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46화 (146/243)

# 146

<신년 의례>

새해가 밝아왔다.

올림푸스는 뻔한 종무식이나 시무식 행사를 열지 않는다.

직원들을 앉혀놓고, 호텔 연회장에서 세를 과시하듯 돈을 펑펑 쓰는 송년회 및 신년회도 없었다.

대신 그 예산을 연말 보너스에 녹였다.

유명 가수를 불러서 노래 몇 곡 듣고 수천만 원을 주는 것보다 직원들 보너스를 한 푼이라도 더 주는 게 훨씬 낫다.

최치우의 지론은 임동혁을 통해 실현됐다.

올림푸스의 자금을 관리하는 임동혁도 이왕 쓸 돈이라면 직원들에게 직접 전달하자는 뜻에 공감했다.

실리콘밸리의 퓨처 모터스도 마찬가지였다.

최치우는 떠들썩한 행사 대신 실리를 선택했고, 직원들의 만족감과 충성도는 알아서 높아졌다.

대망의 12월 31일과 1월 1일.

카운트다운을 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열린다.

최치우는 굵직한 행사에 연달아 초청을 받았다.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서 열리는 카운트다운 행사는 세계 최고의 신년 행사로 손꼽힌다.

서울에서는 보신각 타종 행사를 빼놓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뉴욕과 서울 모두 최치우를 초청했다.

세계적인 창업가이면서 올림픽 100m 달리기 출전이 예상되는 화제의 인물을 섭외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치우는 모든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 타임스퀘어나 보신각에 그가 나타나면 엄청난 환호성이 뒤따라올 것이다.

세계의, 또는 국민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기회다.

브랜드 이미지 측면에서 무조건 승낙하는 게 이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는 조용히 새해를 맞이하고 싶었다.

시끄러운 음악과 흥겨운 분위기, 잔뜩 모인 군중들 머리 위로 쏘아지는 축포.

이 모든 것 대신 최치우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TV 중계를 보는 걸 선택했다.

오랜만에 서대문 아파트로 들러서 집밥을 먹고, 소파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니 이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

“경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새해라고 사람들이 기뻐하는 걸 보니 좋구나.”

어머니가 TV 속 군중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치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은 더 좋을 거라는 기대감이,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라는 희망이 세상살이를 버티게 만드는 원동력이니까요.”

“정말 그래야 할 텐데, 요즘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이긴 하단다.”

“김밥 집도 예전 같지 않나요?”

“우리 가게야 손님 숫자는 고만고만하지만… 예전에는 참치김밥 먹었을 사람들이 요즘은 그냥 깁밥을 찾는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게 몸으로 느껴질 정도이니……. 다들 얼마나 힘이 들지.”

어머니의 얼굴 위로 근심이 떠올랐다.

사실 최치우가 차려준 김밥 집은 장사가 안 되어도 상관이 없다.

어머니는 평생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돈을 물 쓰듯 펑펑 써도 된다.

하나뿐인 아들 최치우의 추정 자산이 10조 원 이상이다.

그렇게 따지면 김밥 집을 운영하는 것도, 서대문의 아파트에 사는 것도 넌센스다.

하지만 어머니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성실하게 일하기를 원했고, 쓸데없이 사람을 쓰며 사치를 부릴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도 김밥 집 매출 걱정이 아니라 손님들 주머니가 얇아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최치우는 새삼 신기함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시절을 남 못지않게 겪었다.

그러다 아들이 세계적인 부자가 됐으면 보상 심리로 이것저것 욕심을 부릴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한결같이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보통 사람 중의 보통 사람인 어머니의 심성은 영웅으로 추앙받는 최치우에게도 미스터리였다.

‘세상을 떠받치는 건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들일지도.’

사소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역사를 보면 독보적인 전설을 쓰는 영웅들이 세상을 바꿨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상을 묵묵히 떠받치며 지키는 것은 어머니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천재라고, 영웅이라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면 안 된다.

현대에 오기 전, 다른 차원에서 최치우는 항상 압도적인 영웅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무시했고, 보통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몰랐다.

