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61화 (161/243)

# 161

<마지막 승부>

“안녕하세요.”

박지한이 어색한 인사와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수영선수답게 직각으로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190이 조금 안 되는 큰 키.

4년 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인기가 절정일 때 연예계 진출설이 불거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웬만한 사람은 최치우 옆에서면 특별한 아우라 때문에 초라해 보인다.

그런데 박지한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두 사람이 같이 서 있으니 훨씬 더 훈훈한 그림이 연출됐다.

“반갑습니다.”

최치우가 손을 내밀었다.

박지한과 악수를 나눈 그는 불과 몇 초 사이에 많은 것을 파악했다.

최치우는 다른 사람과 손을 맞잡을 때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무공 고수들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다.

‘기력이 충만한 것 같은데……. 단단한 느낌이 들지 않아. 밑 빠진 독처럼 어디선가 구멍이 뚫렸다.’

마치 한의사들이 진맥을 하는 것처럼 박지한의 상태를 알아차린 최치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박지한 선수, 25살이죠?”

“네? 아, 네.”

박지한은 이 상황이 쉽게 적응되지 않는 듯했다.

우성용의 말을 듣고, 또 선수촌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지만 여전히 어색했다.

최치우는 세계적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개인 자산이 10조 원 가까이 된다는 부자다.

아무리 박지한이 날고기는 선수라도 명성과 재력, 인기에서 비교 할 구석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100m 달리기에서 9초대 기록을 세운 괴물이다.

그런 최치우가 눈앞에 서 있는 것부터 얼떨떨했다.

가끔 선수촌 식당에서 지나가며 곁눈질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실 고민이 깊지만… 코치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박지한은 한 가닥 남은 자존심을 쥐어짰다.

4년 전만 해도 박지한은 아시아 수영의 희망이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세상 부러울 게 없었던 그가 생면부지의 남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것이다.

비록 상대가 그 유명한 최치우지만, 어쨌든 수영에는 문외한이다.

막상 조언을 받으려 왔으면서도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겁니다.”

최치우는 담담한 말투로 박지한을 자극했다.

한때 세계 최고였다는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

과연 박지한은 얼마나 절박할까.

멋지게 은퇴하겠다는 그의 각오는 진심일까.

잠깐 침묵이 흐르고, 박지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맞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되는데 뭘 가리겠습니까. 바쁜 시간 내주셨는데 불쾌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박지한이 처음 만난 최치우에게 완전히 수그리고 들어온 것이다.

자존심을 버릴 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다.

인생 마지막 대회가 될 올림픽을 앞두고 박지한은 모든 것을 걸었다.

최치우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4년 전, 금메달 따고 여기저기 방송에도 출연할 때 술 많이 마셨죠?”

“전부 지난 시절입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박지한이 얼굴을 붉혔다.

철이 없던 시절,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취해 막무가내로 살았었다.

그 끝이 이렇게 초라할 줄은 몰랐다.

부모님과 코치도 이미 올림픽 금메달을 딴 박지한을 만류하지 못했었다.

최치우는 일부러 박지한을 놀리려는 듯 계속 과거를 추궁했다.

“술만 마신 게 아니라 여자도 많이 만났을 것 같고, 비시즌에 운동도 안 했을 테고.”

“부끄럽지만… 모두 사실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네?”

“선수촌 안에서 생활하지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주, 여자, 이런 문제로부터 완전하게 거리를 두고 있습니까?”

“그건……!”

박지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 대한 평판이 안 좋다는 사실은 박지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면전에서 의심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올림픽을 몇 달 앞두고, 은퇴를 위해 인생을 걸었습니다. 제가 딴 금메달을 걸고 맹세합니다. 절대, 절대 운동 말고 딴짓은 안 하고 있습니다.”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박지한은 최치우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다.

이렇게 의심을 살 정도로 망가진 자기 자신의 모습이 분한 것이다.

최치우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25살 청년의 진심을 확실히 알게 됐다.

