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89화 (189/243)

# 189

<메시지>

타닥, 타다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뉴욕 UN 본부는 언제나 바쁘다.

국제적인 세미나와 행사가 매일 열리고, 직원들 역시 저마다 맡은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많은 대학생들이 UN에서 일하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UN이 얼마나 강도 높은 업무량을 소화하는 터프한 직장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은서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세계 정부로 불리는 UN에 입사했을 때, 그녀는 꿈같은 나날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세계를 누비며 기아를 퇴치하고, 글로벌 리더들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내는 직업.

그렇게 보면 UN은 참 매력적인 직장이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글로벌 리더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고 세계 곳곳의 부조리를 찾아내기 위해 누군가는 엄청난 양의 일을 떠맡아야 한다.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에 배정되어 몇 달을 고생한 끝에 유은서는 UN의 업무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입술을 앙다물고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시킨 그녀는 어엿한 커리어 우먼이 다 됐다.

그런데 한참 일을 하던 유은서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니터를 노려보는 것이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한국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가 프린트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문제의 화면이 몇 장의 종이로 인쇄됐다.

유은서는 종이를 들고 사무실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은서? 무슨 일이에요?”

갈색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의 여인이 유은서를 쳐다봤다.

유은서는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의 총괄 간사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제가 이상한 흐름을 발견해서요.”

“이상한 흐름?”

“네, 혼자서는 판단하기 어려워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바쁘신 걸 알지만, 괜찮으시면 한 번만 봐주시겠어요?”

“좋아요.”

총괄 간사인 캐서린은 뿔테 안경을 벗고 유은서가 내민 종이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렇게 30초 정도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캐서린의 자리 앞에 서 있는 유은서에겐 30초가 무척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상사에게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은서, 아주 잘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자금 흐름이 이상해 보이네요.”

“정말요?”

“그래요. 예리한 시각이에요. 하지만 이 페이퍼만 보고 불법적인 거래가 일어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네.”

“업무를 다 보고, 여력이 남는다면……. 더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게요. 추가로 수상한 징후가 포착되면 다시 보고해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유은서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어쨌든 어려운 상사인 캐서린에게 인정을 받은 셈이다.

적어도 완전히 무의미한 헛발질을 한 것은 아니었다.

유은서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각오를 다졌다.

‘힘들겠지만 꼭 더 찾아봐야지.’

수동적인 자세로는 UN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기 힘들다.

특히 그녀는 최치우라는 역사에서 두 번 나오기 힘든 불세출의 기린아(麒麟兒)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렇기에 자신도 UN에서 제 몫을 하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

그런데 유은서의 보고를 받은 캐서린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시 뿔테 안경을 쓴 캐서린이 유은서의 뒷모습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안경에 가렸지만, 마치 큰 실수를 저지른 부하 직원을 노려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방금 전 보고를 받고 칭찬을 해준 것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달라진 분위기다.

UN의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

세계의 금융 거래를 감독하는 기관에서 예상치 못한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필이면 유은서가 그 바람의 중심에 서게 된 것 같았다.

***

늦은 밤, 뉴욕의 UN 본부 건물에도 하나둘 불이 꺼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이 켜진 사무실도 적지 않았다.

UN이라고 해서 야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프로젝트 또는 외국과의 시차 때문에 야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녁이 있는 삶은 대부분 유럽 스타일이다.

북유럽이나 서유럽에서는 야근을 최대한 기피한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특히 뉴욕과 같은 동부에서는 야근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은서, 퇴근 안 해?”

“난 괜찮아. 내일 봐, 제인!”

“오케이. 너무 늦지 않게 우버 불러서 들어가.”

“응, 고마워!”

유은서는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 사무실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됐다.

그녀와 함께 야근을 하던 동료 제인도 가방을 들고 나갔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10시를 넘어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니터를 쳐다보는 유은서의 눈빛은 생생했다.

야근에 찌들어 지친 얼굴이 아니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일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어진 업무를 마치고, 자발적으로 사무실에 남아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

상사인 캐서린에게 허락도 받았다.

타다닥, 타다다닥!

유은서 혼자 남은 사무실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UN 소속이면 열람할 수 있는 자료가 적지 않다.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는 UN에서도 끗발이 강한 곳이다.

공식적인 금융 거래 정보는 물론이고, 비공개 정보도 꽤 많이 볼 수 있다.

유은서는 본인이 열람할 수 있는 정보를 이용해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순수한 금융 거래 정보 자체는 무의미한 숫자와 문서일 뿐이다.

그러나 정보와 정보를 잘 조합하면 숨겨진 진실이 드러난다.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금융 거래가 사실 특정 회사를 밀어주기 위한 작전일 수도 있다.

시차를 두고 유럽과 남미에서 확정된 인수 합병이 탈세나 자금 세탁의 도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UN의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 직원들은 개인 주식 거래를 할 수 없다.

너무 많은 금융 정보를 알게 되기 때문에 강력한 규제를 적용받는다.

그래도 차명으로 투자를 할 수 있지만, 만약 적발되면 퇴사는 기본이고 거액의 민사 소송을 각오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위험한 업무를 하는 셈이다.

“찾았어!”

그때 유은서가 허리를 쫙 펴며 목소리를 높였다.

맞춰지지 않았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급히 프린트 버튼을 누르며 어렵게 만든 자료를 인쇄했다.

“이거면 충분해.”

