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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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국가 대표 선수들은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촌에서 24시간을 보낸다.
축구 같은 단체 구기종목 정도가 예외일 뿐, 최치우처럼 자유롭게 활동하는 경우는 아예 없다.
그렇기에 종목이 달라도 서로 친해지기 쉽다.
매일 선수촌을 오가며 얼굴을 익히고, 말이라도 한두 마디 주고받다보면 가까워지는 게 정상이다.
특히 운동선수들은 어린 시절부터 선후배 관계로 연결돼 있다.
종목이 달라도 같은 학교 선후배를 따지면 거의 아는 사이다.
그래서일까.
국가 대표들만 모인 선수촌 내부에서는 은밀한 소문이 빠르게 퍼질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유도 선수 A와 여자 체조 선수 B가 비밀 연애를 한다더라, 레슬링 선수 C는 엄청난 금수저라서 코치들이 쩔쩔 맨다더라 등등.
선수촌도 사람 사는 곳이니 온갖 소문이 나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선수촌을 떠들썩하게 만든 화제의 소문은 무척 독특했다.
선수 사생활이나 스포츠계의 정치와 관련된 소문이 아니었다.
가장 흔한 종류의 소문인 협회나 연맹 임원들 뒷담화도 아니다.
소문의 주인공은 바로 최치우였다.
‘100m 달리기 국가 대표 최치우에게 찾아가면 엄청난 팁을 얻을 수 있다.’
거기에 획기적인 기록 단축이 가능하다는 말까지 알음알음 퍼지는 추세였다.
물론 믿기 힘든 소문이다.
선수촌에 모인 국가 대표는 평생 자기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낸 천재들이다.
심지어 지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도 적지 않다.
메달리스트에게는 감독이나 코치도 함부로 조언을 하지 못한다.
자칫 선수의 페이스를 깨트리면 슬럼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치우와 관련된 소문을 처음 들은 선수들은 코웃음을 쳤다.
올림푸스 CEO이면서 한국 신기록을 경신한 게 대단하기는 했다.
그러나 다른 종목 선수들에게 팁을 줄 수 있다는 건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소문은 점점 더 많은 에피소드와 함께 신빙성을 얻었다.
발단은 우성용이었다.
최치우와 함께 100m 달리기 및 200m, 400m 등 중단거리에 출전하는 우성용은 육상 기대주다.
이번이 첫 올림픽 출전이지만, 한국 육상계의 차세대 간판이 될 재목이었다.
그 우성용이 틈만 나면 최치우 칭찬을 해댔다.
최치우가 코치들도 못 보는 0.2% 빈틈을 찾아내 조언을 해준다는 것이다.
최정상 선수들의 세계에서는 0.01%가 메달 색깔을 바꾼다.
아주 사소한 단점이라도 당장 고칠 수 있다면 영혼을 팔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실제로 우성용은 지난 연말 대비 기록이 부쩍 상승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최치우와 친하게 지낸 후부터 본인 신기록을 경신했다.
우성용만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증인들이 소문에 힘을 실었다.
콧대 높은 유도 선수 마형석이 최치우 덕을 봤다고 인정했다.
지난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마형석은 유도 팀의 주장이다.
워낙 자존심이 센 걸로 유명해 선수촌 안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몇 없다.
그런 마형석이 인정할 정도면 소문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레슬링 세계 랭킹 1위지만, 지난 올림픽에서 충격의 예선 탈락을 당한 심지호도 어느새 최치우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마형석처럼 레슬링 팀 주장인 그는 아예 후배들을 우르르 데리고 최치우를 찾아갔다.
국가 대표 레슬링 팀 전원이 금쪽같은 자유시간에 굳이 최치우를 만나 조언을 들은 것이다.
소문을 들은 코치들은 불쾌감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유명 CEO인 최치우가 갑자기 100m 기록을 세우고 나타난 것도 황당한데 자기 선수들에게 조언까지 하다니,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어느 코치도 최치우에게 따지지 못했다.
최치우의 사회적 지위 때문은 아니다.
조언을 받고 돌아온 선수들의 기량이 눈에 띄게 향상됐기 때문이다.
우성용의 기록 단축은 말할 것도 없다.
마형석은 누르기에서 쉽게 탈출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약점을 극복했다.
지난 4년 내내 코치들이 달라붙어도 해결하지 못한 숙제였다.
올림픽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은 마형석만 보면 누르기를 걸려도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약점을 극복한 마형석은 금메달을 딸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
심지호도 마찬가지다.
세계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심지호의 약점은 멘탈이다.
지난 올림픽 예선 탈락의 트라우마가 너무 컸던 것일까.
올림픽이 다가올수록 심지호의 멘탈이 흔들렸고, 기량도 나날이 나빠졌다.
그런데 최치우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몰라볼 정도로 인상이 밝아졌다.
심지호는 올림픽 부담감을 떨쳐낸 듯 긍정적인 기운을 되찾았고, 연습 경기에서 원래 실력을 보이며 코치진을 안심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유도 코치와 레슬링 코치도 혀를 내둘렀다.
마음 같아선 코치들도 최치우에게 찾아가 비법을 전수받고 싶었다.
선수촌을 휩쓴 소문은 암암리에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최치우가 이따금 선수촌에 방문할 때마다 치열한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그에게 다가가 조언을 구할지 말지 고민하는 선수들로 줄을 세워도 될 것 같았다.
최치우는 국가 대표들이 모인 선수촌에서도 자연스레 태풍의 눈이 됐다.
