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최치우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음으로 울린 메시지를 의심했다.
사념을 발산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최상급 정령부터 가능한 일이다.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자랑했던 상급 불의 정령 샐러맨더도 메시지를 전달하진 못했다.
최상급으로 진화하지 않는 이상 인격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미약한 존재인 하급 정령이 언어를 초월한 의사소통을 해냈다.
아슬란 대륙에서 정령에 대한 지식을 쌓은 최치우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정령의 대적이여, 너에게 심판을 내릴 것이다.]
똑같은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울렸다.
다행히 소리가 나는 걸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급 물의 정령 운딘의 메시지는 오직 최치우의 마음 안에서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건…….’
최치우는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했다.
운딘은 최상급 정령 아도니스처럼 자신의 의지를 전하는 게 아니었다.
마치 반복 버튼을 누른 스피커처럼 같은 의지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메신저로 쓰이고 있군.”
최치우는 늦게나마 감을 잡았다.
운딘은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자신의 의지로 무서운 경고를 반복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운딘에게 메시지를 심어놓고, 마나의 작용이 느껴지면 사념을 발산하도록 조종한 것이다.
파직- 파지직-
최치우는 내공을 일으켜 주먹에 담았다.
당장이라도 운딘을 소멸시킬 수 있다.
하급 정령은 최치우에게 한입거리도 안 된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눈앞의 운딘은 평범한 하급 정령이 아니었다.
과연 메시지만 심어져 있을까, 아니면 다른 위험한 능력도 함께 심어졌을까.
최치우의 의심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정령의 대적이여, 너에게 심판을 내릴 것이다.]
똑같은 의지를 반복하던 운딘이 갑자기 섬광을 토해냈다.
슬라임을 닮은 물방울 덩어리에서 푸른빛이 사방으로 솟구친 것이다.
최치우에겐 낯설지 않은 섬광이었다.
최상급 물의 정령, 아도니스가 뿜어내던 빛과 매우 비슷했다.
‘위험하다!’
최치우는 섬광을 피해 몸을 날렸다.
판단이 늦었다면 꽤나 곤란했을 것이다.
주먹 크기의 운딘이 바위처럼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커다랗게 몸집을 불린 운딘은 제자리에서 떠올랐다.
부웅-
물방울로 이루어진 바위가 10㎝ 정도 도약했고, 곧장 다시 갑판을 내리찍었다.
쿠우우웅!
엄청난 충격이 후미의 갑판을 반으로 갈랐다.
어찌할 틈도 없이 배가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고 사자후를 터트렸다.
“배가 침몰합니다! 구조 신호 보내고, 모두 탈출하도록-!”
내공이 담긴 사자후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갑작스런 충격과 사자후에 화들짝 놀란 선원들이 구명조끼를 찾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원들은 왜 배가 충격을 받고 침몰하는지 몰랐다.
멀쩡하던 배가 아무런 예고 없이 기울어졌다.
그렇기에 후미를 살펴볼 경황도 없었다.
그나마 최치우의 사자후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탈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최치우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갑판을 찍어 배를 침몰시킨 운딘은 바닷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
탈출하느라 정신이 없는 선원들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마냥 다행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운딘이 메시지를 전한 것, 그리고 몸집을 키워 배를 침몰시킨 것 모두 예사롭지 않았다.
하급 정령에게 이런 능력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정령왕이겠지.’
답은 하나밖에 없다.
물의 정령왕이 운딘을 조종한 게 분명하다.
정령왕은 독자적인 이름을 가진 특별한 존재다.
최상급 물의 정령은 각각의 인격이 있지만, 무조건 아도니스란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정령왕은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있다.
고유하고 독보적인 존재로서 정령들을 통치하는 반신(半神)이나 마찬가지다.
아슬란 대륙에서도 최상급 정령과 정령왕은 만나기 어려웠다.
한 번 등장하면 대륙에 어마어마한 풍파를 일으키고 사라졌다.
최치우는 현대에서 본의 아니게 정령 헌터가 됐다.
