.”
잭 앤더슨도 심각한 기색을 파악하고 곧장 유은서의 지위와 이름을 외웠다.
최치우는 원하는 것을 정확히 전달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펜타곤에서 유은서의 안전을 확보해 주십시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나도 당장 전용기를 타고 뉴욕으로 갈 예정입니다.”
-뉴욕에서 만나겠네요. JFK 공항에 도착할 때, 유은서 씨의 신병은 펜타곤이 확보하고 있을 겁니다.
“빚은 제대로 갚죠.”
최치우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사람은 바다 건너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에 이렇게 빨리 대응할 수 없다.
하지만 최치우의 네트워크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방금 전화 한 통으로 펜타곤의 실세를 움직였다.
서울에서 뉴욕까지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리지만, 펜타곤이 나서면 뉴욕 경찰과 특수부대를 포함해 FBI와 CIA도 가동된다.
최치우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은 시공간을 초월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몸은 서울에 있어도 뉴욕의 사고에 즉시 대처하는 게 새삼스럽지 않았다.
물론 그 대가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올림푸스와 펜타곤은 계약을 맺은 파트너다.
그렇지만 공짜로 펜타곤의 전력을 이용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최치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펜타곤이 유은서를 안전하게 지켜준다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
그는 비서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용기 스케줄을 잡았다.
원래 전용기를 띄우려면 기장과 부기장, 승무원을 포함해 공항 일정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판사판 가릴 처지가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빨리 뉴욕으로 날아가야 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래 미국 출장 계획이 잡혀 있었기에 준비가 빠르다는 점이었다.
최치우는 뒷일을 임동혁과 백승수에게 맡기고 인천공항으로 움직였다.
‘지금으로선 펜타곤을 믿을 수밖에…….’
미국에서 벌어진 일인데 펜타곤이 손을 못 쓰면 방법이 없다.
우선 잭 앤더슨을 믿고 마음을 차분히 다스려야 한다.
최치우마저 흥분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공항으로 차를 모는 길, 최치우는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액셀을 밟았다.
***
최치우는 전용기 안에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평소라면 올림푸스 전속 승무원들이 사근사근한 태도로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누구도 쉽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눈을 감은 최치우의 주위에서 범접하기 힘든 기파가 뿜어졌기 때문이다.
온갖 손님들을 다 겪어본 베테랑 승무원도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최치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공을 분출했다.
그만큼 깊이 집중하며 사색에 빠져 있었다.
‘우라노스를 소멸시켰는데… 어째서 소울 스톤이 나오지 않았던 걸까.’
최치우는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14시간 내내 유은서 걱정만 할 것 같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물의 정령왕 우라노스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 봤다.
어두운 바다를 환히 밝히는 섬광이 번쩍였고, 해저에서 물줄기가 역류하며 최치우를 수면으로 튕겨냈다.
그러나 소울 스톤은 보이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싸우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일까.
‘절대 그럴 리 없어.’
아무리 긴박했어도 소울 스톤을 놓칠 최치우가 아니었다.
정령왕의 소울 스톤에는 그야말로 땅을 뒤엎는 에너지가 담겨 있을 것 같았다.
최상급과 상급 정령의 소울 스톤으로도 도시 하나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정령왕의 소울 스톤이라면… 작은 나라 하나를 감당할 수 있을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아쉬웠다.
최치우는 다시 우라노스와의 혈전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미쓰릴 필드가 해제되는 순간, 그래비티로 중력을 허물고 마법을 펼쳤지.’
몇 번을 돌이켜 봐도 전율이 돋을 만큼 짜릿한 순간이었다.
과학과 마법의 조화로 우라노스를 무너트리고, 마무리는 무공으로 장식했다.
최치우는 미쓰릴 단검을 든 채 권왕의 아랑권 맹아일격을 우라노스의 머리에 꽂아 넣었다.
그때의 감각이 여전히 손끝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섬광, 역류, 그리고…….’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집중하길 몇 분이나 지났을까.
어쩌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났는지 모른다.
최치우는 우라노스와의 대혈전을 끝없이 반복하며 곱씹었다.
단순히 사라진 소울 스톤의 행방을 기억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우라노스와 싸우며 최치우의 전투력은 한 단계 도약했다.
무공과 마법의 조화에 과학까지 더하며 완전히 새로운 싸움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의 전투력을 100%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복기(復棋)가 필수다.
매번 우라노스 같은 괴물과 실전을 벌일 수는 없다.
경험을 바탕으로 시뮬레이션 훈련을 계속하면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섬광이 번쩍인 그 순간!’
최치우가 눈을 떴다.
그는 전용기에 탑승한 이후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충격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우라노스가 소멸하며 발생한 섬광이… 내 온몸을 덮었어. 그리고 역류가 일어나 수면으로 올라갔고.’