그의 주위에 있으면 어떻게든 이득을 본다.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지만, 선수촌 내부에서는 최치우 신드롬이 불고 있었다.
한 계절 앞으로 다가온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선전이 예사롭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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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는 오랜만에 선수촌에 들어섰다.
이제 올림픽이 3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예전보다는 훨씬 자주 선수촌을 찾고 있다.
그래도 1달에 1번, 많으면 2번이다.
그는 입촌하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선수촌에 상주하지 않지만 락커룸을 비롯해 개인 시설은 모두 갖춰져 있다.
최치우는 한국 육상 최초로 단거리 달리기 메달이 유력한 후보다.
잠깐씩 들릴 때마다 불편한 점이 없도록 특별 대우를 받는 게 당연했다.
보통 체육 협회나 연맹은 무능하고 권위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특히 동계 체육 종목인 빙상연맹의 무능은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한육상협회는 조금 달랐다.
최치우는 단순한 선수가 아니다.
메달리스트 후보인 동시에 육상협회의 주요 스폰서다.
올림푸스의 후원으로 다른 육상 선수들이 과거와 다른 혜택을 받으며 운동에 집중하게 됐다.
게다가 육상을 향한 국민적 관심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협회에서 노심초사 최치우와 육상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 오셨어요?”
제법 친해진 우성용이 최치우를 보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최치우 덕분에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우성용은 고된 훈련에도 싱글벙글이다.
기록이 좋아지며 선수 생활 전성기를 갱신하고 있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는 것이다.
최치우는 우성용의 어깨를 툭 치며 대답했다.
“너 입이 좀 싸더라?”
“네?”
“니가 소문내서 다른 선수들이 자꾸 찾아오잖아. 내가 선수촌 들어올 때마다.”
“아……. 죄송해요, 형님. 안 그래도 바깥일도 많고 머리 아프실 텐데.”
우성용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사과했다.
장난삼아 농담을 건넨 최치우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아냐, 성용아. 얼굴 풀어. 그냥 해본 말이니까.”
“정말이세요?”
“그럼. 내가 다른 선수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뿌듯하다.”
최치우는 진심이었다.
약간 귀찮긴 해도 보람이 더 컸다.
유도 선수 마형석과 레슬링 선수 심지호는 최치우의 조언을 듣고 올림픽 금메달 확률이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최치우는 혼자만 메달을 따고 마는 게 아닌, 대한민국 국가 대표 전체의 전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우성용이 우물쭈물거렸다.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최치우는 스트레칭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무슨 부탁이야? 얼른 말해봐.”
“역시 형님은 딱 보면 다 아시나 봐요.”
“얼굴에 다 써 있다. 어려운 부탁하겠습니다, 라고.”
“제 중학교 선배 중에 박지한이라고 있는데요…….”
“알지, 박지한 선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박지한을 모를 수 없다.
4년 전 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남자 수영 금메달을 딴 선수가 박지한이다.
이후 박지한은 TV 광고를 찍고, 연예인과 열애설이 터지는 등 국민 영웅의 지위를 마음껏 즐겼다.
그러나 세계 선수권 대회부터 기량이 급격히 떨어지며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대한민국 국가 대표로는 손색이 없지만, 길쭉한 서양 선수들과 메달을 다툴 레벨에서는 한참 멀어진 것이다.
국민들의 관심도 싸늘하게 식었고, 자잘한 스캔들까지 박지한을 괴롭혔다.
결국 그는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선수 생활을 정리하는 올림픽이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지난 3년 내내 세계 선수권 기록이 나빴기 때문이다.
올림픽 금메달을 땄던 4년 전 전성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박지한은 왕년의 국민 영웅으로 쓸쓸히 잊힐 위기에 처했다.
“박지한 선배가 형님을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수영이라, 수영…….”
“부담스러우시면 어렵다고 전할까요?”
우성용은 최치우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 같았다.
몇 번의 조언과 훈련을 통해 최치우를 100% 신뢰하게 된 것이다.
최치우는 우성용의 눈을 마주보고 물었다.
“인성은 어때? 듣기로는 금메달 따고 완전 거만해져서 사람들이 다 떠났다던데.”
“사실 그때는 좀 그랬어요. 하지만 1년 전부터는 진짜 마음잡고 열심히 하는데… 실력이 돌아오지 않아서 많이 힘든가 봐요. 얼마 전 둘이서 이야기하는데 후회 없이 은퇴하고 싶다고 눈물을 보여서요. 그 선배가 누구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인 것도 처음이고…….”
그동안 박지한이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금메달을 땄지만, 갑자기 주어진 인기에 취해 망가졌을 것이다.
다시 돌이키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늦었다.
한번 망가진 페이스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이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아도, 후회해도 늦은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나를 만나면 늦은 후회도 바꿀 수 있어.’
최치우는 박지한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한때는 온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던 영웅이다.
그의 마지막 올림픽이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단순히 남을 돕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올림픽 국가 대표들은 저마다 만만치 않은 인맥과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언젠가 올림푸스에 힘이 되어줄지 아무도 모른다.
100m 달리기 선수로 나선 김에 두루두루 투자를 하는 셈치면 된다.
사실 최치우는 올림픽과 거의 동시에 소울 스톤 발전소 준공, 제우스 S 제주도 출시 등 굵직한 일정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마냥 쫓기는 기분은 아니었다.
지난 해 열심히 씨를 뿌린 성과를 올해 수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수촌 일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다.
과거의 국민 영웅 박지한을 현재의 국민 영웅 최치우가 어떻게 구제해 줄지.
여름을 앞두고 선수촌의 열기는 하루하루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