현대의 나이로는 동갑이지만, 25살이면 한창 어린 나이다.

그런데 박지한은 벌써 최고에서 최악까지 롤러코스터를 경험했다.

‘이만하면 마인드는 괜찮은 편이군.’

최치우는 박지한의 말을 믿었다.

25살의 거짓말 정도는 한눈에 간파할 수 있다.

정말 억울하다는 듯 대답한 모습은 꾸밈이 없었다.

“내가 수영은 잘 모르지만, 슬럼프에 빠진 건 테크닉 문제는 아닐 겁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테크닉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최치우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박지한이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다.

마치 박지한의 훈련을 지켜본 사람처럼 예리한 평가였기 때문이다.

“테크닉은 아직도 세계 최고 레벨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박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양 선수들에 비해 신체 조건이 안 좋지만 절묘한 테크닉으로 약점을 극복했었다.

잠시 방황을 했어도 몸에 새겨진 기술이 사라질 리는 없다.

문제는 다른데 있을 것이다.

최치우는 박지한과 악수를 나눌 때 이미 뭐가 문제인지 눈치챘다.

“기력, 즉 신체의 에너지가 어디론가 증발 되고 있습니다. 아마 후반 스퍼트 속도가 예전만 못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혹시 최근 경기 영상을 본 건 아닙니까?”

“박 선수 경기를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습니다.”

최치우가 냉정하게 말했다.

박지한도 뜨끔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종횡무진 세계를 누비느라 바빠서 선수촌에도 가끔 방문하는 사람이 바로 최치우다.

그가 굳이 한물 간 박지한의 경기를 찾아 볼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놀라웠다.

박지한은 레이스 후반 속도를 내는 스퍼트에서 기록을 단축하지 못하고 있다.

번번이 추월을 허용하며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했다.

최치우는 경기도 안 보고 박지한의 문제점을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속는 셈 치고 최치우를 찾아온 박지한은 점점 그를 신뢰하게 됐다.

선수촌에 떠도는 소문이, 그리고 우성용의 호들갑이 사실인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박지한이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최치우는 겨우 5분도 안 되어서 박지한의 믿음을 샀다.

대단한 일이지만, 최치우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술도 끊었고, 여자도 안 만나는데 기력이 빠져나가는 이유를 찾아봅시다.”

최치우가 마치 전문 코치나 선수 주치의처럼 말했다.

마형석과 심지호를 업그레이드시켜 준 것처럼 박지한에게도 기적을 선사할 차례였다.

***

선수촌에는 첨단 기기로 선수들의 신체 상태를 분석하는 의사들이 상주하고 있다.

평생 한 종목만 파고들어 온갖 경험을 쌓은 코치들도 있다.

그러나 최치우는 의사와 코치들이 알 수 없는 영역을 꿰뚫어 봤다.

현대 과학으로 증명하기 힘든 기(氣)를 느낄 수 있는지가 결정적 차이다.

기와 마나.

비슷하지만 다른 두 가지를 모두 느끼고 다루는 최치우는 비장의 무기를 양손에 든 셈이다.

그렇기에 선수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무림에서 고수들은 말 한 마디로 하수와 중수에게 깨달음을 준다.

무공의 깨달음은 운동 팁보다 몇 배 더 얻기 어렵다.

‘무림맹 검객들에게 가르침을 줬던 걸 생각하면 이건 누워서 떡 먹기 정도다.’

최치우는 2주 만에 다시 찾은 선수촌에서 박지한을 만났다.

두 번째 만남이지만 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원래 둘은 25살 동갑내기 친구다.

하지만 박지한은 최치우를 국가 대표 총 감독을 대하는 것처럼 깍듯하게 모셨다.

최치우가 편하게 말을 놓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지난 2주 동안 스스로 몸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박지한은 마형석과 심지호 이상으로 최치우를 믿고 따르게 됐다.

“코치님도 그렇고, 전담 트레이너 형님도 얼마나 놀랐는지……. 그 표정을 대표님이 보셨어야 합니다.”