소울 스톤으로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결과, 드디어 정령왕의 직접적인 경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베네수엘라에서 소멸시킨 최상급 물의 정령 아도니스는 유언처럼 저주를 남겼었다.
정령왕이 최치우를 찾아내 복수를 할 거라는 말이었다.
아도니스의 유언은 허풍이 아니었다.
물의 정령왕과 싸워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 이놈부터 처리하고……!’
최치우는 복잡한 생각을 거뒀다.
배를 침몰시킨 운딘부터 소멸시키는 게 먼저다.
운딘은 정령왕의 기운을 받아 기형적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배가 침몰하며 최치우는 운딘과 함께 차가운 동해 바다에 빠졌다.
물의 정령은 수중에서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급 정령이라고 만만히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구조선이 도착하기 전, 물에 빠진 선원들이 안정을 찾고 뒤를 보기 전에 재빨리 소멸시켜야 한다.
푸확-!
최치우는 차가운 바닷속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완전히 잠수한 것이다.
수영 선수들도 바다를 겁낸다.
그렇지만 최치우에게 동해 바다는 어머니의 품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운딘을 찾았다.
몸집이 거대해진 운딘은 배를 침몰시킨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수면 바로 아래에서 동동 떠 있는 모습이 귀엽게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바다는 물의 정령들의 힘을 증폭시키는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다.
아니나 다를까.
최치우를 발견한 운딘이 수중에서 회오리를 만들었다.
쏴아아아-!
거센 물줄기가 최치우를 향해 쏘아졌다.
최치우는 파도의 영향으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내공을 담은 발길질로 몸을 틀어 회오리를 피할 수 있었다.
‘역시 하급 정령의 공격이 아니다. 정령왕의 권능이 깃들었어!’
최치우는 숨이 가빠오는 걸 느끼며 이를 꽉 깨물었다.
운딘은 최상급 물의 정령 아도니스를 연상시키는 회오리를 뿜어냈다.
‘시간은 없고……!’
최치우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격필살이 아니면 곤란하다.
정령왕의 권능을 받은 운딘과 바다 가운데서 오래 싸울수록 불리해질 뿐이다.
고오오오-
최치우가 마나를 모았다.
평범한 하급 정령이었다면 마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최치우는 무려 7서클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래비티!’
입을 벌릴 수 없어 속으로 주문을 외쳤다.
곧이어 중력을 자유자재로 다스릴 수 있는 7서클 마법이 펼쳐졌다.
슈슈슉!
운딘의 몸체가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다.
보이지 않는 밧줄에 묶여 끌어당겨지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래비티의 권능 때문이다.
최치우는 중력을 거꾸로 작용시켜 한강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던 박우식을 살렸었다.
이번에는 중력을 강화시켜 운딘의 몸집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조준 완료!’
이윽고 운딘이 최치우의 발아래로 내려왔다.
버둥거리며 사방으로 물줄기를 쏘지만, 그래비티를 깨트릴 힘은 없었다.
최치우는 다시 한번 7서클 마법을 펼쳤다.
이번에는 자기 자신에게 중력을 강화시켰다.
‘그래비티!’
슈우우우욱-!
최치우의 몸이 순식간에 바닷속 깊이 역주행했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그의 주먹은 방금 전 아래로 옮겨놓은 운딘을 노리고 있었다.
첫 번째 그래비티로 운딘을 아래에 묶어놓고, 두 번째 그래비티로 추진력을 얻어 물속에서 낙하한 것이다.
탁월한 임기응변이었다.
7번의 환생을 거듭한 사람다운 전투 센스가 빛을 발했다.
파아악!
그의 주먹이 운딘에게 꽂혔다.
새롭게 수련 중인 권왕의 아랑권, 맹아일격(猛牙一擊)이 수중에서 폭발했다.
퍼벅- 퍼버버버벅-!
바위처럼 부풀었던 운딘의 몸체가 산산조각 났다.
슬라임을 닮은 형상이 잘게 부서지며 바다에 흡수됐다.
그 순간, 운딘은 마지막으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했다.
