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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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은 기묘한 동네다.
산자락 언덕에 저택들이 늘어선 강북의 전통적인 부촌(富村)이다.
특히 성북동 인근에는 외국 외교관들의 공관과 사택이 많이 모여 있다.
그러나 평창동, 한남동 같은 강북의 다른 부촌과 성북동은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부자들의 저택이 늘어선 언덕 맞은편은 달동네라는 사실이다.
부촌에서 달동네가 바로 보이고, 마찬가지로 달동네에서도 부촌을 바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서울 시내에서 극명한 빈부 격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동네가 바로 성북동이었다.
최치우는 성북동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오르며 이상한 점을 느꼈다.
저택이 모인 동네는 우리나라가 아닌 LA 비버리힐스를 연상시켰다.
땅값이 너무 비싸 아파트를 다닥다닥 짓고도 집이 모자란 서울에서 초호화 저택은 사치 중의 사치다.
그런데 고개를 살짝만 돌리면 오래 된 연립주택이 즐비한 반대편 언덕이 보인다.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광경은 최치우에게 독특한 인상을 심어줬다.
“도착했습니다, 대표님.”
그때 운전대를 잡은 직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보통 최치우는 롤스로이스 레이스를 직접 운전하며 다닌다.
하지만 오늘은 올림푸스 직원이 운전하는 법인 차량을 이용했다.
서울에서 몇 대 없는 롤스로이스가 유경민의 자택 입구에 주차를 하면 금방 소문이 퍼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오는 길에 자세히 살펴봤는데 괜찮은 것 같습니다. 원체 걸어 다니는 사람이 드문 동네고, 시간도 늦어서 안전해 보입니다.”
“오케이, 수고했어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최치우는 직원의 어깨를 두드리고 차에서 내렸다.
‘금수저 끝판왕이라더니, 사는 집도 때깔이 다르군.’
유경민의 저택 담벼락은 유럽의 성채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그야말로 전통적인, 90년대 이전 부자들이 선호하 는 저택이었다.
요즘 재벌 2세나 3세들은 편리한 아파트 펜트 하우스나 고급 빌라를 선호한다.
어떤 집에 사는지만 봐도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최치우는 유경민이 매우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일 거라 예상했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니 군더더기 없는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라는 의례적인 물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유경민도 최치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끼이이익!
기다렸다는 듯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최치우는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거슬러 올랐다.
완만한 계단을 올라가니 넓은 정원이 나왔다.
정원사들이 공들여 관리한 티가 나는 정원 너머에 3층 저택이 보였다.
현관 입구에는 유경민의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표님. 저는 유 의원님의 수행비서입니다.”
“반갑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수행비서가 길을 안내했다.
유경민은 저택 2층의 서재에서 최치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최치우가 불쾌함을 느껴도 되는 상황이었다.
자택을 방문한 것부터 최치우는 많이 양보를 한 셈이다.
그런데 공손하긴 해도 수행비서를 먼저 내세우고, 유경민은 서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건 결례였다.
국회의원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손님을 대한다.
누구를 만나도 자신보다 아랫사람으로 대우하는 게 익숙해진 탓이다.
재벌 총수들도 정치인들에게는 한 수 접어주기 때문에 생긴 관행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 만나보고 판단해야지.’
최치우는 2층 서재 앞에서 편견을 버리려 애썼다.
그는 국회 국토교통위 회의에서 김호태 같은 저질 정치인을 혼내준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껏 최치우가 만난 정치인들은 대부분 수준 이하였다.
그러나 유영조 대통령은 훌륭한 인물이고, 유경민은 대통령과 같은 여당의 대선 주자다.
그렇기에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똑똑-
“의원님, 최치우 대표님 오셨습니다.”
“크흠.”
방 안에서는 대답 대신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수행비서는 익숙한 듯 당황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럼 이만…….”
최치우 혼자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수천 권의 도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개인 서재가 아니라 작은 서점에 온 것 같았다.
유경민은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최치우를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손짓으로 앞쪽 의자를 권할 뿐이었다.
“명성은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여기 앉게.”
대뜸 반말이 나왔다.
현기 자동차의 홍문기 부회장처럼 상스러운 반말은 아니었지만, 초면에 마음대로 말을 놓는 건 똑같았다.
최치우는 의자에 앉아 유경민을 쳐다봤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첫인상을 결정한다.
유경민의 인상은 점잖은 학자 같았다.
그렇지만 접객부터 반말까지, 여러 이유가 겹쳐져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전형적인 꼰대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학자를 거쳐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한 대선 후보.
그런 사람이 꼰대가 아니면 더 이상한 일이다.
새삼 대통령이 되고도 온화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유영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긴히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최치우는 인사를 생략했다.
기분이 좋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유경민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가 이내 가식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당차단 말이지. 그래, 피차 바쁜 처지이니 본론을 바로 말하겠네.”
최치우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유경민의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었다.
“이제 대선이 1년 남지 않았나. 그래서 말인데… 최 대표가 적당한 시기에 우리 캠프에 이름을 올려줬으면 하네. 정책 자문위원이든 뭐든 괜찮은 직함은 얼마든지 있으니.”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제안이었다.
어쩌면 대선이 열리는 내년 12월까지 1년 동안 비슷한 제안을 지겹게 들어야 할지 모른다.
최치우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정치에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자세였다.
유경민의 첫인상이 나쁘기 때문은 아니다.
처음부터 현실 정치에 깊숙이 발을 담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치란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피곤한 생물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이익을 챙기는 게 낫다.
먼 훗날, 최치우가 원한다면 대통령도 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사업에 집중 할 때다.
