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47화 (147/243)

# 147

***

미팅은 빠르고 깔끔하게 진행됐다.

시종일관 깍듯한 태도를 보인 정제국의 요구 사항은 단순했다.

여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유경민의 편만 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최치우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중립을 지켜주면 대통령이 되어 확실하게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원래부터 대통령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 할 생각이 없던 최치우는 그 자리에서 정제국의 요청을 수락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제 이름이 유경민 의원과 함께 거론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 사람,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걸로 여의도에 정평이 나 있습니다.”

정제국은 진심을 듬뿍 담아 말했다.

예상과 달리 최치우가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선가 잘못된 정보를 듣고 최치우를 찾아온 것 같았다.

최치우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 의원님, 제가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혹시 올림푸스가 대선에 개입할 거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이…….”

정제국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80년대 배우처럼 눈코입이 큼직해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최치우는 정제국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파트너가 아니다.

오늘도 그저 남의 편을 들지 않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정제국이 중요한 정보를 말해주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정제국은 금방 고민을 끝냈다.

그는 쌍꺼풀이 진한 눈을 부릅뜨고 최치우를 바라봤다.

“솔직히 얼마 전부터 여의도에 최 대표님과 관련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요?”

“올림푸스가 유영조 대통령의 주선으로 여당 후보인 유경민 의원을 돕게 됐다는 소문입니다.”

최치우는 말없이 팔짱을 꼈다.

누가 그런 소문을 유포했을까.

심증을 갖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의도 정치인들이 믿을 만한 소문이군요.”

“우리 캠프에서도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문이란 게 실체가 없어도 돌다 보면 알아서 생명력을 가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직접 움직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정제국은 속내를 오픈했다.

만약 소문대로 최치우가 유경민을 돕는다면 대선은 해보나 마나다.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영웅이 한쪽 편을 드는데 정제국이 무슨 수로 이길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직접 미팅을 요청해 한껏 자세를 낮춘 것이다.

최치우를 중립 상태로 머물게 하는 데 정제국 캠프의 사활이 걸린 셈이었다.

“여의도가 참 무서운 동네입니다. 그런 헛소문이 떠돌고.”

최치우는 자기 입으로 소문을 부정했다.

이번에는 정제국이 질문을 던졌다.

“헛소문이었습니까? 허면 유경민 의원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성북동에서 짧게 만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대선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밝혔습니다.”

최치우도 일어났던 일을 숨김없이 알려줬다.

두 사람이 각자의 조각으로 퍼즐을 맞췄다.

정제국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어떻게 퍼졌는지 알겠습니다.”

최치우도 진상을 파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유경민 의원 캠프에서 소문을 냈겠군요. 올림푸스가 유영조 대통령님과 우호적인 관계라는 점을 이용해 그럴듯한 소문을 퍼트리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

“원래 절반의 진실이 섞인 거짓말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우리도 거기에 당했습니다.”

유경민의 의도는 명확했다.

뜬소문이라 해도 올림푸스 최치우가 유경민을 돕는다는 말이 퍼지면 손해 볼 게 없다.

어떤 후보에게 줄을 설지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자극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었다면 대부분 최치우가 돕는다는 유경민과 같은 배를 타기로 마음을 굳힐 것이다.

나중에 가서 소문이 거짓으로 밝혀져도 타격은 크지 않다.

유경민이 자기 입으로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니라서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한번 대세가 기울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최치우와 유경민은 성북동에서 굉장히 불쾌한 상황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경민 캠프는 최치우를 이용해 유리한 구도를 만들려고 헛소문을 퍼트렸다.

유경민에 대한 최치우의 불신은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헛소문은 유경민 의원에게 자승자박이 될 겁니다. 덕분에 오늘 정 의원님과 만나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듣던 대로 호쾌하십니다. 저도 최 대표님 말씀처럼 좋게 생각하겠습니다.”

최치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유경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무척 선한 인상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거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올림푸스의 CEO 최치우를 상대로도 그렇게 권위적인 자세를 보인다면 대체 다른 사람들에겐 얼마나 심할까.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최치우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건방진 유경민에게 내상을 입혔고, 똑똑히 알아들을 경고를 남겼다.

그런데 유경민 캠프는 근신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치우를 소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정제국 의원님.”

최치우의 목소리가 달려졌다.

한층 낮게 깔린 음성에는 위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정제국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채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는 어느 후보의 캠프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정 의원님을 도울 수 없습니다.”

최치우가 이미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정제국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곧이어 흘러나온 최치우의 본심은 야당의 잠룡인 정제국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유경민 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일은 막아야겠습니다. 그런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다시 말하지만 정 의원님을 돕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약속은 서로 중립을 지키는 것, 그 정도로 하죠.”

“최 대표님의 깊은 뜻, 잘 헤아리겠습니다.”

확실히 정제국은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더 큰 욕심을 내며 최치우의 이름을 팔아먹지 않을 것이다.

그런 수작을 부리다가 유경민이 최치우를 적으로 돌렸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이다.

“바쁘실 텐데 이만 일어나시는 게 어떨까요.”

“오늘 아주 즐겁고 인상적인 만남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말이 통하는 분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는 대통령이 되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감사를 표시하겠습니다.”

정제국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남기고 먼저 나갔다.

최치우는 두 명의 유력 후보를 만나고 노선을 정했다.

