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추적자>
너희들은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지만, 현실에서 써도 될 것 같았다.
라이프치히에 테러를 가한 세력은 최치우를 적으로 돌렸다.
최치우는 메르켈 총리에게 3일의 시간을 주며 최후통첩을 남겼다.
네오메이슨이든 I.S든 끝까지 배후를 찾아내 잔혹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했다.
메르켈도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걸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많은 국제 지도자들을 만나본 메르켈의 경험과 눈썰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늘 표정 변화가 없지만, 메르켈처럼 판단력이 좋은 사람도 드물다.
그녀는 최치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또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25살의 나이로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라는 기업을 이룩하고, 그걸로 모자라 100m 달리기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게 가능한 일인가.
최치우는 불가능의 역사를 뒤집으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만약 그가 작정하고 분노의 불길을 휘두르면 감당이 안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3일 안에 원하는 답을 가져오지 못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올림푸스와 독일 정부의 계약은 백지가 될 겁니다. 그다음에 벌어질 일은 미리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마도 불법일 테니까.”
최치우는 독일 정부와 맺은 계약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귀책 사유는 독일에게 있다.
외부적 요인에 의한 사고의 책임은 100% 독일 정부가 진다고 계약서에 명시 돼 있기 때문이다.
“불법이라면…….”
“저는 항상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었습니다. 더 이상 궁금해하지 마십시오, 총리님.”
최치우는 허풍을 떠는 게 아니었다.
진지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뿐이다.
다만 그 내용이 독일 총리마저 긴장시킬 정도였다.
“최 대표님, 한국에서 한 걸음에 달려올 만큼 화가 났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독일은 2차 대전과 통일 이후 별도의 정보기관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3일 안에 테러의 배후를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메르켈은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설득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범국이 된 독일은 매사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서독 주도의 통일 이후 동독의 정보기관과 특수부대도 모조리 철폐했다.
오늘날 독일이 누리는 지위는 경제적 성장 덕분에 얻은 과실이다.
그렇기에 안보와 정보에서 앞서는 영국, 프랑스는 틈만 나면 독일이 주도하는 E.U에 딴지를 거는 것이다.
최치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메르켈의 약점을 공략했다.
“영국의 MI6는 이미 배후를 알아냈을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MI6가 우리에게 대가 없이 정보를 줄 리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대가든 MI6에게 주면 되지 않습니까. 독일 정부가 어떤 양보를 하든 관심 밖입니다. 저는 3일 안에 테러의 배후를 확인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래야만 올림푸스와 독일의 계약도, 우리의 동맹 관계도 유지 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깊은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메르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포커 페이스를 지키는 메르켈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만큼 풀기 어려운 숙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살짝 목례를 하고 등을 돌렸다.
문을 열고 나오니 비상 상황실 밖에 독일 장관이며 소방 책임자들이 주르르 서 있었다.
최치우는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독일 당국자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높은 자리일수록 책임도 더 커지는 법이다.
‘내 책임도 외면할 수 없지. 그러니까 내 손으로 바로잡겠다.’
최치우도 크나큰 부담감을 느꼈다.
공사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테러가 일어날 줄은 몰랐다.
군부대를 동원하라고 충고는 했지만, 독일 정부 못지않게 최치우도 상황을 낙관하고 말았다.
‘복수는 3일 뒤에 시작하고, 우선은 사람들부터 챙기자.’
최치우는 진짜로 책임을 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리더들이 말로만 책임을 진다.
하지만 최치우는 행동으로 보여줄 것이다.
사망자 8명과 부상자 13명에게 올림푸스의 이름으로 피해 보상을 해줄 계획이었다.
물론 독일 정부에서 보상책을 마련했고, 보험 회사도 나선다.
따지고 보면 올림푸스가 추가로 피해보상을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최치우의 결심은 확고했다.
누구든 올림푸스의 울타리 안에서 사고를 당했다면 끝까지 책임을 져줄 것이다.
비상 상황실에서 빠져나온 최치우의 다음 행선지는 병원이었다.
사망자의 유족과 부상자들을 직접 만나 사의를 표하고,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최치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핸들을 잡고 엑셀을 밟았다.
독일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르게 될지 모르지만,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을 것 같았다.
