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70화 (170/243)

# 170

***

최치우와 메르켈 총리의 미팅은 공식 일정이 아니다.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만난 게 알려지면 온갖 추측성 기사가 쏟아질 것이다.

극비(極秘)까지는 아니지만, 독일 정부에서도 보안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그렇기에 최치우는 정식 공관이 아닌 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베를린의 센트럴 파크라고 할 수 있는 티어가르텐 근처 주택이 약속 장소였다.

겉모습으로 보면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주택이다.

내부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주택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무척 싹싹한 게 인상적이었다.

간단한 다과상을 먼저 받은 최치우는 창밖으로 보이는 티어가르텐 전경을 감상했다.

가을빛으로 물든 베를린의 중앙 공원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새삼 서울에도 센트럴파크나 티어가르텐처럼 커다란 공원이 도시 중심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벅저벅-

그렇게 5분 정도 기다렸을까.

저택 입구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이 들렸다.

직원들의 발자국 소리는 아니었다.

여러 명이 동시에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최치우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메르켈이다.’

10년 가까이 독일과 유럽을 이끌고 있는 철의 여인.

메르켈 총리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직접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 대통령을 만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지도자를 만나는 게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된 것이다.

“최 대표님, 반갑습니다.”

메르켈이 독일 억양이 잔뜩 묻어나는 딱딱한 영어로 인사를 했다.

최치우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총리님.”

올림푸스 CEO와 독일 총리의 비공식적인 악수가 이뤄졌다.

세상은 언제나 수면 아래에서 움직인다.

두 사람의 만남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이미 모든 게 정해진 다음일 것이다.

이윽고 최치우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메르켈 총리 좌우로 한 사람씩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경제 에너지 장관, 그리고 교통부 장관이세요.”

메르켈이 담백한 어조로 두 사람을 소개했다.

최치우는 그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분위기는 시종일관 차분했지만, 사실 무척 놀라운 일이 연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 총리뿐 아니라 장관 두 명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과연 실용성을 중시하는 독일답다. 오늘 미팅에서 협상을 끝내겠다는 의지가 보이는군.’

최치우는 자리에 앉으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메르켈 총리가 장관 두 명을 대동한 것은 결코 간단한 의미가 아니다.

소울 스톤 발전소를 놓고 벌어진 협상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속전속결을 좋아하는 최치우와 실용성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는 독일의 특성이 맞아떨어졌다.

어쩌면 의외로 협상이 빨리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행원도 대동하지 않고, 이렇게 소박한 사저에 총리와 장관 두 명이라니. 이게 독일의 저력인가.’

최치우는 마주앉은 세 사람을 보며 경계심을 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동네의 평범한 직장인 아줌마, 아저씨다.

대규모 수행원과 경호원은 남의 나라 이야기다.

허례허식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총리와 장관이면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선 사람들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특혜를 누려도 뭐라 할 국민들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철저하게 일에만 집중한다.

패전과 통일이라는 난관을 딛고 독일이 유럽의 맹주로 뛰어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부적인 조항은 실무진에서 처리하면 될 것이고, 우리가 합의해야 할 몇 가지 사안을 들고 왔습니다.”

메르켈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다른 협상 테이블처럼 분위기를 풀기 위한 대화 따위는 모두 생략됐다.

그녀는 진정 시간을 금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최치우는 메르켈이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짐작하고 있었다.

올림푸스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그 부분만 합의가 되면 소울 스톤 발전소를 독일에 지어줄 수 있다.

“발전소 부지와 건립비, 운영비 일체를 우리가 부담하는 조건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년 10억 유로를 10년 동안 지급 보증하는 것은…….”

메르켈이 말끝을 흐렸다.

항상 똑 부러지게 말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만큼 올림푸스의 조건이 부담스럽다는 반증이었다.

10억 유로는 우리 돈 1조 5천억 원이다.

올림푸스는 매년 1조 5천억 원, 10년 동안 15조 원의 수익을 보장받기 원했다.

