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물의 정령왕>
“긴급 속보입니다. 독도 인근 동해의 이상 기류로 우리 정부의 연구선 한 척이 조난을 당했습니다. 현재 선원과 연구원을 포함해 총 12명이 실종 상태입니다. 심각한 기상 악화로 구조대가 출동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울릉도 현장의 김대기 기자, 연결해 보겠습니다!”
뉴스 앵커가 다급한 목소리로 현장 기자를 연결했다.
울릉도 선착장의 기자는 무척 심각한 얼굴이었다.
12명의 실종은 보통 사고가 아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겨울 동해에 빠지면 금방 저체온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구조대도 출동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모두 사망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화면에 잡힌 울릉도의 날씨는 너무 좋았다.
하늘에 비는커녕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바람도 강하게 불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울릉도 날씨가 이렇게 평온한데 독도 인근 해역에서만 난리가 난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뉴스 앵커도 그 부분을 질문했다.
“김대기 기자, 지금 보기로 울릉도의 기상 상황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조대가 출동하기 어렵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선착장에서 구조선이 출항해도 사고 인근 해역 근처로 진입이 어렵다고 합니다. 때때로 파도의 높이가 7m 이상 치솟기도 합니다. 강풍 역시 심각해 헬기의 실종자 탐색 작업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우리 정부의 시추 기계가 건설되어 있지 않습니까?”
“독도의 해저 가스를 채취하는 시추 기계도 고립됐습니다. 현재 시추 기계에 스무 명 가량의 연구원이 남아 있는 걸로 파악이 됐습니다. 기상 악화가 계속되면 식량과 식수의 부족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군요. 알겠습니다. 현장의 김대기 기자였습니다.”
뉴스를 보는 국민들도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최치우는 묵호에서 울릉도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뉴스를 봤다.
겨울에 울릉도로 떠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기에 배의 객실 내부는 휑하게 비어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승객들은 하나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울릉도에는 별일이 없지만, 국가적 재난 사고가 또다시 발생했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특정 지역에만 발생한 자연 재해. 이 정도의 파괴력이면…… 정령왕이 틀림없어.’
정령왕은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는 특별한 존재다.
최상급 정령들도 인격을 지니지만, 모두 똑같은 이름을 사용한다.
그에 반해 정령왕은 단 하나밖에 없는 이름을 스스로 결정한다.
만약 정령왕이 소멸하면 어떻게 될까.
아슬란 대륙의 오랜 역사에 몇몇 기록이 남아 있다.
정령왕이 소멸하면 해당 속성의 정령들은 꽤 오랜 기간 활동을 멈춘다.
덕분에 정령으로 인한 재해와 이상 현상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물의 정령왕이 소멸하면 수난(水難)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대신 불의 정령이나 대지의 정령 등 다른 속성의 정령들은 더더욱 활개 치게 된다.
그만큼 자연의 균형은 깨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일이 그렇듯 정령왕의 소멸에도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최상급 정령 중 특별한 힘을 얻은 존재가 새로운 정령왕이 된다.
최치우는 정령왕의 소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의 정령왕을 그대로 놔두면 독도의 바다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정령왕은 노골적으로 최치우를 부르고 있었다.
이미 운딘의 경고까지 받았던 최치우가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보면 최치우 때문에 가스 사업단 연구원들이 피해를 입었다.
12명이나 실종된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은 지금의 최치우를 있게 만든 첫 번째 프로젝트다.
가시적인 성과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정령왕의 난동으로 자칫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반드시 막아야 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최치우는 주먹을 꽉 쥐며 각오를 다졌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는 정령 헌터가 됐다.
정령은 자연의 균형을 수호하는 역할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재난을 일으키는 천덕꾸러기다.
그래서 정령을 소멸시키고, 소울 스톤으로 친환경 대체에너지 개발을 시작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은 최치우 스스로 책임지는 수밖에 없다.
‘제발 더 큰 피해만 없기를…….’
최치우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묵호에서 울릉도로 향하는 바닷길은 잠잠했다.
그런데 같은 동해에서 해일 수준의 파도가 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최치우의 존재 자체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상식으로, 또 과학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사건이 꽤 자주 벌어진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넘어갈 뿐이다.
최치우는 세상의 이면에 도사리는 미스터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7번의 환생을 마친 최치우가 바로 미스터리의 화신이기도 하다.
그를 태운 여객선이 곧 울릉도에 도착한다.
지구 역사에서 최초로 인간과 정령왕이 싸우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대표님-!”
우렁찬 목소리가 선착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지만 평소처럼 호탕한 기운이 느껴지진 않았다.
최치우를 부르며 달려온 정기석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오시고, 이 고마움을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십니다.”
“당연한 일이죠.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일단 뒤집힌 배는 레이더로 위치를 찾았십니다. 나중에 인양을 할지 말지는 정부 결정이고, 실종자들은…….”
정기석이 말을 잇지 못했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았다.
남자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기석이지만, 아끼는 후배들을 잃은 슬픔은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우선 수습부터 해야 합니다. 슬픔은 그 뒤에 함께 나누겠습니다.”
최치우는 어른스럽게 정기석을 위로했다.
아직 사고는 끝나지 않았다.
파도가 잦아들지 않으면 시추 기계에 고립된 연구원들도 위험해진다.
2일을 견딜 수 있는 식수와 비상식량이 떨어지면 하루하루가 위기다.
12명을 안타깝게 잃었지만, 남은 20명은 지켜야 한다.