박지한이 입이 귀에 걸려서 말했다.

그는 최치우를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사회에서 불리는 호칭대로 예의를 갖춘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아닙니다. 은인한테 어떻게…….”

“그럼 올림픽에서 메달 따면 친구 합시다.”

“네? 메달이요?”

“자신 없어요? 내가 이만큼 도와주는데 당연히 메달 따고 은퇴해야지.”

최치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 쿨하게 말했다.

그러나 박지한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올라오는 듯 했다.

“선수촌에 들어올 때만 해도 메달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냥 추하지 않게, 욕만 안 먹고 은퇴를 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는 올림픽 끝나고 받겠습니다. 일단 돌아서 앉아요.”

“네!”

박지한이 등을 보이고 앉았다.

최치우는 망설임 없이 그의 등을 강하게 때렸다.

투두둑! 툭툭!

퍼퍼퍽-!

중지를 뾰족하게 세우고 주먹으로 등을 두드리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박지한은 입을 꾹 다물고 통증을 참았다.

2주 전, 처음 최치우를 만나 난데없이 등을 두들겨 맞을 때는 어안이 벙벙했었다.

하지만 효과가 확실했다.

실컷 등을 맞은 다음 날,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수영장에서도 즉시 달라진 몸 상태가 증명됐다.

레이스 후반에 힘이 떨어지던 고질적인 현상이 개선된 것이다.

스퍼트가 좋아지니 자신감이 붙고, 더욱 공격적으로 초반 페이스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덕분에 박지한은 2주 동안 기록을 많이 단축시켰다.

아직 4년 전 금메달 페이스에는 못 미치지만 슬럼프에서 탈출한 건 확실했다.

박지한보다 더 깜짝 놀란 코치들이 혹시 금지 약물을 복용한 게 아니냐고 조심스레 물어봤을 정도였다.

당연히 도핑은 아니었다.

최치우는 박지한에게 추궁과혈(推宮過穴)을 시전한 것이다.

내공이 뛰어난 고수가 상대의 기혈을 자극해 전신혈도를 개방하고, 꽉 막힌 기의 흐름을 순환시키는 수법이 추궁과혈이다.

박지한은 방탕하게 살던 시절 몸이 안에서부터 망가졌다.

잦은 음주와 난잡한 관계로 인한 정기(精氣) 방출은 내상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뒤늦게 운동에 집중해도 기력이 예전만 못했던 것이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다.

사실 효능이 좋은 영약을 복용하는 게 제일 빠른 처방이다.

그러나 영약의 경우 잘못 먹으면 도핑테스트에 걸릴 수 있다.

박지한에게 기초적인 도인법을 가르쳐 스스로 내상을 치유하게 만들 수도 없었다.

결국 추궁과혈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후우- 다 됐어요.”

“아……. 고생하셨습니다.”

박지한은 참았던 신음을 낮게 토해냈다.

추궁과혈을 펼친 최치우도 약간의 내공을 소모했다.

하지만 받는 사람도 만만치 않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도 불평할 수는 없다.

억만금을 내도 최치우가 아니면 절대 못 받는 추궁과혈이기 때문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기력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문제는 다 잡았어요. 이제 남은 건 박지한 선수의 노력입니다.”

최치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올림픽 결과는 섣불리 예측 할 수 없다.

다만 최치우는 박지한이 메달권에 진입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줬다.

마형석도, 심지호도 마찬가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한다.

최치우와 선수들의 인간적 노력이 빛을 발하고, 천운까지 따른다면 대한민국은 사상 최대의 금빛 물결을 보게 될 것이다.

박지한은 최치우를 바라보고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동갑내기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최선을 다해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펼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올림픽만 끝나면 반드시 두고두고 보답하겠습니다.”

최치우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올림픽 국가 대표 선수단에 씨앗을 뿌렸다.

씨앗이 자라 어떤 열매를 맺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올림푸스라는 이름의 숲은 최치우의 넓은 그릇만큼 계속 울창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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