***
3일이 지났다.
최치우는 단 하루라도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지난 3일 내내 유족과 부상자 가족을 면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올림푸스 자체적으로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테러를 벌인 세력을 용서할 수 없었다.
최치우는 3일 동안 최악의 시나리오도 대비하고 있었다.
독일 정부와 계약을 파기하고, 독자적으로 복수를 감행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소울 스톤 발전소 계약을 파기하면 그만큼 주가가 낮아지겠지만, 올림푸스는 굳건하다.
100조 가까이 치솟은 현재의 주가에서 조정이 일어나도 큰 타격이 아니다.
아도니스의 소울 스톤을 원하는 정부는 널리고 널렸다.
독일만큼 파격적인 조건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협상 할 상대는 많다.
오히려 심대한 타격은 독일 정부가 입게 될 것이다.
독자적인 복수도 최치우에겐 막막한 미션이 아니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작정하고 돈을 풀면 어나니머스를 비롯해 실제 정보기관도 움직일 수 있다.
일단 정보만 얻으면 뒷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최치우는 일인 군단이다.
혼자 적의 본거지에 침입해 박살을 내버릴 수 있다.
총과 수류탄으로 중무장한 테러리스트들도 최치우 앞에서는 어린 아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작정하고 무공과 마법을 펼치면 펜타곤에도 구멍이 뚫릴지 모른다.
“총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최치우는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라이프치히 시청에 들섰다.
3일 전처럼 막무가내로 비상 상황실까지 달려가진 않았다.
그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었다.
하지만 웬만하면 독일 정부의 절차를 지켜주는 게 낫다.
적어도 아직까지 올림푸스와 독일의 계약은 유효하고,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라이프치히 시청 직원이 최치우를 전담했다.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테러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에 시청 직원들도 연일 비상 근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러면서 무겁고 숙연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안쓰럽기도 했다.
고작 한 명의 미친놈이 벌인 자살 폭탄 테러의 여파는 이토록 컸다.
도시 전체, 아니 나라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누가 그 미친놈을 이용했는지 두고 보자.’
최치우는 수백 번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각오를 다지며 비상 상황실까지 걸어갔다.
메르켈은 약속 시간에 맞춰 최치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일 밤늦게까지 사고 대책을 짜내느라 메르켈 총리도 지쳐 보였다.
“최 대표님.”
“네, 총리님.”
두 사람은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3일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 민감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개인적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다.
최치우와 메르켈은 각각 거대한 기업과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
공적인 결단과 사적인 감정을 구분하는 게 당연한 인물들이다.
“3일이 참 빨리 지나갔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번 테러를 개인의 단독 범행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물론 범인이 I.S의 영향을 받았지만 구체적 지원은 없었던 것으로.”
“독일의 공식 입장은 그렇군요.”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입장이 100% 진실일 확률은 매우 낮다.
그가 원하는 것은 수면 아래 감춰진 진실이다.
메르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최 대표님이 원하는 정보는 MI6로부터 얻었습니다. 영국 정부의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어딥니까? 배후 세력은.”
최치우는 메르켈이 어떤 대가를 지불했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독일 정부의 책임 중 하나일 뿐이다.
과연 MI6가 어떤 정보를 줬는지, 최치우가 궁금한 것은 그 내용이 전부였다.
“프랑스 파리의 I.S 비밀 지부에서 범인을 섭외했고, 폭탄과 차량을 지원했습니다.”
“독일이 아닌 프랑스가 배후라는 말씀이십니까?”
“유럽에서 I.S를 비롯한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나라가 프랑스입니다.”
“네오메이슨의 짓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그것도 확신 할 수는 없습니다. 폭탄을 구입하고, 독일까지 은밀하게 이동시키는 데 적지 않은 자금이 들었을 겁니다. 최근 I.S의 금융자산이 동결됐는데… 테러에 쓰인 돈을 누가 지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파리에 있는 I.S의 비밀 지부를 털면 답이 나오겠죠.”
100% 만족스럽진 않지만 메르켈 총리는 최선을 다했다.
어쨌든 3일 안에 테러의 배후 세력을 알려줬으니 독일과의 동맹을 계속 유지해도 될 것 같았다.
