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42화 (142/243)

# 142

<질주>

독도 현장을 살펴보고 돌아온 최치우는 약속을 지켰다.

가스 사업단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사실 국가사업을 후원해 봤자 당장 돌아오는 이익은 거의 없다.

초창기 국민 관심이 폭발적이었을 때처럼 홍보 효과를 누리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의 결심은 확고했다.

임동혁과 백승수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독도와 인연이 없지 않다.

백승수는 미래 에너지 탐사대 멤버로 최치우와 함께 독도를 다녀왔었다.

임동혁 역시 독도 프로젝트 때문에 최치우에게 30억 원을 투자하며 재계의 망나니에서 황태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올림푸스의 실무를 책임지는 임동혁, 백승수가 동의했기에 지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최치우는 독도 프로젝트에 마음을 놓고 행사를 준비했다.

어느새 11월 15일, 손기정 기념 육상 선수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언론에서는 이미 최치우가 100m 달리기 시합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벤트 시합 이상의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년 올림픽을 앞두고 육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최치우가 나섰다고 생각했다.

올림푸스가 육상 선수권의 후원사가 됐으니 그림은 나쁘지 않았다.

아마추어도 참여할 수 있지만, 굳이 쟁쟁한 선수들 틈에서 고생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손기정 선수권 우승자에게는 국가 대표 선발전 출전권이 주어진다.

상식적으로 최치우의 1차 예선 통과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르다.

유영조 대통령, 임동혁, 그리고 이상태 감독은 선수권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24살의 나이로 세계적인 기업을 이룩하고, 수십조 원의 부자가 된 전설적인 청년 CEO 최치우의 또 다른 진면목을 온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문무쌍전(文武雙全)이란 말은 머나먼 삼국시대의 사자성어다.

주유, 능통, 태사자 등 일당백의 무력과 모사의 지략을 갖춘 기재들에게 주어지는 찬사였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할수록 문무쌍전인 사람을 찾기 어려워졌다.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전문 분야 하나만 파고들어도 최고가 되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치우는 독보적 신인류로 우뚝 설 수 있다.

지나치게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임동혁이 우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최치우는 단순히 병역 면제만을 위해 100m 달리기 출전을 결정한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병역을 해결하기 위해 달리기라는 방법을 찾아냈지만, 이후로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제껏 동양인이 한 번도 넘지 못한 벽을 깨부순다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단지 육상 기록 하나만 갈아치우는 게 아니다.

육체의 한계 따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다면, 산업혁명 이후 서양에 눌려왔던 동양의 혼을 일깨울지 모른다.

문화와 산업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돼 있다.

최치우는 달리기로 수십억 아시아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다.

11월 15일은 최치우로 인해 또 하나의 역사가 바뀌는 날이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마라톤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되살렸던 손기정을 기리는 날.

바로 그날, 최치우는 대한민국과 아시아의 기수가 되어 누구보다 빨리 달릴 작정이었다.

***

“스타트 자세라고 해도 별거 없습니다.”

“엄청 중요한 거 아닙니까?”

“물론 선수들에게는 중요합니다. 자세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기록을 0.1초라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표님은…….”

이상태 감독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최치우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둘은 테스트 이후 몇 번 만나서 제법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결국 이상태 감독이 본심을 토로했다.

“대표님은 선수가 아니라 괴물이니까, 자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서서 출발해도 9초를 찍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라고…….”

최치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다.

적나라하게 솔직한 이상태 감독의 말이 100%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스타트 자세는 아무 의미가 없다.

선수들은 한창 달릴 때 팔의 각도와 다리의 폭까지 계산한다.

그러나 최치우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근력을 폭발시키면, 혹은 내공을 아주 살짝만 쓰면 세계신기록도 우습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8초의 벽을 깨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만약 실수로 8초보다 빨리 달려 버리면 진짜 외계인 취급을 받을지 모른다.

한바탕 웃은 최치우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도 기본은 해야죠. 스타트부터 달리기 자세까지, 남들이 봤을 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혹시 자세 때문에 대표님의 기록이나 페이스가 줄어들까 봐…….”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상태가 염려하는 건 최치우의 기록 단축이다.

그는 최치우가 일부러 천천히 달려서 9초를 마크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설픈 육상 자세는 최치우에게 마이너스가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아니 아시아 최초의 단거리 육상 금메달 감독이 되고 싶다는 이상태의 꿈은 진지했다.

최치우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괜한 근심을 덜어줬다.

“감독님, 나는 어떤 자세로 달려도 세계신기록을 깰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선수 경력이 전혀 없는 최치우가 국가 대표 감독을 닦달하고 있었다.

이상태 감독은 얼치기가 아니다.

육상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정통파 감독이다.

하지만 그도 최치우 앞에만 서면 어리버리한 초보 감독으로 변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막 달려도 9초를 돌파하는 괴물 같은 사람은 난생 처음이었다.

미국이나 자메이카 국가 대표 감독이 와도 똑같을 것이다.

“허리를 살짝 들고… 무게 중심은 약간만 앞으로.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게 준비하는 겁니다.”

“중심을 어느 정도 앞에 두면 될까요?”

“선수들에게는 10점 만점에 6.5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디테일해서 좋군요.”

최치우는 이상태 감독의 가르침에 만족했다.

그를 믿고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니 진가가 발휘됐다.

역시 아무나 국가 대표 감독을 하는 게 아니었다.

