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다윗과 골리앗>
비즈니스의 본질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만남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비즈니스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품을 팔고, 경험을 파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사람들을 낯선 세상, 또는 타인과 잘 만나게 도와주는 제품이 히트를 한다.
비즈니스 레벨이 올라갈수록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진다.
그렇기에 최치우는 비즈니스를 다른 말로 바꾸면 만남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제까지 만난 적 없는 새로운 인물을 만나기 직전이었다.
오성그룹의 이지용 부회장.
그는 단순히 후계자가 아니다.
이미 실질적인 상속 절차를 매듭지었고, 병상에 누워 있는 선대 회장 대신 그룹을 지휘한 지 벌써 3년이 넘었다.
현기 자동차의 홍문기와 비교해도 그룹 내 위상이 다르다.
홍문기가 구속되면 현기의 후계 구도는 진흙탕에 빠진다.
그러나 만약 이지용이 구속되어도 오성의 상속 싸움이 다시 열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히려 그룹이 하나로 똘똘 뭉쳐 이지용을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 같았다.
시총 350조 원이 넘는 한반도의 공룡 오성그룹은 이미 이지용의 회사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껏 최치우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재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이지용이 제일 높을지 모른다.
에릭 한센도 만만치 않은 부자지만, 이지용에게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다.
개인 금융 자산은 어쩌면 에릭이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의 규모와 영향력으로는 이지용에게 범접하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최치우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통령을 처음 안가에서 따로 만날 때보다 더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지용 이름 세 글자에 위축됐을 것이다.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며 숨이 가빠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최치우는 반대였다.
마치 소개팅을 나가는 대학생처럼 기분이 좋았다.
우선 이지용이 최치우와 1 : 1로 은밀히 만나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올림푸스는 오성그룹의 오너도 무시 할 수 없는 위치까지 성장했다.
국내외에서 오성의 대항마로 올림푸스를 꼽는 게 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총 규모는 퓨처 모터스를 합쳐도 10배가량 차이가 나지만,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인식 되는 브랜드 이미지와 혁신성은 오성을 위협하고도 남는다.
그렇기에 대통령보다 더 만나기 어렵다는 이지용 부회장도 시간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치우는 이번 기회에 이지용의 그릇을 가늠해 보고 싶었다.
현기의 홍문기는 기대 이하의 쓰레기였고, 최치우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다음 검찰 수사까지 받고 있다.
후계자의 모자란 역량 때문에 현기의 몰락은 기정사실인 것 같았다.
과연 오성그룹의 후계자, 이제는 실질적 오너가 된 이지용의 그릇은 어떨까.
홍문기처럼 실망감을 안겨줄까, 아니면 특별한 인상을 받게 될까.
최치우는 이지용을 만나면 오성그룹의 미래를 점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7번의 환생을 경험하며 무려 8개의 다른 차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겪어봤다.
사람 보는 눈이 타의 추종을 불허 하는 게 당연하다.
이지용과 마주앉아 30분만 대화를 나누면 그의 뼛속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가장 큰 라이벌이 될 테니까.’
최치우는 한쪽 다리를 꼬면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올림푸스는 국내에서 유력 정치인 유경민, 그리고 굴지의 자동차 회사 현기와 싸우고 있다.
물론 세계로 눈을 돌리면 네오메이슨이라는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강적이 버티고 서 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자잘한 공방전과 퓨처 모터스 인수 이후 네오메이슨은 잠잠해졌다.
수면 아래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몰라도 당장은 부딪칠 일이 없다.
그렇기에 유경민과 현기 자동차가 최치우의 단기 목표였다.
그다음은 아마 오성그룹과 치열한 혈전을 벌여야 될 것이다.
사업 분야가 다르지만, 국내 시장의 패권을 놓고 언젠가는 일기토를 펼칠 수밖에 없는 상대다.
이지용도 오늘 미팅을 단순한 만남으로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서로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회다.
지이이잉- 철컥!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최치우는 강남과 코엑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특급 호텔 최상위층 스위트룸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1박에 천만 원이 넘는 스위트룸을 빌려 보안을 유지하고 편하게 만나는 게 우리나라 재벌들의 스타일 같았다.
임동혁도 광화문의 특급 호텔 스위트룸을 개인 집무실처럼 사용하는 편이었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이어졌다.
워낙 넓은 방, 아니 아파트 몇 채를 합쳐놓은 크기의 스위트룸이기에 복도가 길다.