어쩌면 지금의 에릭 한센이나 네오메이슨처럼 혼자서 세상을 갖고 놀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최강이 되어도, 늘 좋지 않은 끝을 맞았다.

‘이번은 다를 거야. 난 달라졌어.’

최치우는 혼자가 아닌 함께 더 강해지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는 올림푸스를 이끌고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짓밟는 최고가 아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는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단순히 신의 경고를 전한 아바타의 미션 때문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나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동료들과 같이 싸우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새해에는 더 좋은 일만 있을 거 같습니다. 올림푸스도 그렇고, 우리나라에도. 제가 그렇게 만들게요.”

“그럼. 무거운 짐이지만 우리 아들이 해내야지.”

어머니가 대견하다는 듯 최치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느 집 아들이 대한민국에 좋은 일을 만들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올림푸스의 CEO 최치우가 마음을 먹으면 한국 경제를 일으키고,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올해는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간다.’

최치우는 어머니와 앉은 자리에서 남모를 각오를 다졌다.

올림푸스는 이미 한국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다음 목표는 당연히 전 세계다.

유명세로 따지면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는 손색없는 글로벌 기업이다.

그렇지만 국제 경기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레벨은 아니었다.

소울 스톤 발전소가 준공되고, 신형 전기차가 제주도에 풀리며 올림픽과 대선이 열리는 새해, 아니 올해.

최치우의 목표는 작년에 이뤄놓은 성과를 지키는데 머물지 않았다.

그는 축구계의 명장 히딩크가 남긴 말처럼 여전히 배고픈 상태였다.

10조를 넘게 벌었어도 최치우의 야망에 비하면 티끌이다.

페이스북의 CEO 주커버그는 무려 50조 원의 돈을 사회 환원하며 일약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올림푸스는 기적 같은 성장을 계속 거듭해야 한다.

물론 불과 1년, 2년 전에는 최치우와 마크 주커버그를 비교하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언론이 먼저 최치우와 주커버그,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기 시작했다.

최치우는 어머니와 함께 맞이한 새해를 올림푸스가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는 원년으로 삼겠다고 작정했다.

그의 원대한 야망은 새해에도 한계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

1월 1일이 지나가고 며칠 뒤, 최치우는 별로 반갑지 않은 연락을 두 개나 받았다.

먼저 첫 번째 연락은 김도현 교수로부터 온 것이었다.

S대에서 미래 에너지 탐사대를 총괄하는 김도현 교수는 최치우의 멘토이다.

이제껏 김 교수의 연락을 받고 기분이 나빴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동해에서 얻은 운딘의 소울 스톤이 완전히 파괴됐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실험 결과가 나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망설이는 김도현 교수에게 강력히 실험을 권한 사람이 바로 최치우였다.

그렇기에 실험 결과를 두고 김도현과 미래 에너지 탐사대 연구진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짙은 아쉬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정령왕의 권능을 받아 강화된 운딘의 소울 스톤은 만만치 않은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

만약 나사(NASA) 같은 특수 기관에 판매했다면 수천억 원을 받고도 남는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실험으로 운딘의 소울 스톤은 산산조각이 났고, 영영 사라진 것이다.

동해 바다에서 난데없이 운딘을 만나 힘을 쏟아냈던 최치우의 노력도 물거품이 됐다.

그럼에도 속이 쓰라리지 않다면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잊어버리자. 헛수고를 한 건 아니니까.’

최치우는 아쉬움을 털어내고 긍정적인 측면을 바라봤다.

김도현 교수는 운딘의 소울 스톤으로 실험을 하며 몇 가지 단서를 얻었다.

현재로선 25% 수준인 실험 성공률을 끌어 올릴 수 있는 단서였다.

최치우는 앞으로 더 많은 소울 스톤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실험 성공률이 낮으면 효율이 떨어진다.

당장 몇 개의 소울 스톤을 못 쓰게 돼도 실험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훨씬 이득이다.

‘냉정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어차피 당장 몇천 억 정도가 없어도 아쉽지 않으니까. 성공률이 50%까지만 올라와도 어마어마한 기회가 열린다.’

최치우는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자신을 다독였고, 실의에 빠져 있는 미래 에너지 탐사대도 추슬렀다.