특정인을 돕는 데 올림푸스의 힘을 쓰지 않는다.

다만 유경민은 파멸시킨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사안이다.

“유 의원,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최치우의 음성이 맴돌았다.

신년 벽두부터 정국에 커다란 격랑이 몰아칠 것 같았다.

***

“조금 놀랐어요. 최 대표가 먼저 보자는 이야기를 다 하고.”

유영조 대통령이 차를 우려내며 말했다.

최치우는 청와대 안가에서 대통령과 단 둘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대통령은 늘 그렇듯 경호원과 수행비서도 물리고 최치우를 맞이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수석들도 대통령과 완전한 독대를 하기 힘들다.

그러나 최치우는 손가락 안에 꼽히는 특별 대상이었다.

“새해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최치우가 대통령이 건네준 찻잔을 받으며 대답했다.

평소 같으면 두 사람은 안뜰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1월의 날씨가 매섭고, 대통령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오늘은 실내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보다 더 바쁜 최 대표가 인사만 하러 청와대까지 온 것은 아니겠지요?”

유영조 대통령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이지만, 그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어설프게 앞뒤가 다른 유경민 같은 정치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레벨이다.

최치우는 유영조 대통령을 존중하기에 솔직한 심중을 털어놓았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

“우리 당의 유 의원을 만났다고 하던데……. 최 대표 성격이면 사단이 날 거라 생각했어요.”

“알고 계셨습니까?”

“만났다는 이야기만 들었지요. 내가 아는 유 의원과 최 대표를 떠올렸을 때, 두 사람이 손을 잡는 그림은 좀처럼 연상되지 않아서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유영조 대통령의 통찰력은 남달랐다.

그는 최치우와 유경민이 어울리지 못할 거란 사실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달그락-

최치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대통령을 똑바로 쳐다봤다.

쉽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대통령님. 계파를 떠나서 여당 후보가 당선되고, 정권을 재창출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야당 후보가 당선되면 대통령님의 안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겠죠. 그러나… 저는 유경민 의원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도록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최치우가 아니면 그 누구도 현직 대통령에게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대놓고 정권교체를 언급한 셈이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 구도를 보면 여당 후보가 교체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유경민의 낙선은 곧 야당 후보의 당선, 정권 교체를 뜻한다.

“최 대표는 정제국 의원을 돕기로 결정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정 의원이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지만, 그를 돕는 게 아니라 유경민 의원을 막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허허허, 이거 참……. 최 대표와 유 의원이 만났다는 말을 듣고 불안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게 좀 잘하지, 유경민 그 사람.”

유영조 대통령이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최치우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방금 전 대통령에게 대못을 박은 셈이다.

그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유영조 대통령은 더더욱 짙은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대통령이 받은 심리적 충격이 완화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게 최선이다.

후루룩-

유영조 대통령은 목이 마르는지 뜨거운 차를 단숨에 마셨다.

늘 평정심을 유지하는 대통령이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만큼 최치우의 결단이 몰고 올 여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결심이 섰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내가 어떻게 최 대표의 마음을 돌리겠어요.”

“죄송합니다.”

“아쉽지만 최 대표가 마음을 먹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

유영조 대통령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개인적 친분을 내세워 부탁하지 않았고, 대통령의 권위를 앞세우지도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최치우를 움직일 수 없다.

이제 와서 소울 스톤 발전소 건립을 중단시킬 수 없고, 세무조사 등으로 올림푸스를 괴롭혀 봤자 최치우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차라리 일찍 알게 돼 다행이었다.

정권 교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남은 1년 동안 행보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영조 대통령은 빈 잔에 차를 따르며 최치우를 쳐다봤다.

25살의 청년이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킹 메이커로 성장했다.

과거 유영조 대통령이 직접 훈장을 수여했던 바로 그 대학생이지만, 이제는 대통령보다 더 큰 존재가 됐다.

“어쩌면 우리가 청와대 안에서 만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선거를 떠나 노파심에 당부하고픈 말이 있어요, 최 대표.”

“네.”

“최 대표가 가진 커다란 힘……. 부디 사려 깊게 판단하여 좋은 곳에 써주도록 노력해 주세요. 그렇다면야 내가 물러나고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걱정이 없겠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나라를 이끄는 사회는 지나갔고, 최 대표처럼 자수성가한 젊은이들이 세계에서 대한민국을 알리는 시대이니까 말이지요.”

유영조 대통령의 진심이 전해졌다.

최치우가 여당 후보인 유경민을 떨어트리겠다는 충격 선언을 했음에도 대통령은 얼른 감정을 수습했다.

그리고는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최치우에게 기성세대로서 부탁을 남긴 것이다.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청년들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데 일조하겠습니다.”

머리 아픈 정무적 판단은 끝났다.

당장 내일부터 유경민은 보이지 않는 손의 방해를 받게 될 것이다.

최치우는 일선으로 돌아가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를 키우며 세상을 바꾸면 된다.

정치인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을 최치우는 해낼 수 있다.

그렇기에 결국 그 어떤 정치인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셈이다.

정치라는 낯선 영역에서 교통정리를 끝낸 최치우는 칼을 빼들었다.

그가 휘두를 칼날은 대한민국의 판도를 바꾸게 될 것 같았다.

유영조 대통령의 속마음처럼, 최치우는 이미 대통령을 넘어선 존재로 역사를 다시 쓰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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