정치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보다 세계 시장에 우뚝 서는 게 훨씬 어렵고 또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유경민은 최치우의 거절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정치를 하라는 게 아니라 이름만 빌려달라는 말인데 이해가 안 되나? 우리 당이 배출한 대통령이 올림푸스에 얼마나 많은 것을 퍼줬는데, 은혜는 갚아야지.”
유경민이 말실수를 했다.
해서는 안 될 말로 최치우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성북동에 도착했을 때부터 오래 참고 있던 최치우의 인내심이 투둑 끊어졌다.
고오오오오-
말없이 앉아있는 최치우의 몸에서 스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일반인은 감당할 수 없는 살기가 유경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흐, 흐읍…….”
유경민의 호흡이 거칠어졌고, 이마에선 때 아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최치우는 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말했다.
“올림푸스와 청와대는 정당한 거래를 할 뿐, 은혜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정경유착을 당연시하는 의원님의 말씀. 대단히 불쾌합니다.”
“이 친구… 지금 무슨 기회를 걷어차고 있는지 모른단 말인가?”
유경민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할 말을 뱉었다.
과연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잠룡다웠다.
하지만 최치우는 권력 앞에서 겁을 먹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권력을 완전히 박살 낼 수도 있다.
쾅-!
최치우가 한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동시에 퍼져 나간 살기는 유경민의 숨통을 옥죄고, 내상을 입혔다.
“크헙!”
유경민이 속이 답답한 듯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아마 내상 때문에 몇 주는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건들지 않고, 무형의 기운으로 유경민을 응징한 최치우가 입을 열었다.
“정치에 빌붙어 주어지는 기회 따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기회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거니까.”
말을 할수록 최치우의 기세가 거세어졌다.
유경민은 점점 큰 압박을 느끼는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최치우는 살기를 줄이지 않고 봇물처럼 속마음을 쏟아냈다.
“저택에 앉아 기업인들 부르지 말고, 그 시간에 바로 옆 달동네에서 서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느껴보길 바랍니다. 그래야 대선에서 이길 확률이 1%라도 올라갈 테니. 알겠습니까?”
“크흐으음…….”
“유 의원, 대선이 1년 남았습니다. 오늘 나에게 범한 무례의 사과는 당신이 청와대를 차지하고 나서 받아주겠습니다. 물론 선거에서 진다면… 다시는 만날 일도 없을 겁니다.”
최치우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다.
대선에서 이기고, 대통령이 되면 잘 봐달라는 말이 아니다.
그제야 겨우 사과를 받아주겠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조차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반면 대선에서 패배하면 유경민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겠다고 밝혔다.
아무리 거물 정치인이라고 해도 먼지처럼 여길 수 있다는 말이다.
유경민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씩씩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최치우의 살기에 짓눌려 내상을 입었으니 한동안 기력이 쇠할 것이다.
타악!
서재 문을 닫고 나오니 2층 복도에 수행비서가 서있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차마 최치우를 쳐다보지 못했다.
안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들었을 터,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먼저 갑니다. 안내는 필요 없습니다.”
최치우는 차가운 말을 남기고 수행비서를 지나쳤다.
그는 별다른 잘못을 하지 않았다.
그저 주인을 잘못 모시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선택이고 책임이다.
성북동 저택을 빠져나온 최치우는 직원을 호출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가 금방 저택 앞으로 다가왔다.
“미팅이 일찍 끝나셨습니다, 대표님.”
최치우가 너무 금방 나오자 직원이 의아한 듯 질문을 했다.
명색이 여당의 잠룡과 만났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조수석에 앉아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유경민 의원, 여당이라고 들었는데. 유영조 대통령님과 가까운 사이입니까?”
“아닙니다. 같은 여당이지만 대통령과 반대 계파입니다. 원래 현직 대통령과 차기 대선 후보는 사이가 나쁜 게 국내 정치의 오랜 습성입니다.”
“역시 그렇군.”
최치우는 조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차가 움직여 언덕길을 내려왔다.
달동네와 부촌이 마주보고 있는 성북동을 벗어나기 직전, 최치우는 운전을 하는 직원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백승수 팀장에게 말해서 올해 CSR 예산을 추가 편성 하라고 전하세요. 성북동 달동네 주민들 난방비와 생필품 지원으로.”
“네, 대표님.”
최치우의 말 한 마디로 엄청난 액수의 사회공헌예산이 성북동 달동네 주민들에게 편성됐다.
맞은편 부촌의 저택에서 오만한 정치인을 만나서일까.
왠지 그러고픈 마음이 들었다.
유경민 덕분에 최치우는 거물 정치인의 더러운 속성을 알게 됐다.
유영조 대통령처럼 담백한 사람은 무척 드문 편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유경민과 비슷할 것 같았다.
여당과 야당의 문제가 아니다.
야당의 김호태 의원도 국회에서 현기 자동차의 로비를 받고 최치우를 공격하려다 큰 코를 다쳤다.
정치인들은 기업인을 깔보고, 손쉽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사회에 기여를 하는 것은 올바른 기업인들이다.
최치우는 뭔가 결심을 한 듯 혼잣말을 읊조렸다.
“정치가 올림푸스의 발목을 잡으면… 전부 밟아버려야겠군.”
지금처럼 유영조 대통령 같은 상식적인 정치인과 정당한 거래를 하면 더 바랄 게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 바뀌고, 다른 정치인들이 관행대로 올림푸스를 귀찮게 하면 최치우도 참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의도 국회를, 그리고 청와대를 밟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최치우의 생각은 언제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섭다.
유경민은 혼자서만 책임질 수 있는 잘못을 한 게 아니라 아주 큰 실수를 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