‘왔군.’
최치우는 몸을 돌렸다.
복도 너머에서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깔끔하지만 절제된 스타일의 옷과 헤어스타일, 새하얀 피부, 유행이 지났지만 한결같이 고수하는 무테안경까지.
뉴스에서 종종 보던 이지용 부회장이 눈앞에 서있었다.
“드디어 이렇게 만나네요.”
이지용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40대 중후반의 나이가 무색한 동안으로 유명하다.
외모뿐 아니라 목소리도 나이에 비해 상당히 어리게 들렸다.
“최치우입니다.”
최치우도 인사를 했다.
사실 두 사람 다 자기소개가 필요 없는 유명인이다.
이지용은 악수를 청하는 대신 손을 뻗어 거실의 소파를 가리켰다.
자연스레 마주앉은 둘은 말을 아꼈다.
알려진 것처럼 이지용 부회장은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최치우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중요한 안건은 임동혁을 통해 전달된 상황이다.
이지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답을 듣고, 그에 맞춰 반응하면 된다.
“모든 유력 후보를 지원하는 게 오성의 전통이지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지용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생긴 것과 다르게 단도직입을 좋아하는 듯 했다.
최치우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세간에서 이지용은 유약한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룹 내부의 신뢰도는 아주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실체가 무엇인지 감을 잡아야 한다.
이지용이라는 인간의 그릇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소득을 올리는 셈이다.
“아버지였다면 전통을 지켰겠지요. 아마 신생 기업의 CEO와 따로 만나는 일도 없었을 듯싶네요. 세상이 떠드는 혁신이나 이미지보다 철저하게 숫자, 주식과 매출에만 관심이 있으셨으니.”
어디서도 듣기 힘든 이야기가 나왔다.
이지용이 병상에 누워있는 오성그룹의 회장에 대해 말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평가하는 것이니 누구보다 정확할 수밖에 없다.
“회장님이 그렇다면, 부회장님은 어떻습니까. 당장의 숫자가 전부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도 예전에는 아버지와 같은 생각이었지요. 평생 그분의 그림자를 보고 자랐는데.”
오성의 회장은 자식 교육을 엄하게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장남으로 태어나 유치원생부터 경영 수업을 받은 이지용은 항상 아버지의 위명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회장이 병상에 눕고, 당당하게 오너 자리를 승계받으며 이지용은 달라졌다.
아버지의 충신들, 노회한 가신들을 일거에 은퇴시켰고 젊은 사장들을 발탁해 그룹을 장악했다.
무분별한 투자 대신 배당을 늘려 주가를 높이는데 부쩍 신경 쓰는 것도 변화 된 모습이었다.
과거의 오성은 주가를 무시하는 그룹이었다.
제품을 잘 만들어서 많이 팔면 주식은 알아서 오른다는 게 선대 회장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지용의 오성은 달라졌다.
“매출이 턱없이 적은, 심지어 한 번도 흑자를 낸 적 없는 회사의 시가총액이 100조 원을 넘는 세상이 와버렸지요. 그런데 아직도 아버지처럼 당장의 숫자에만 집중한다면… 오성이라는 성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겁니다. 신기루처럼.”
최치우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지용은 세계 시장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겉보기엔 유약한 오너일지 몰라도 아버지에 비해 훨씬 세련되게 업그레이드된 경영인이다.
‘보통이 아니군. 오성… 만만하지 않겠어.’
최치우는 오성그룹을 전면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용 부회장의 총기가 살아있는 한, 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 공룡이 아니다.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이용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부회장님의 시각에 동의합니다. 개발되지도 않은 신약 하나로 주식 가치가 50조 넘게 오르는 세상입니다. 과거에는 미래 기술이라고 하면 5년 뒤 실현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말하는 미래 기술은 20년, 50년, 100년 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열광하고, 시장은 아낌없이 돈줄을 풉니다. 미래에 투자하지 않는 회사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될 겁니다.”
최치우의 말은 화살처럼 이지용의 심장을 꿰뚫었다.
오성이라는 거대한 그룹을 움직이는 이지용은 매일 수백, 수천 번의 고민을 거듭한다.
그런데 최치우는 몇 마디 말로 이지용의 고민을 해결해 줬다.
평소에 이지용과 대화를 나누며 상의를 하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최치우가 말한 해답은 간단했다.