[바로 이곳에서 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섬뜩한 경고였다.
정령왕은 운딘이 소멸될 때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도록 조종해 놓았다.
그때 최치우의 눈에 하늘색 조각이 보였다.
‘소울 스톤이다!’
그는 얼른 손을 뻗었다.
운딘이 소멸하며 남긴 소울 스톤을 놓칠 수 없었다.
‘올라가서 생각하자. 숨이 차서 죽겠어.’
작은 소울 스톤을 꽉 잡은 최치우는 수면 위로 올라갔다.
사실 생각할 거리가 무척 많았다.
돌연변이 운딘의 등장, 정령왕의 경고, 어느 것 하나 쉽게 넘길 일이 아니다.
뜻밖에 소울 스톤을 얻었지만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푸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최치우는 상쾌한 공기를 한 움큼 머금었다.
선원들은 구명조끼를 입은 채 둥둥 떠 있었고, 저 멀리서 구조선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배는 침몰했지만,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다.
오늘 일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남게 될 것이다.
찰랑이는 바닷물 아래에서 최치우와 운딘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최치우는 오른손으로 소울 스톤의 촉감을 느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물의 정령왕.
미지의 존재가 최치우를 노리고 있다.
어렴풋한 위험이 아닌 실체적인 위협이다.
최치우는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
“아니, 대표님은 독도만 왔다 하면 바다에 빠지는 징크스라도 생긴 거 아입니까? 커허허허허!”
정기석이 웃음을 터트리며 분위기를 풀었다.
독도 시추 기계와 울릉도를 오가는 배 한 척이 부서졌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최치우도 선원들과 함께 무사히 구조선에 올라탔다.
해경에서는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빈손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충격을 받았고, 배가 침몰했다.
선원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하지만 별다른 증거가 없으니 다들 액땜했다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최치우는 따뜻한 물로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정기석과 소주잔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동해의 용왕님에게 굿이라도 해야 할지.”
“몇 년 전에도 대표님이 바다에 빠졌다 돌아와서 일이 술술 풀린 걸로 기억하고 있십니다.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집중적으로 매장돼 있는 포인트도 딱 찾아내고! 이번에도 좋은 징조라 생각하입시다.”
“좋은 징조라……. 단장님 말을 들으니 위로가 되네요. 그래도 한창 바쁜 와중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폐는 무슨, 그런 말씀 마십시오. 우리가 어디 그런 사이입니까? 커허허.”
최치우는 미소를 머금고 소주잔을 들었다.
울릉도 특산물인 오징어 회와 명이 나물을 안주 삼아 마시는 소주는 달콤하기 그지없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최치우가 웃으며 말했다.
“서울로 돌아가서 구체적인 지원 계획을 수립하겠습니다. 사업단에서 필요한 부분, 가감 없이 백승수 팀장에게 전달해 주세요.”
“이 은혜는 하이드레이트를 잘 캐내서 갚겠십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우리나라가 남의 눈치 안 보는 에너지 강국이 되는 거, 단장님과 제가 꿈꾸는 미래 아니겠습니까.”
“크으-! 역시 우리 최 대표님 말은 사나이 심장을 뛰게 만드십니다.”
다시 소주를 따른 정기석이 잔을 높이 들었다.
사실 최치우는 마음 편히 소주를 마실 기분은 아니었다.
정령왕의 경고를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밝은 얼굴로 정기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억지로 기분을 맞춰 줄 필요는 없다.
다만 정기석은 최치우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예우로 몇 시간 고민을 뒤로하고 소주를 마시는 것이다.
“건배하입시다, 건배.”
“사고 없는 현장을 위하여.”
“커 좋십니다. 사고 없는 현장을 위하여!”
울릉도의 밤, 소주잔이 오가며 깊이 있는 대화가 쌓였다.
최치우와 정기석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는 영웅이다.
두 영웅의 재회로 밤공기가 훈훈하게 데워졌다.
인재가 곧 자원인 대한민국에서 두 사람의 존재는 바꿀 수 없는 보물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