유은서는 프린트에서 나온 A4 종이를 손에 들고 감격스러워 했다.

1주일 넘게 혼자 끙끙거리며 용을 쓴 보람이 느껴졌다.

“엄청난 규모의 탈세와 돈세탁이 실행되고 있었어…….”

유은서의 혼잣말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녀는 최근 독일에서 발생한 금융 거래 내역을 살펴보다 이상한 점을 찾았다.

몇몇 회사들이 급하게 자산을 매각하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으로 송금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금융 거래다.

하지만 얼마 뒤 북유럽 국가에서 거액의 자금이 버진 아일랜드로 들어갔다.

버진 아일랜드는 대표적인 조세 회피처다.

수상한 낌새를 포착한 유은서는 마지막 단서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어차피 자금의 최종 목적지는 버진 아일랜드가 아닐 것이다.

독일, 북유럽, 버진 아일랜드를 거친 자금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최초로 독일에서 발생한 자금과 비슷한 액수가 특정 국가에 쏠리는 순간을 잡아내면 된다.

물론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눈이 빠져라 주요 국가의 금융 거래 내역을 살펴보며 일일이 검토를 해야만 하는 고강도 업무다.

100억, 아니 1,000억 이상의 금융 거래도 하루에 수백 수천 건 이상 발생한다.

유은서는 그 많은 기록을 검토하며 직관까지 발휘해 퍼즐을 맞췄다.

신참 직원이 해냈다고 믿기엔 너무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빨갛게 상기된 유은서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해 보였다.

만약 UN에서 정식으로 조사를 하고, 탈세나 자금 세탁을 막아낸다면 엄청난 성과다.

그녀는 성과를 내서 빨리 승진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최치우.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를 놀라게 만드는,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남자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UN에 들어온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 자신도 작게나마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목표였다.

그때가 되면 최치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대학생 시절과는 뭔가 달라질 것 같았다.

“할 수 있어. 아니, 해냈어.”

유은서는 자신을 칭찬하며 짐을 챙겼다.

막판 스퍼트를 내느라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그래도 피곤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 일찍 출근해 캐서린에게 자료를 보여줄 생각을 하니 피로가 쫙 풀렸다.

하지만 유은서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의도치 않게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 안에 얼마나 무서운 진실이 담겨 있는지.

바로 그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심지어 UN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윽-

행복한 표정으로 뒤늦게 퇴근한 유은서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최치우에게 메시지라도 보내볼까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중에… 일이 잘 되면 그때 말해야지. 조금만 더 참자.”

다시 폰을 집어넣은 유은서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화려한 도시 뉴욕의 이면에 자리 잡은 어둠이 금방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

유은서는 공들여 만든 자료를 캐서린에게 전달했다.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의 총괄 간사인 캐서린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실력자다.

유은서의 보고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캐서린은 앞에서는 유은서를 칭찬하고 격려했다.

그런데 상부에 보고를 하고, 치밀하게 검토를 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주일이 지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유은서는 용기를 내 캐서린에게 경과를 물어봤지만, 돌아온 건 싸늘한 대답뿐이었다.

“은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여기는 UN이에요, UN. 순서를 기다리는 다급한 프로젝트가 끝도 없이 쌓여 있는 곳이죠. 상부에 보고를 올렸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상부에서 우리가 모르게 조사를 진행할 수도 있겠죠.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요?”

“그렇지만… 제가 정말 열심히 조사해서 확실한 증거까지 잡아냈는데…….”

“그걸 판단하는 건 은서가 아니라 감시 위원님들의 역할이 아닐까요? 열의를 보이는 건 좋지만, 본인이 역할에 더 집중해 줬으면 좋겠네요. 이건 은서의 상사로서 진지하게 하는 충고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캐서린의 태도는 1주일 전과 천지차이였다.

평범한 회사로 따지면 유은서는 신입사원이고, 캐서린은 과장이나 차장급 베테랑이다.

캐서린이 냉랭하게 철벽을 치면 유은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유은서는 실망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왔다.

캐서린의 말처럼 상부에서 검토를 하고, 자체 조사에 들어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유은서는 누군가 자신을 쫓아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출근길과 퇴근길에서 뒤통수가 따가워 고개를 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혼자 사는 아파트에 누가 들어왔다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필이면 캐서린에게 보고를 올린 그즈음부터 이상한 일들이 생겼다.

유은서가 난데없이 신경과민 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낯선 도시인 뉴욕에 혼자 살면서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다.

다시 찾아온 퇴근길, 유은서는 콜택시와 비슷한 우버 서비스를 이용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버는 운전기사의 정보가 뜨기 때문에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다.

흠칫-!

자동차 뒷좌석 쿠션에 몸을 파묻던 그녀는 갑자기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백미러를 통해 스치듯 쳐다본 운전기사의 얼굴이 우버에 뜬 정보 사진과 달랐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신경을 쓰지도 않았겠지만, 최근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기에 달라진 얼굴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사가… 바뀌었어!’

유은서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놀란 티를 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침착하게 폰을 꺼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보는 것처럼 위장해야 한다.

‘단순히 다른 기사가 대신 운전을 하는 걸까? 아니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최치우였다.

유은서는 911에 신고를 하기 전, 최치우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치우야, 도와줘.]

간절한 바람과 그리움을 담은 메시지가 뉴욕에서 서울로 전송됐다.

유은서의 메시지로 인한 파장이 얼마나 클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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