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골든 웨이브>
성대한 축포, 엄청난 스케일의 공연과 함께 개막식이 열렸다.
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관중들이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몇 년 전까지 바르셀로나는 까딸루냐 독립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스페인 경쟁도 오랜 암흑기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젊은 총리가 등장해 까딸루냐 갈등을 봉합시켰고, 스페인 경제도 오랜만에 성장세를 맛보게 됐다.
30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 넘어 다시 열린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스페인의 장밋빛 미래를 전세계에 알리는 축제다.
스페인 정부는 세계인이 지켜보는 개막식을 위해 어마어마한 세금을 투입했다.
월드 스타들이 총출동했고,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이 스페인 전통 춤 플라멩고를 함께 추는 등 볼거리가 넘쳤다.
최치우도 화끈한 올림픽 개막식 분위기에 단단히 일조를 했다.
그가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선수단 맨 앞에서 나타나자 함성이 스타디움을 뒤덮었다.
“와아아아아아-!”
“치우! 치우! 치우! 치우!”
최치우의 이름은 서양에서도 발음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최치우를 좋아하는 서양 사람들은 성 대신 이름을 연호했다.
다른 나라 선수단은 물론이고, 개막식 공연을 꾸민 월드 스타들도 최치우를 쳐다보며 흥겨워했다.
사실 유명세로 따지면 최치우는 개막식을 꾸민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100m 달리기로 한국 신기록을 깬 후 그의 인지도는 뉴스를 잘 안 보는 대중들에게도 널리 퍼졌다.
게다가 미국의 GM 공장을 인수하며 직원들까지 받아준 소식은 스페인, 이탈리아처럼 경제가 어려운 유럽 국가들에게 전설적인 미담으로 소개 됐었다.
“코레아-!”
다시금 터진 화려한 폭죽이 대한민국 선수단의 입장을 반겼다.
최치우는 흥겨운 음악에 맞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선두에서 행진을 이끌었다.
“와아아아아!”
그를 향한 환호성은 식을 줄 몰랐다.
지치지도 않는 듯 계속되는 치우, 치우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최치우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정이 샘솟는 걸 느꼈다.
‘즐겁다-!’
세상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것, 그들이 뿜어내는 열정적인 에너지를 받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연예인과 운동 선수는 팬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최치우는 보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는 무대 위, 또는 경기장에서 잠깐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혜택을 받을 수 있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그래서 운동 선수로 올림픽 스타디움에 섰지만, 최치우를 향한 환호가 더 열광적인 것 같았다.
덩달아 대한민국 선수단도 신이 났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 중에는 올림픽을 여러 번 경험해본 베테랑도 적지 않다.
그들도 이렇게 뜨거운 함성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최치우의 인기 덕분인 걸 알지만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대박이다!”
“스페인에서 이런 대접을 다 받아보고!”
“역시 기수 추천 잘 했어, 그치?”
“당근이지!”
어린 선수들이 최치우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솔직한 감정을 표출했다.
운동 선수 세계의 관례를 무시하고 여러 팀에서 최치우를 기수로 추천한 게 신의 한 수였다.
마치 대한민국 선수단이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식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개최국 스페인 선수단 못지않은 환호를 받으니 다른 나라 선수들이 부러운 눈길마저 보냈다.
휘이익- 휘리릭!
최치우가 태극기 깃발을 높이 들고 휘둘렀다.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건곤감리의 이치를 담은 검은색 선이 수놓아진 태극기가 스타디움에서 빛나고 있었다.
스으으윽-
그때 개막식을 중계하는 공식 카메라가 최치우를 향해 다가왔다.
최치우의 얼굴이 70억 인구의 가정집 TV로 생중계 되는 것이다.
“치우 형, 한 마디 해요!”
먼저 카메라를 발견한 육상 팀 동생들이 최치우를 부추겼다.
최치우는 씨익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포효를 터트렸다.
“코리아! 레전드! 어게인!”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영어와 함께 손가락 네 개를 쫙 폈다.