최치우는 정기석을 쳐다보고 위험한 제안을 했다.
“단장님, 내일 아침 일찍 구조선 한 척만 움직이게 해주세요.”
“구조선을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지만…… 사고 해역이나 시추 기계로 접근이 어렵십니다.”
“괜찮습니다. 문제의 해역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면 됩니다. 무리하게 풍랑을 뚫고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바다에서 현장을 직접 보셔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십니다. 대표님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조금 기다리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최치우는 정기석을 설득해야 했다.
독도의 바다로 나가서 정령왕과 싸우면 파도가 잠잠해질 거란 말을 할 순 없다.
그랬다간 아무리 최치우를 존경하는 정기석이라도 정신병원에 신고를 할 것이다.
“올림푸스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장치가 있습니다. 자연재해를 해소하는 특수 장비인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실험을 해보려 합니다.”
“정말 그런 게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소식을 듣자마자 울릉도로 내려온 겁니다. 저를 믿고 배 한 척만 빌려주십시오, 단장님. 더 이상 누구도 다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최치우의 호소가 정기석 단장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더군다나 최치우는 특별한 기술력으로 100조 가치의 회사를 이뤄낸 장본인이다.
올림푸스가 자연 재해를 해소하는 장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았다.
다른 회사라면 몰라도 올림푸스는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짓는 곳이다.
신개념 해독제 프로메테우스는 또 어떤가.
발명하여 내놓는 것마다 세계를 놀라게 한 회사인 올림푸스의 주인이 눈앞에 서 있다.
정기석은 이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알겠십니다. 최 대표님이 말씀하신 지푸라기, 저도 같이 잡아보겠십니다.”
“출항은 내일 오전 7시로 하겠습니다. 배를 조종하는 선원 말고 다른 인력은 필요 없습니다.”
“준비 단디 해두겠십니다.”
“오늘은 사고 해역 좌표와 기상 데이터를 분석해보죠.”
최치우는 능숙하게 리더십을 발휘했다.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정기석도 최치우를 만나고 안정을 되찾았다.
진짜 리더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최치우는 운이 좋아서, 혹은 다른 차원에서의 경험 때문에 100조 기업을 만든 게 아니었다.
강인한 영혼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리더십, 그게 최치우를 26살의 글로벌 대기업 오너로 만든 원동력이다.
최치우는 목숨을 걸고 독도와 동해를 위기에서 구해낼 것이다.
정기석과 나란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커다란 산처럼 느껴졌다.
***
아침이 밝았다.
최치우는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른 존재도 아닌 정령왕과 바다 한복판에서 싸워야 되기 때문이다.
최상급 물의 정령 아도니스와의 전투도 치열했었다.
한 끗만 실수해도 목숨을 잃는 것은 최치우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도니스보다 더 강한 정령왕과 땅이 아닌 바다에서 부딪치게 생겼다.
부담을 느껴 잠을 설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최치우는 운기조식으로 온몸의 긴장을 풀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1%가 아닌 0.1%의 차이로 생사가 갈릴 것이다.
그렇기에 컨디션 관리는 필수였다.
‘그때의 내가 아니다.’
단단해 보이는 구조선에 몸을 실은 최치우가 스스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최치우는 베네수엘라에서 아도니스와 싸울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7서클 마법의 벽을 넘었을 뿐 아니라 완벽하게 익숙해졌다.
무공과 마법을 조화시키는 최치우만의 창의적인 전투도 물이 올랐다.
과거에는 방어적인 금강나한권이 무공의 전부였지만, 이제는 패도적 살초로 가득한 권왕의 아랑권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다.
펜타곤과 함께 만든 미쓰릴 필드라는 희대의 발명품은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
그야말로 정령왕과 싸우기 위한 최적의 준비를 탄탄하게 해온 셈이다.
마치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대표님, 첫째도 몸조심! 둘째도 몸조심! 무사히 돌아오실 거라 믿고 있겠십니다!”
기어코 배를 타는 순간까지 배웅을 나온 정기석이 목소리를 높였다.
최치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정기석은 선착장에 서서 계속 손을 흔들었다.
최치우는 순간 지구를 구하러 떠나는 영화 속 슈퍼 히어로가 된 기분이 들었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정기석의 진지한 모습 덕에 웃음이 나왔다.
뿌우우우-
구조선이 경적을 울리며 선착장을 떠나 동해로 나아갔다.
배를 움직이는 선원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사고 해역에서는 여전히 미친 듯이 바람이 불고, 해일 수준의 파도가 모든 선박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그런데 최치우 때문에 사고 해역 근처로 항해를 하게 된 것이다.
혹시라도 해류에 휩쓸릴까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치우는 다시 한번 선원들을 안심시키며 당부의 말을 전했다.
“어제 말한 것처럼 위험한 지역까지 무리해서 들어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육안으로 사고 해역을 볼 수 있는 경계선에서 멈춰주세요. 그리고 제가 올림푸스의 특수 장비를 쓰는 동안 모두 지하 객실에서 기다려주면 됩니다. 절대 여러분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확신에 찬 최치우의 음성이 선원들을 안정시켰다.
최치우는 선원들이 배를 세우고 지하로 내려가면 바다에 뛰어들 작정이었다.
사고 해역 근처에서 마법을 펼치면 물의 정령왕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미친 바다.
울릉도에서 출발한 구조선은 1시간 30분이면 사고 해역 근처에 다다를 예정이다.
최치우는 폭풍의 중심에서 일생일대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