시몬 대사를 통해 처음으로 제시 받았던 조건은 매년 5억 유로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최치우는 과감하게 2배의 배팅을 한 것이다.

아도니스의 소울 스톤은 샐러맨더의 소울 스톤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게다가 초고강도 레이저 설비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발전소 건립과 유지비용도 훨씬 줄어드는 셈이다.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또 한국이 아닌 외국에 발전소를 짓는 부담까지 합하면 15조는 받아야 한다.

“특별 예산 편성이 필요하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자력 발전소 1기를 건설하는데 20억 유로 이상이 들어갑니다. 유지비용은 어떻습니까? 그에 비하면 소울 스톤 발전소를 위한 100억 유로가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치우가 선공을 날렸다.

독일 정부에서도 다각도로 검토를 하고 나왔을 것이다.

메르켈은 독일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불린다.

그녀가 비용 계산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최치우는 얼굴을 마주하고 메르켈에게 확신을 심어주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원자력 발전소와 비교하면 올림푸스가 요구한 조건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더구나 독일은 원자력 발전을 포기한 나라다.

그들의 절박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이다.

오죽하면 경제부 장관이 에너지 장관을 겸임하고 있다.

메르켈의 왼쪽에 앉은 중년인이 바로 경제 에너지 장관이다.

그는 어떻게든 협상이 타결되기를 가장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었다.

소울 스톤 발전소가 들어서면 경제 에너지 부처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메르켈의 오른쪽에 앉은 교통부 장관의 표정은 어두웠다.

에너지 협상을 하는데 교통부 장관이 따라온 이유가 있었다.

최치우가 제시한 두 번째 조건이 교통부와 떼놓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10억 유로, 10년. 비용에 대해서는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합니까?”

메르켈이 사무적인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유럽을 움직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최치우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최치우는 메르켈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일 수 없는 조건입니다, 총리님.”

“그럼 한 가지 조항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만약 10년 이내에 문제가 생겨 발전소의 전력 생산이 기준치 이하로 떨어지면 올림푸스에서 책임을 지는 것.”

“어떤 책임을 지면 될까요?”

“10억 유로 상환 및 손해보상금 배상입니다. 그런 단서 조항이 있으면 우리도 국민들을 설득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저도 한 가지 조항을 추가하죠. 소울 스톤 발전소 내부적인 문제, 즉 기술적 결함이나 소울 스톤의 문제라면 배상을 하겠습니다. 대신 외부적인 문제, 천재지변이나 보안 사고에 의한 부분은 독일 정부에서 책임지는 것으로. 어떻습니까?”

최치우는 메르켈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꽤나 까다로운 조건을 받고, 오히려 올림푸스가 원하는 바를 얹어서 돌려줬다.

메르켈이 살짝 눈을 돌려 경제 에너지 장관을 쳐다봤다.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고비를 넘었다.

올림푸스는 10년 동안 매년 1조 5천억 원을 확보하게 됐다.

그것도 매출이 아닌 순이익이다.

건설비와 운영비를 독일 정부에서 부담하기 때문이다.

순이익 1조 5천억 원은 어마어마한 수치다.

매출이 50조가 넘어도 순이익 1조를 못 넘기는 대기업이 허다하게 많다.

그에 반해 올림푸스는 세계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매출 대비 순이익으로 올림푸스를 이길 수 있는 기업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이만하면 큰 부담을 덜었다.’

최치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올림푸스가 배상 책임을 지게 됐지만, 독일 정부는 발전소 보안을 떠맡은 셈이다.

소울 스톤에 기술적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

반면 네오메이슨 같은 세력이 발전소를 공격하거나 외부에서 흔들 가능성은 높다.

그 책임을 독일 정부가 지게 됐으니 박수치고 환호할 일이다.

“두 번째 조건은 교통부에서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퓨처 모터스의 전기차 보조금을 똑같이 지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최 대표님.”

메르켈의 말투가 사뭇 단호해졌다.

최치우는 발전소 건립 조건으로 퓨처 모터스의 독일 진출을 추가했다.

각 국 정부는 고객이 전기차를 살 때 보조금을 지급한다.