스타트 자세를 배운 최치우는 달리기 자세로 진도를 쭉쭉 뺐다.

완벽할 순 없지만, 남들이 볼 때 육상 선수 같은 모양새가 나오면 된다.

그럼 오래전부터 육상을 좋아하며 훈련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다.

최치우는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이상태 감독과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감동적인 스토리를 선보이기 위해서는 그만큼 준비가 필요하다.

나쁘게 말하면 사기극에 가깝지만, 최치우는 역사를 다시 쓰려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을 옮기는 원대한 계획이다.

얼떨결에 합류한 이상태 감독도 최선을 다해 노하우를 전수했다.

약속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최치우는 이상태 감독의 레슨을 기억했다.

자세 하나만 몸에 익히는 건 최치우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무공을 수련하며 형(形)과 식(式)을 깨우쳤다.

무공 초식은 운동 자세보다 훨씬 더 난해한 동작이다.

금강나한권과 아랑권 초식을 통달한 최치우에게 달리기 자세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몇 번의 반복 훈련 덕분에 최치우는 육상 선수 못지않은 자세를 외우게 됐다.

이제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처억-!

운동복을 입은 최치우가 스타트 라인에서 자세를 잡았다.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관중들이 벌써부터 탄성을 흘렸다.

“와아-!”

“자세가 제대로인데?”

“그러게, 육상에 관심 많았다는 기사를 봤는데 진짜인가 보네.”

실내 운동장에는 전례 없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찼다.

국내에서 열린 육상 대회가 이런 관심을 받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모두 최치우의 100m 달리기 출전이 만들어낸 결과다.

11월의 날씨는 꽤 쌀쌀해서 실내 운동장의 공기도 차가웠다.

하지만 최치우 덕택에 고조된 관중들의 열기가 추위를 물리치고 있었다.

“정우성보다 더 멋있지 않아? 빽도 없이 올림푸스를 만들고,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육상 대회에 나와서 관심도 일으키고. 후원도 해주고 말야. 저런 남자 또 없겠지?”

“생긴 건 정우성이 낫지만, 최치우만 한 남자가 한국에 누가 있겠어. 저런 사람 만나고 싶으면 살부터 빼.”

“너어!”

젊은 여성 관중들이 최치우를 보며 수다를 떨었다.

최치우는 2년 전부터 웬만한 아이돌이나 영화배우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로 국내 기업 시총 2위에 등극한 지금, 어떤 연예인도 최치우와 비교하면 초라해진다.

마치 아이돌 콘서트 현장처럼 젊은 여성 관중의 비율이 높은 것도 당연했다.

관객들만 보면 육상 선수권이 아닌 것 같았다.

‘침착하게… 흥분해서 너무 빨리 달리면 곤란해지니까.’

최치우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관심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관중들만 난리가 난 게 아니었다.

육상 선수와 대회 관계자들도 최치우를 힐끔힐끔 신기하게 쳐다봤다.

나쁜 뜻은 없을 것이다.

TV와 뉴스에서 보던 세계적인 CEO를 직접, 그것도 육상 대회 참가 선수로 만나니 신기 할 수밖에 없다.

올림푸스가 육상 선수권을 후원했기에 대놓고 고맙다고 말한 선수들도 있었다.

작년과 달리 대회 상금과 시설 지원 등이 풍족해졌다.

또 육상 선수들은 최치우 덕분에 평생 최고의 관심을 받게 됐다.

그들이 최치우의 이벤트성 출전을 나쁘게 보지 않고, 고마워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모든 것은 최치우가 1차 예산에서 탈락할 것을 전제로 한 이야기다.

최치우를 응원하는 여성 팬들도 1차 예선 탈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저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 진짜 선수들 틈에서 예선 통과를 할 거라고 누가 기대하겠는가.

“스텝-!”

그때였다.

드디어 출발 직전 기계음이 울렸다.

웅크리고 앉아있던 선수들이 허리를 높이 들고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곧이어 총성이 터졌다.

타앙!

8명의 선수들이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실내 운동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

“와아아아아아아-!”

길고 긴 함성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3번 레인의 선수가 나머지 7명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압도적인 스피드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비록 1차 예선이지만 전직 국가 대표부터 전국체전 메달리스트까지, 결코 만만하지 않은 선수들이 출전했다.

그러나 3번 레인의 선수는 독보적이었다.

피니시 라인 근처에서는 살짝 여유를 부리며 선두로 통과했다.

전광판을 쳐다본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9초 98! 9초, 9초다-!”

“9초오오오오오!”

오래전부터 육상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목청이 터지도록 괴성을 내질렀다.

손기정 기념 육상 선수권 직전까지 한국 신기록은 10초 07이었다.

1차 예선에서 한국 신기록은 물론이고, 동양인들에겐 절벽과 같았던 마의 9초대가 깨진 것이다.

“3번 누구야? 김동영인가?”

“김동영? 근데 김동영은 다음 조 아니었어?”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다.

전광판에는 최치우(chiwoo-choi)라는 이름이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었다.

“설마 3번 레인이……?”

경기장 안의 단 한 사람, 이상태 감독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경기를 지켜본 관계자와 관중들, 특히 함께 달린 선수들은 집단 패닉에 빠졌다.

이벤트로 출전한 올림푸스 CEO 최치우.

그가 바로 9초 98로 한국 신기록을 경신한 3번 레인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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