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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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는 예정보다 일찍 제우스 파크를 빠져나왔다.
오프닝 행사가 성대하게 마무리됐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파티를 즐기고 있어 아무런 차질이 없었다.
검은색 리무진을 타고 호텔로 돌아온 최치우는 간단히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뉴욕에서 머무는 호텔 옥상은 아무나 출입 할 수 없는 라운지로 유명했다.
스위트룸 이상 투숙하거나 멤버십 카드를 가진 사람만 루프탑 라운지 입장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프라이버시를 지키며 훨씬 여유롭게 맨해튼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최치우는 호텔에서 가장 비싼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투숙하는 손님이고, 동시에 가입비만 10만 달러인 멤버십 카드를 가지고 있다.
딩동-
전용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에 멈췄다.
라운지 입구를 지키는 직원들은 최치우의 얼굴을 바로 알아봤다.
최치우는 세계 어디에서도 명함이 필요 없었다.
특히 자주 방문하는 뉴욕에서는 얼굴이 곧 명함이다.
“예약석으로 모시겠습니다.”
헐리웃 배우처럼 턱시도를 빼입은 호텔 직원이 정중하게 말했다.
최치우는 뉴욕에서 가장 비싼 호텔의 초특급 VIP 손님이다.
만약 그가 다른 호텔로 거래처를 옮기면 타격이 크다.
단순히 투숙비 문제가 아니었다.
올림푸스 최치우가 선택한 호텔이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홍보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라운지 안쪽의 특실은 최치우를 위해 예약이 돼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외부와 차단된 특별한 공간이 펼쳐진다.
호화로운 인테리어는 부수적이다.
유리벽 너머로 맨해튼의 야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환상적인 뷰가 특실의 장점이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독립된 공간에서 이만한 야경을 보기 어렵다.
특히 모든 게 과하게 비싼 맨해튼에서는.
하지만 최치우는 원하면 언제든 이곳을 독점할 수 있다.
“오래 기다렸지?”
최치우가 입을 열었다.
라운지 특실에 먼저 도착해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을 감상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야, 일찍 왔네.”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짓는 그녀는 역시 유은서였다.
최치우는 유은서에게 멤버십 카드를 주고,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오프닝 파티가 열린 제우스 파크에서는 길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뉴욕 어디를 가도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장소가 아무나 올 수 없는 호텔의 루프탑 라운지 특실이었다.
시차를 두고 입장하면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게다가 돈 주고도 못 보는 야경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패키지다.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아꼈다.
어쩌면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샴페인, 치즈, 과일은 테이블에 놓여 있었고 음악과 경치도 완벽하다.
이대로 침묵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결국 최치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3년, 아니 4년만인가?”
“그러게, 시간이 참 빠른 거 같아.”
“UN에서 일한다는 소식은 들었어. 축하해.”
“축하는 내가 해야지. 그사이 치우 넌… 정말 쳐다보기도 힘든 사람이 됐잖아. 항상 뉴스로 소식 보고 있었어.”
최치우는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유은서의 칭찬은 특별했다.
유은서는 올림푸스를 세우기 전, 그야말로 평범한 대학생 시절 만났던 여자 친구다.
남자는 인정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 세계에서 첫사랑이라 할 수 있는 유은서의 진심 어린 칭찬은 최치우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독일 총리나 한국 대통령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보다 더 좋은 기분이 들었다.
“다 지나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교환학생을 선택하길 참 잘했던 거 같아.”
유은서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예전보다 성숙하고 세련된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큰 눈동자에서 묻어나오는 귀여움은 그대로였다.
최치우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교환학생을 간다고 해서 놀랐었지.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갈 줄 몰랐지만.”
“그때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점점 바빠지는 널 보며 난 계속 초라해졌을 거야. 짐이 될 수밖에 없었을 걸.”
“짐이라니? 사람 사이에 그런 게 어딨다고.”
“아냐. 오늘 널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내가 UN에서 일하며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야. 예전처럼 학생이었다면 다시 만나기 힘들었을 거 같아.”
“나는 그대로인데.”
“너 잘못이란 말은 절대 아닌 거 알지? 너한테 어울리는, 아니 어울렸던 사람이고 싶어서 그래. 전 세계가 다 아는 올림푸스 최치우의 예전 여자 친구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면 안 되잖아.”
유은서는 부끄러운 듯 말을 마치고 고개를 내리깔았다.
최치우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지금 넌 완전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됐으니까.”
“항상 너를 생각하면서… 독하게 공부했어.”
유은서의 새하얀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술을 거의 마시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최치우는 웃음을 삼키며 질문을 던졌다.
“UN에서는 무슨 일을 해?”
“국제 금융 감시 위원회에서 일하게 됐어.”
“이름만 들어도 어려운 일 같은데.”
“아직 신입이라 배우는 단계야. 한참 멀었지.”
“그래도 대단하다. UN에서 세계를 위해 일을 하는 거니까.”
최치우의 칭찬에 유은서가 활짝 웃었다.
꽃처럼 피어나는 미소를 드러낸 그녀는 금방 표정을 숨겼다.
너무 티나게 좋아해서 쑥쓰러운 것 같았다.
“치우야, 너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그동안 UN에 들어오려고 고생했던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어.”
“축하주 한잔 살게.”
최치우는 테이블 위의 샴페인을 가볍게 터트렸다.
당장 유은서와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지난 몇 년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더구나 최치우는 그녀와 헤어졌을 때보다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바빠졌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최치우와 유은서 둘 다 설렘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억지로 조바심을 내지 않고, 물 흐르는 대로 자연스레 놔두면 어떻게든 결론이 날 것이다.