덕분에 고객들은 부담을 덜고 전기차를 구입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기차 보조금 정책은 나라마다 제각각이다.

독일은 BMW와 벤츠, 아우디, 그리고 폭스바겐을 소유한 자동차 강국이다.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도 독일 업체에게만 주어지고 있다.

최치우는 그 틈을 파고들어 자동차 종주국 독일에 퓨처 모터스를 욱여넣을 작정이었다.

덩치 큰 놈들과 붙어야 빨리 강해질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가장 큰 자동차 시장이지만, 독일은 절대 고수들이 모인 무림이다.

퓨처 모터스가 독일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다른 나라에서도 잘 나갈 수밖에 없다.

“보조금 지급 정책을 바꾸면 여러 자동차 기업들 뿐 아니라 관련 노조까지 집단 반발을 하게 될 겁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입니다.”

교통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내내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유였다.

최치우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지어서 독일의 에너지 정책을 보완하는 것, 그리고 자동차 기업들의 반발을 감당하는 것. 둘 중 뭐가 더 중요한지 묻고 싶군요.”

“그건…….”

교통부 장관이 당황했다.

협상에서 이토록 노골적으로 정곡을 찌르는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농담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하, 아닙니다. 교통부의 어려움이 만만치 않겠죠. 그렇다면 독일 회사에 지급되는 전기차 보조금의 절반으로 타협하는 건 불가능 할까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그렇기에 극단적인 공격은 자제해야 한다.

최치우는 주도권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확실하게 보여줬다.

동시에 긴장을 풀며 한층 완화 된 조건을 제시했다.

그야말로 교통부 장관을 들었다 놓고 있었다.

“절반은… 저희 부처에서 검토를…….”

교통부 장관이 우물쭈물 확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메르켈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변수에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게 그녀의 철칙이다.

하지만 교통부 장관은 최치우에게 완전히 말려들었다.

“교통부와 관련 된 정책은 추후 실무진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게 좋겠습니다. 방금 우리는 100억 유로짜리 협상을 주고받았습니다.”

메르켈이 나서서 흐름을 끊었다.

그녀는 독일 정부가 100억 유로를 약속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최치우는 흔쾌히 메르켈의 정리를 받아들였다.

추후 협상에서 전기차 보조금 50%를 관철시킬 여지는 충분히 만들었다.

‘퓨처 모터스는 독일에서 최초로 전기차 보조금을 받는 외국 기업이 될 거야.’

최치우의 큰 그림은 이미 완성됐다.

독일에서 보조금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로 퓨처 모터스의 제우스 S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리게 될 것이다.

“발전소 위치는 어디를 염두에 두십니까?”

“라이프치히 근교의 부지로 정했습니다.”

최치우는 금방 납득했다.

라이프치히는 동독의 중심지이고, 제조업 공장이 몰려 있어 전력 소모가 많은 도시다.

메르켈은 정치적인 이유로 동독 지방의 산업 도시인 라이프치히를 선택한 것 같았다.

‘역시 고단수다.’

만약 서독 지역에 소울 스톤 발전소를 세우면 몰아주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이번 선택으로 인해 구 동독 지역에서 메르켈의 지지도는 한층 높아질 것이다.

서독 지역은 어차피 발전 혜택을 많이 누리고 있어서 크게 상관이 없다.

“그럼 나머지 현안은 실무진에서 나누는 것으로 하고, 우리는 같은 팀이 됐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메르켈이 건조한 말투로 협상 타결을 선언했다.

큰 틀에서 올림푸스와 독일 정부의 협상은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치우는 환하게 웃으며 유럽 진출을 자축하고 싶었지만, 아직 물어볼 게 남아 있었다.

“총리님.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인가요?”

“혹시 네오메이슨이란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

메르켈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안 그래도 딱딱한 표정에서 눈발이 휘몰아칠 것 같았다.

경제 에너지 장관과 교통부 장관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뭔가 있다.’

최치우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네오메이슨과 독일의 총리 메르켈.

그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연결 고리가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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