올림픽 전체 순위 4위는 대한민국이 88 서울 올림픽에서 세웠던 역대급 기록이다.
홈 어드밴티지를 받은 88 올림픽 이후 두 번 다시는 넘보기 힘들어진 순위였다.
최치우는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88 올림픽의 전설, 4위의 신화를 다시 쓰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한국의 전설을 다시 한 번 이룩하겠다는 외침은 대한민국 선수단에게 엄청난 동기를 불어넣었다.
“가자! 파이팅!”
“코리아 레전드 어게인!”
너 나 할 것 없이 최치우의 외침을 따라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대한민국 선수단이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식의 진정한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모두의 가슴에 불을 지른 최치우는 당당하게 태극기 깃발을 휘두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
100m 달리기 예선.
원래 육상 예선 경기는 관심에서 비껴나가 있다.
월드 스타가 출전하지 않는 이상, 예선은 그야말로 맛보기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올림픽은 다르다.
예선이지만 출발선에 선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국을 대표하는 스타들이다.
태극기를 가슴에 얹고 출전한 최치우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장을 채운 관중들은 개막식처럼 최치우의 이름을 연호했다.
“치우-! 치우! 치우!”
단순히 그의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치우는 아시아 선수로 올림픽 단거리 육상 메달을 딸 수 있을지 주목 받고 있다.
순수하게 스포츠의 관점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선수였다.
“스텝!”
준비신호가 울렸다.
최치우는 이상태 감독에게 배운 대로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틈틈이 선수촌에 방문하며 레슨을 받았기에 자세도 여느 육상 선수 못지않았다.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습득력에서 최치우를 따라 올 사람은 없다.
무당파나 소림사의 무공도 곁눈질로 스윽 보고 배웠던 최치우다.
육상 선수들의 달리기 자세를 마스터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탕-!
총성이 울렸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처음 듣는 총성이다.
세계적인 CEO로 비즈니스 전쟁을 벌이다 올림픽 스타디움에 서있다니, 모두 스스로 해낸 일이지만 비현실적이다.
특별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일까.
최치우의 스타트는 평소보다 늦었다.
눈에 띌 정도로 주춤거렸고, 그 사이 다른 선수들은 앞서갔다.
보통 단거리 육상에서 0.1초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격차다.
최치우는 스타트 라인에서 최소 0.3초는 늦게 출발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관중석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오 마이 갓!”
최치우를 응원하는 다양한 국적의 관객들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걱정 할 필요 없었다.
관객들의 아쉬움은 금방 놀라움과 환희로 바뀌었다.
조금 늦게 출발한 최치우가 믿기 힘든 스피드로 선두를 따라잡았기 때문이다.
쉭- 쉬쉭-!
얼마나 빠른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갈려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선두를 추월한 최치우는 아차 싶었다.
‘흥분하지 말자! 예선부터 너무 빨리 달리면 김 빠지니까.’
늦은 스타트를 만회하기 위해 오버하면 안 된다.
자칫하면 예선에서 세계 신기록을 깨버릴 수도 있다.
최치우는 페이스를 조절하며 2위 선수보다 한 발짝 앞서 결승선을 통과했다.
“치우우우우우-!”
남들이 보기엔 기가 막힌 역전 레이스였다.
예선에 불과하지만, 최치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결승전이라 착각할 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뒤늦은 스타트를 극복하고 모든 선수들을 한 명씩 제치며 1등까지 치고 올라가는 모습은 드라마가 따로 없었다.
전광판에 찍힌 기록은 9초 96.
손기정 기념 육상 선수권에서 세웠던 9초 98의 한국 신기록을 가뿐하게 경신했다.
최치우의 이름 옆에 한국 신기록을 뜻하는 KR 마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전광판을 확인한 관중들은 또 한 번 함성을 지르며 축제를 즐겼다.
예선부터 신기록이 쏟아지고 있다.
최치우라는 무시무시한 루키 덕분에 올해 100m 달리기는 역대급 관심을 받으며 뜨겁게 불타오를 것 같았다.