최치우는 자신이 놓치고 있던 한 조각의 퍼즐을 찾았다.
물의 정령왕 우라노스는 그냥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
캄캄한 바닷속을 밝히는 엄청난 섬광을 발산했는데, 그 빛의 정수가 최치우의 몸을 감쌌다.
찰나에 불과하지만 우라노스의 에너지가 최치우에게 스며든 것이다.
최치우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물의 정령왕은 소울 스톤 대신 에너지 자체가 되어 부서졌다.
그 순간을 온전히 누린 최치우 안에 우라노스의 힘이 담겼을 것이다.
‘찾아내야 한다.’
최치우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비밀을 깨달았다.
정령왕은 다른 정령들처럼 소울 스톤을 남기지 않는다.
우라노스를 소멸시킨 당사자, 최치우가 그 힘의 파편을 전수받은 셈이다.
아직은 우라노스의 에너지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단서가 있을 것이다.
최치우는 자신 안에 깃든 우라노스의 에너지를 그리며 또 눈을 감았다.
마법과 무공, 과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령왕의 힘까지 쓸 수 있게 되면 무서울 것이 없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날아가는 14시간 동안 최치우는 몇 배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유은서에 대한 걱정을 억누른 최치우가 곧 뉴욕에 도착한다.
만약 그가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펜타곤이 유은서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
세계의 수도라 불리는 뉴욕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수도 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폭풍의 눈 최치우가 올림푸스 전용기를 타고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
쿠구궁-
철문이 열렸다.
맨해튼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 뉴욕 북부 브롱스(Bronx)에 위치한 폐공장 안으로 창백한 피부를 자랑하는 남자가 들어왔다.
공장을 지키고 있던 건장한 남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는 자신을 향한 인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오만한 걸음걸이와 태도.
핏줄부터 다르다는 듯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과 차가운 눈빛.
귀족 벰파이어를 연상시키는 남자는 바로 에릭 한센이다.
뉴욕의 금융가를 주름잡는 그가 브롱스의 폐공장까지 온 이유는 하나뿐이다.
에릭 한센의 조직원들이 납치한 사람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은서 유. UN의 햇병아리 주제에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습니다.”
에릭은 의자에 묶여 있는 유은서를 쳐다봤다.
우버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납치당한 그녀가 에릭을 노려봤다.
유은서는 저항하는 과정에서 뺨을 몇 대 맞았는지 얼굴에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 특별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에릭의 한마디에 유은서의 목숨이 달렸다.
“누구의 사주로 발칙한 조사를 했는지 묻고 싶지만, 더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에릭이 고개를 숙여 유은서의 코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이 세상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너무 완벽했고, 그에 반해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피부와 푸른 눈동자는 기괴할 지경이었다.
에릭 한센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대체 너 따위가 뭐라고 펜타곤이 나서서 뉴욕 시내를 뒤집고 다니는지……. 그것부터 말해봅시다.”
“펜타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유은서는 에릭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스윽-
에릭이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의 얼굴에 기계처럼 냉소적인 웃음이 번졌다.
“UN의 말단 직원을 구하기 위해 펜타곤이 움직일 일은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일이에요.”
꽈악!
그 순간, 에릭이 손을 뻗어 유은서의 목을 움켜쥐었다.
“말장난 하지 맙시다, 은서 유. 지금 당장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에릭은 차분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죽음을 이야기했다.
단순한 협박은 아니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히는 걸 겁내지 않는다.
하지만 유은서는 더 지혜로웠다.
“펜타곤이 나를 찾는다고 했죠? 만약 내가 잘못되면… 펜타곤이 책임을 물을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그녀가 에릭 한센의 정곡을 찔렀다.
펜타곤이 움직이는 걸 알아차린 이상, 에릭도 유은서를 UN의 말단 직원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만은 없다.
괜히 펜타곤과 얽혀서 뒷일을 크게 만들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유은서의 목을 움켜쥔 에릭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래는 쓸데없는 뒷조사를 한 UN 직원을 가볍게 손봐줄 생각이었다.
배후가 있다면 캐내서 협박과 회유로 조사를 무마시키면 끝났을 일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일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처억.
에릭은 손을 거두고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펜타곤의 어느 라인이 움직였는지 알아보세요. 그리고 펜타곤을 나서게 만든 저 여자의 모든 정보도 남김없이.”
유은서는 꽁꽁 묶인 다리가 저절로 떨리는 걸 느꼈다.
태어나 경험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겁먹으면 안 돼. 그럼 얕보이게 될 거야. 정신 차리자, 유은서. 치우가 도와줄 거야. 치우가…….’
유은서가 내면의 용기를 끄집어내는 사이, 에릭은 부하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의외의 장소에서 최치우와 에릭 한센이 재회하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