김도현 교수와 국내외 여러 교수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들이 주눅 들면 안 된다.

리더는 아랫사람들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자신감을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어야 한다.

최치우는 새해 정초부터 세계적인 석학들을 지탱하는 리더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연락은 직접 몸을 움직여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또 한 명의 유력한 대선 후보, 야당의 정제국이 미팅을 요청한 것이다.

최치우는 이미 여당의 유경민을 만나 불쾌한 기억만 남기고 돌아왔다.

그렇기에 정제국을 만나고픈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마냥 피할 수 있는 요청은 아니었다.

최치우가 유경민을 만났다는 소문은 어느 정도 퍼졌을 것이다.

비공개로 미팅을 해도 소문을 완전히 막을 순 없다.

만약 유경민을 만나고 정제국을 만나주지 않으면 오해를 사기 쉽다.

최치우는 괜히 여당 유경민을 지지한다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키지 않아도 정제국을 만나볼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올해 12월 대선에서 유경민과 정제국 중 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 정보를 수집한다고 생각해야지.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유력 대선 후보를 만나는 게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둘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됐을 때,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펼칠지 남들보다 앞서 감을 잡을 수 있다.

유경민이 대통령이 된다면 권위적으로 기업들을 다스리려 할 것 같았다.

이만한 정보를 미리 갖고 있으면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정제국의 캐릭터까지 파악하면 올림푸스는 1년 뒤를 내다보게 되는 셈이다.

‘그래도 기본적인 개념은 갖춘 사람이라서 다행인가.’

최치우는 정제국을 기다리며 유경민과 다른 점을 분석했다.

유경민은 성북동 자택으로 최치우를 불렀다.

반면 정제국은 약속 장소를 올림푸스에서 편한 곳으로 정하라며 위임했다.

만남을 요청하면서 최치우의 편의를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사회생활에서 당연한 예의지만, 거물 정치인들은 유경민처럼 자기 위주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정제국은 기본을 지켰다.

본인의 성품 탓인지, 아니면 보좌관들이 유능해서인지는 만나보면 알게 될 것 같았다.

똑똑-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특급 호텔의 VIP 미팅룸은 은근히 아날로그적이었다.

자동 기계 대신 믿을만한 전담 직원이 일일이 서비스를 해주는 방식이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TV에서 가끔 보던 정제국이 혼자 들어왔다.

큰 키와 각 잡힌 어깨, 환갑의 나이를 감추도록 깔끔하게 염색 된 검은머리.

그리고 선이 굵은 이목구비는 분명 미남형이지만 다소 차가워 보이기도 했다.

외모로는 유경민이 훨씬 온화한 사람이고, 정제국은 무섭고 딱딱한 정치인 같았다.

하지만 첫인사부터 달랐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림푸스의 최치우 대표님.”

정제국은 먼저 허리를 숙이며 최치우를 추켜세웠다.

환갑을 넘긴 거물 정치인답지 않게 자신을 낮추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최치우도 정제국의 인사를 받고 내심 깜짝 놀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 의원님.”

“신년부터 최 대표님을 만났으니 올해는 운수가 대통할 것 같습니다.”

대놓고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만 제법 자연스러워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적어도 정제국은 최치우를 어리다고, 또는 기업인이라고 내려다보지 않는 듯했다.

속내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만나지 10초밖에 안 지났지만, 최치우는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정제국 이 사람, 듣던 것보다 뛰어나다. 유경민이 권력에 취한 하수라면… 정제국은 칼을 숨길 줄 아는 고수로군.’

최치우는 눈을 빛내며 정제국을 다시 쳐다봤다.

정제국의 공손한 태도는 가면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봐가며 가면을 쓸 줄 안다는 게 무서운 점이다.

최치우는 유영조 대통령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여당 잠룡인 유경민보다 야당의 정제국과 말이 통할 것 같았다.

마주앉은 두 사람 사이로 훈풍이 불었다.

정제국은 최치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도와달라는 말씀, 큰 부담인줄 알기에 감히 드리지 않겠습니다. 허나 최 대표님께서 저의 반대편에만 서지 말아주십시오. 그리만 해주신다면 이 정제국,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 올림푸스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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