우사인 볼트의 후계자로 여겨지는 자메이카의 웨스 라이언, 2인자에서 1인자로 등극하려는 미국의 제레미 요크도 긴장 할 수밖에 없다.
총알 탄 사나이 우사인 볼트가 은퇴하고 처음 열린 올림픽.
아프리카나 미국, 유럽이 아닌 한국의 최치우가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급부상했다.
이전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한 현실이다.
최치우는 손을 흔들며 자신의 이름을 연호해준 관중들에게 보답했다.
100m 달리기는 더 이상 흑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육체적 한계가 있다는 편견을 깨고, 동양인의 대표로 최치우가 우뚝 섰다.
역사는 이미 바뀌고 있었다.
***
레슬링 경기장 관중석이 들썩이고 있었다.
선수들 때문이 아니다.
일반 관객들의 스마트폰 카메라가 관중석에 앉은 한 사람만 찍기 바빴다.
100m 달리기에 출전한 최치우가 레슬링 경기장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기 종목 경기가 다 끝나면 다른 종목을 관람한다.
하지만 최치우의 배포는 남달랐다.
아직 100m 달리기 결승이 열리지 않았지만,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먼저 나섰다.
최치우는 기수 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여러모로 한국 선수단의 주장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물론 국가대표 선수가 자기 종목에서 성적을 못 내면 아무리 열심히 활동해도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치우는 언터처블(untouchable)이다.
그동안 한국 육상의 불모지였던 100m 달리기에서 압도적 기록으로 결승에 올랐기 때문이다.
최치우뿐 아니라 선수촌에서 함께 훈련한 우성용도 결승에 올랐다.
메달권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최치우와 함께 한국 최초로 올림픽 100m 달리기 결승에 오른 것이다.
우성용은 최치우 효과의 최대 수혜자로 떠올랐다.
100m 달리기 결승에 한국 선수가 두 명이나 진출하면서 우성용 또한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그가 기록을 단축하는데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조언도 최치우가 해준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최치우는 올림픽을 준비하며 대한민국, 아니 아시아 육상의 유망주를 제대로 키운 셈이었다.
최치우는 떠나도 우성용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며 한국 육상의 위상을 높일 것이다.
지금 경기장에 들어선 심지호도 마찬가지다.
“우오오오-!”
심지호가 등장하자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세계 선수권을 휩쓴 부동의 랭킹 1위지만, 4년 전 올림픽에서 예선 탈락이라는 쓴맛을 봤다.
운동 선수에게 멘탈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지호는 올림픽 울렁증으로 밤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만약 최치우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번 올림픽에서도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다를 것이다.
심지호는 4년을 절치부심했다.
그리고 최치우에게 확실한 처방을 받았다.
최치우는 심지호의 멘탈을 붙잡기 위해 정수리의 백회혈을 강하게 자극했다.
덕분에 꽉 막힌 울화가 백회혈 너머로 분출 됐다.
심지호는 올림픽을 상상하며 생각이 너무 많아져 잠도 못 자는 상태였지만, 최치우가 백회혈을 열어준 후 몇 달 만에 숙면을 취했다고 한다.
오늘 그 결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으라하앗-!”
심지호의 쩌렁쩌렁한 기합이 관중석까지 울려 퍼졌다.
울렁증과 멘탈이 문제였을 뿐, 원래 실력은 세계 최고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심지호가 상대 선수를 뒤에서 붙잡고 한 바퀴 돌렸다.
가뿐한 승리.
심지호는 두 팔을 활짝 펼치고 기뻐했다.
예선 첫 경기 승리지만, 4년 전 올림픽의 악몽을 떨쳐내기에 충분했다.
최치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짝짝짝-!
마음이 통한 것일까.
심지호가 최치우 쪽을 쳐다보며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취재진의 카메라는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장면을 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대한민국 선수단은 최치우를 중심으로 단단하게 뭉쳤다.
아무래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진짜 사고를 칠 것 같았다.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줄 금빛 물결이 코앞에서 일렁거리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