오늘은 그저 순간에 충실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서울에는 자주 못 오겠네.”
“일이 좀 익숙해지면 여름하고 겨울에는 부모님 만나러 들어가야지.”
“내가 뉴욕에 종종 오니까, 연락할게.”
“난 언제든 환영이야. 일은 많지만, 여기엔 아직 친구도 별로 없어서.”
술이 한 잔, 두 잔 오가고 최치우와 유은서는 앞으로도 연락을 주고받기로 약속했다.
우선 그 정도로 충분하다.
맨해튼에서 첫 번째 제우스 파크 오픈 행사를 마친 날, 최치우는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았다.
다시 이어진 과거의 인연이 또 어떤 사건을 만들어낼지 아직은 두 사람 모두 알 수 없었다.
***
베를린과 런던에서의 오픈 행사도 성황리에 끝이 났다.
퓨처 모터스의 전기차 제우스 S는 특히 베를린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독일은 자동차의 본고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국민들 역시 벤츠, BMW 등 자기 나라 자동차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그렇기에 더더욱 제우스 S를 유심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퓨처 모터스는 해외 자동차 브랜드 중 최초로 독일에서 전기차 보조금을 획득했다.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짓는 대가지만, 어쨌든 최초는 최초다.
독일 정부에서도 퓨처 모터스의 기술력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아직까지 메르세데스-벤츠조차 제우스 S 같은 수준의 럭셔리 전기차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면 자동차 시장의 주도권이 넘어갈지 모른다.
그러한 불안감이 독일 사람들의 호기심을 강력하게 자극한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최치우의 인기 덕도 크게 봤다.
뉴욕이나 런던에서도 최치우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존재였다.
하지만 베를린에서는 그의 위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라이프치히에 소울 스톤 발전소를 건설하고, 불행한 테러 사건까지 독일 정부와 함께 이겨낸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 사람들은 최치우를 다른 나라 사람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가 테러 희생자 유족들을 얼마나 극진히 보살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소울 스톤 발전소 현장 옆에 세운 추모 기념비는 독일인들의 차가운 마음마저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베를린의 제우스 파크 행사에 대한 독일 언론의 반응은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사실 퓨처 모터스의 홍보팀은 독일에서 안 좋은 기사들이 많을 거라 걱정했었다.
자국 브랜드를 보호하기 위해 더 날카로운 시각으로 전기차 제우스 S의 문제점을 지적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최치우가 미리 쌓아놓은 인덕의 힘을 톡톡히 본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씨앗을 잘 뿌려놓으면 언제 어디서 열매를 맺을지 모른다.
만약 최치우가 라이프치히 테러의 희생자들을 지극정성으로 챙기지 않았다면, 계약서 내용대로 모든 책임을 독일 정부에게 돌렸다면 어땠을까.
그때 당시 들어가는 돈은 적었겠지만 지금처럼 독일 여론이 우호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최치우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적립한 셈이었다.
눈앞의 이익만 따지는 사람은 절대 큰그림을 그릴 수 없다.
멀리 보는 사람은 당장의 손실도 감수한다.
최치우의 철학과 경험은 베를린 행사에서 제대로 증명이 됐다.
독일의 교통부 장관이 직접 참석해 자리를 빛내줄 정도였다.
올림푸스의 전용기는 월드 투어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홍콩으로 날아갔다.
최치우와 임동혁, 그리고 브라이언도 전용기 안에서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지난 세 번의 오픈 행사를 자축하고, 홍콩 행사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기에 전용기는 완벽한 장소다.
하늘 위의 요새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된다.
오직 올림푸스만을 위한 비행기이기 때문이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참을 먹고 마시며 즐겁게 떠들던 임동혁이 불현듯 뭔가 생각난 눈치였다.
“뭔가요?”
“아침 일찍 홍보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홍콩 행사에 신임 대통령께서 참석할 의향을 밝혔습니다.”
“정제국 대통령이?”
최치우는 그렇게 크게 놀라지 않았다.
지난 12월, 그가 라이프치히의 테러를 해결하는 동안 한국에서는 대선이 열렸다.
결과는 모두 예상한 그대로였다.
최치우가 유경민을 몰락시켰기 때문에 야당 잠룡 정제국이 청와대로 입성했다.
그는 최치우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
대선 후보 시절에도 틈만 나면 빚을 갚겠다고 말했다.
“1월이면 신임 대통령의 업무가 과중한 타이밍일 텐데.”
“마침 홍콩에서 한중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일정이 맞아서 우리 행사에도 참석하려는 것 같습니다.”
“신임 대통령이 외국에서 열리는 제우스 파크 행사에 참석하면 우리야 나쁠 게 없죠. 홍보도 되고, 한국 정부에서 힘을 실어주는 사인을 줄 테니.”
“그럼 청와대에도 오케이 사인을 주겠습니다.”
“그럽시다. 정 의원, 아니 이제 대통령이군. 정제국 대통령이 자기 입으로 한 말을 지키고 싶은가 봅니다.”
최치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올림푸스는 전임 대통령 유영조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았었다.
그리고 정권 교체가 됐지만, 신임 대통령 정제국은 노골적으로 최치우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한다.
나쁠 게 없다.
즐기면 된다.
둘의 대화를 듣는 브라이언만 입을 벌리고 놀랐을 뿐이다.
한국은 세계적인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 나라의 대통령을 하나도 어려워하지 않는, 오히려 장기판의 말로 보는 최치우의 스케일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홍콩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처럼 퓨처 모터스의 질주도 시원하게 이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