현재 매출이 감소하더라도, 불투명하고 위험해 보여도 무조건 미래에 투자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오성그룹의 작년 영업이익이 60조를 넘겨도 주식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하다.
지금은 엄청나게 돈을 벌지만, 미래에도 오성이 돈을 잘 벌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의 투자자들은 언제나 내일 돈을 벌 회사를 찾아다닌다.
그래야만 주식이 오르고, 투자 이익이 계속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성그룹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시대의 최강자다.
그러나 10년 뒤에도, 혹은 20년 뒤에도 최강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반면 올림푸스는 아직 루키에 불과하다.
하지만 10년 뒤 세계를 주도할 기업으로 평가 받는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가 40조 원의 시가총액을 이룩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년 남짓이다.
1년 뒤에는 100조를 넘고, 3년 뒤에는 오성그룹을 추월할 수도 있다.
직원 숫자와 회사 자본금, 매출 따위는 뒷전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최치우와 이지용은 처음 만나서 겨우 3분 동안 대화를 주고받았다.
무척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를 인정하기엔 충분했다.
무림의 고수는 검을 뽑는 자세만 보고도 상대의 무공을 짐작할 수 있다.
최치우는 이지용의 깊이 있는 시각을 인정하게 됐다.
이지용은 더 놀랐을 것이다.
그는 오성그룹이 직면한 고민을 선지자처럼 먼저 타파하고 있는 장본인이 최치우란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최 대표님, 시간 끄는 것 싫어하지요?”
이지용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최치우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 돌리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우리 오성이 전통을 깨고 특정 후보에 대한 지원을 철회한다면… 올림푸스는 무엇을 해줄 수 있습니까?”
최치우와 이지용은 거래를 하기 위해 만났다.
우선 서로가 거래를 할 만한 상대인지 판단하는 게 중요했다.
다행히 둘 다 상대를 높이 평가하며 1차 관문을 넘었다.
이제 2차 관문이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거래를 틀 수 없다.
이지용은 유경민에 대한 지원을 접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오성그룹이 등을 돌리면 유경민은 궁지에 몰린다.
몸을 사리고 있는 대검 중수부의 현직 검사들도 이때다 싶어 더욱 집요하게 유경민을 물어뜯을 것이다.
그야말로 외통수였다.
이지용 부회장은 생각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협상에 임하고 있었다.
그만큼 오성그룹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며 막막함을 깊이 느꼈다는 뜻이다.
최치우는 무테안경 너머 이지용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성그룹이 유경민 의원에게 등을 돌리면, 올림푸스는 그 대가로 힌트를 주겠습니다.”
“힌트요?”
이지용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최치우의 말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치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말을 계속했다.
“오성은 골리앗입니다. 거대하고 강력하지만, 민첩하고 재빠르지 못하죠. 우리는 다윗입니다. 골리앗보다 작지만, 누구보다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듣기 좋은 비유는 아닙니다.”
결국 골리앗은 다윗의 돌팔매에 맞고 쓰러진다.
이지용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약간의 도발은 협상을 성사시키는 조미료다.
최치우는 계산된 멘트로 이지용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다.
“다윗이 훗날 골리앗을 쓰러트리기 위해 준비했던 돌팔매, 그중 하나를 주겠습니다. 올림푸스가 뛰어들려고 준비하던 신사업이 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전통을 무시하고 대선 판도를 바꾸는 대가로… 최 대표님의 말 한 마디가 전부라는 것입니까?”
“아깝다고 느껴진다면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이만 일어나시죠.”
누가 봐도 미친 거래다.
그렇지만 최치우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상식적으로 아쉬운 쪽은 유경민을 떨어트리는데 올인 한 올림푸스다.
하지만 최치우의 생각은 달랐다.
오성그룹의 이지용 부회장이 훨씬 아쉬운 상황이라 생각했다.
실질적 오너가 된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지워야만 한다.
눈앞의 대선보다 미래 먹거리 개발로 인정을 받는 게 중요할 것이다.
“이 거래…….”
뭔가 분한 듯 주먹을 꽉 쥔 이지용 부회장이 최치우를 노려봤다.
최치우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이지용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줬다.
“하지요, 이 거래.”
결국 이지용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거래지만, 천외천의 세계는 상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다윗과 골리앗이 손을 잡았다.
어마어마한 파장이 최치우로부터 퍼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