“총리님, 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즉시 발전소 공사를 재개했으면 합니다. 군부대의 현장 경호와 함께.”
“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불행한 사고가 발생했지만, 우리 독일과 올림푸스의 파트너십은 공고하다는 보도 자료를 낼 계획입니다.”
메르켈은 크게 한숨 돌린 표정이었다.
이 상황에서 올림푸스까지 등을 돌리면 벼랑 끝에 몰렸을 것이다.
다행히 소울 스톤 발전소라는 독일의 숙원 사업은 지속하게 됐다.
그러나 최치우의 관심은 여전히 테러의 배후에 집중돼 있었다.
“파리의 I.S 지부에 대한 정보를 모두 주십시오.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MI6에서 받은 원본 파일을 보내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총리님, E.U 또는 프랑스 정부가 I.S의 지부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I.S가 인류 공동의 적이지만… 그렇다고 외국의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독일이, 아니면 영국이 파리에서 작전을 수행하면 국제적인 외교 문제가 될 겁니다.”
“프랑스 정부는 왜 그들을 방치하는 거죠?”
“잘못하면 감당하기 힘든 정치적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특히 파리에서 중동 이민자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확실한 증거 없이 무력을 사용하다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면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머리로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 납득하긴 어려웠다.
정치적인 부담 때문에 테러리스트를 방관해야 하는 세상이라니.
최치우는 후폭풍 따위 염려하지 않았다.
정부가 못 하는 일도 최치우는 해낼 수 있다.
어쩌면 이번 사건 때문에 유럽의 골칫덩이인 I.S 추종 세력이 싹 소탕될지도 모른다.
MI6의 원본 파일을 넘겨받은 최치우는 파리의 특급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했다.
겁도 없이 올림푸스를 공격한 이들에게 재앙을 내려줄 시간이 왔다.
그의 무대가 독일에서 프랑스 파리로 옮겨지고 있었다.
***
메르켈 총리는 듬직한 모습으로 독일 여론을 다독였다.
그녀는 일주일 가까이 라이프치히에서 밤을 지새우며 사고 현장 수습과 피해 보상을 원활하게 마무리 지었다.
올림푸스와 파트너십도 흔들리지 않았음을 공표했다.
이에 화답하듯 올림푸스도 소울 스톤 발전소의 기초 공사를 재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물론 후속 대책으로 독일 군부대가 라이프치히 인근에 상주하며 현장을 지키게 됐다.
주춤거리던 올림푸스의 주가는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메르켈 총리의 지지율도 9% 정도 빠졌지만 최악은 면했다.
크나큰 위기를 겪은 것 치고는 선방을 한 셈이다.
여전히 라이프치히 시내의 분위기는 어두웠지만, 독일의 다른 지역은 점차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도시마다 화려한 장식도 달기 시작했다.
그러나 테러 사건은 이대로 끝난 게 아니었다.
조용히 프랑스 파리로 이동한 최치우라는 복병이 남아 있었다.
최치우는 파리에서 손꼽히는 빈민가인 19구의 뒷골목을 파헤쳤다.
19구의 지역 주민 70% 이상이 불법체류자와 이민자로 알려져 있다.
낭만의 도시 파리는 곳곳에 어두운 그림자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
“%&$^#@*@((#*!”
어둠이 드리운 저녁, 골목 여기저기에서 알아듣기 힘든 아랍어가 울려 퍼졌다.
백인과 동양인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다.
오늘날 파리 19구는 전성기의 뉴욕 할렘보다 훨씬 위험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파리 경찰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최치우는 불법체류자들의 거친 눈빛을 받으면서 성큼성큼 골목을 가로질렀다.
똑똑-
이윽고 그가 허름한 건물의 1층 문을 두드렸다.
겉보기엔 이슬람 음식을 파는 식재료 전문점으로 보였다.
하지만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려도 무반응이었다.
‘1층 안쪽에 다섯 명. 총을 들고 있겠군. 지하실에는 몇 명이 더 있을지 모르고.’
아무리 인기척을 죽여도 최치우의 감각을 속일 순 없다.
계산을 마친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콰아앙!
발길질 한 번에 나무로 만들어진 현관문이 산산조각으로 박살 났다.
경찰도 함부로 못 들어오는 19구에서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