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정령왕의 그림자>
배 위에서 바라보는 동해는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선사해 준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고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남자가 아니다.
최치우는 갑판에 나와 가슴을 활짝 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파도가 부서지며 갑판 위로 물방울이 튀는 것도 즐거웠다.
최치우는 입술에 묻은 짠내나는 바닷물을 닦아내며 미소를 지었다.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여러 차원을 환생하며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최치우에게는 딱히 고향이 없다.
첫 번째 삶을 살았던 링스 월드도 그립지 않았다.
링스 월드에서는 매일 누군가를 죽이며 평생을 보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세상을 바꾸고, 인류 전체의 미래를 열어주는 지금의 삶이 훨씬 만족스러웠다.
다른 차원에서 얻었던 악명과 달리 현대에서는 영웅으로 유명해졌다.
그래서일까.
깨달음을 준 동해 바다, 그리고 어머니의 집밥이 있는 서대문 아파트가 고향처럼 느껴졌다.
“최 대표님, 파도가 잔잔하지만 조심해야 됩니다. 몇 년 전에도 사고 났었다 아입니까.”
뒤쪽에서 정기석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최치우가 파도에 휩쓸린 이시환을 구하다 동해에 빠졌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최치우는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세요. 그때도 안 죽고 살았잖아요.”
“하기사 바다가 잡아먹기엔 우리 대표님 기가 더 쎈 것 같십니다.”
“당연하죠.”
최치우와 정기석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동해의 심연까지 빠지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온 사람이 바로 최치우다.
오늘처럼 파도가 약한 날, 그가 바다를 겁낼 이유는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과 가스 사업단 연구진을 태운 배가 시추 기계 가까이 다다랐다.
독도 인근 해역, 바다 한 가운데 거대한 시추 기계가 꽂혀 돌아가는 광경은 아무리 봐도 장관이다.
최치우는 가슴 깊이 자부심을 느꼈다.
독도에 묻힌 메탄 하이드레이트는 신기루와 같았다.
엄청난 가치를 지녔지만, 실제로 시추하려면 엄청난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하지만 20살 대학생에 불과했던 최치우가 실마리를 찾았고, 결국 동해에 시추 기계가 우뚝 세워졌다.
대한민국의 독도 지배 실효력은 한층 강화됐으며, 머지않아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가스로 추출 할 경우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거둘 수 있다.
최치우는 성인이 되자마자 애국 끝판왕을 찍은 셈이다.
조국 대한민국에 그가 안겨준 선물 꾸러미는 독도 해저 자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올림푸스와 퓨처 모터스가 유발하는 경제 효과도 측정하기 힘들 정도다.
무조건 직원을 많이 고용하는 것만 사회 기여가 아니다.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면 국가 브랜드가 덩달아 상승한다.
한국의 대외 신뢰도 향상에 최치우가 기여하는 바는 엄청나다.
시장에서 그의 영향력은 대통령 이상이다.
그 출발점이 된 독도의 시추 시계를 보고 마음껏 자부심을 느껴도 탓할 사람은 없다.
“아는 얼굴들도 제법 남아 있을 깁니다. 같이 올라가입시다.”
정기석이 앞장섰다.
시추 기계는 하나의 인공 섬이나 다름없다.
가스 사업단 직원들은 울릉도에 상주하지만, 필요할 경우 시추 기계 내부에서 며칠씩 지낼 수도 있다.
파도가 너무 높아지면 억지로 배를 타고 나오는 것보다 시추 기계 내부의 숙직실에 있는 게 훨씬 안전하다.
쿠구궁- 쿠구구구구-
해저 깊숙이 뿌리를 박아내린 시추 기계에서는 쉴새 없이 굉음이 울렸다.
확실히 편한 환경은 아니다.
가스 사업단은 동해 바다 복판에서 추위와 고독, 그리고 소음과 싸우며 대한민국의 미래 에너지를 캐내고 있었다.
“모두 주목-! 내가 누구와 함께 왔는지 직접 보도록!”
정기석이 목소리를 높였다.
기계의 소음과 파도 소리도 뚫어버리는 우렁찬 외침이었다.
각자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가스 사업단 직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몇 사람이 최치우를 알아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올림푸스의… 최치우?”
“최치우 대표다!”
“와-!”
탄성은 물결처럼 번지며 가스 사업단 전체로 퍼져나갔다.
동해 바다 한 가운데에서 느닷없이 최치우의 팬미팅이 열린 분위기였다.
“영광입니다, 대표님.”
“단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최치우는 조심조심 다가오는 직원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몇 년 전에 봤던 분들도 있군요. 여러분이 독도에서 고생한 결과가 곧 대한민국 에너지 산업의 한 축을 책임지게 될 겁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아닙니다, 다 월급 받고 하는 일인데요!”
“와하하하하-!”
넉살 좋은 직원의 농담에 모두 웃음이 빵 터졌다.
최치우도 함께 웃었다.
그렇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이 바닷바람 맞으며 가족과 떨어져 고생하는 건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니겠죠. 저는 비전을 가지고 몸을 내던지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국가 사업이지만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올림푸스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대표님, 참말이십니까?”
최치우의 깜짝 발표에 정기석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는 현장 지원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우리나라 정부는 항상 최소한의 예산 투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희생하고 헌신 할 수밖에 없다.
독도 해저 자원 프로젝트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기석을 포함한 가스 사업단 직원들은 인생을 바쳤고, 열악한 환경에도 묵묵히 헌신하고 있었다.
만약 올림푸스가 지원을 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실질적인 효과는 둘 째 치고, 우선 가스 사업단의 사기가 올라간다.
가족과 떨어져 고생하는 직원들이 힘을 내는 것.
정기석이 가장 바라던 부분을 최치우가 말 몇 마디로 채워줬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업 초기, 한영 그룹에서 후원사로 나섰었죠. 단장님께서 필요한 물품과 금액을 정리해서 알려주시면 최대한 맞춰서 돕겠습니다.”
“아이고, 우리 복덩이 대표님-!”
정기석이 최치우를 와락 껴안았다.
최치우는 요즘 들어 덩치 큰 남자들과 포옹을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시추 기계 위의 가스 사업단 직원들은 일제히 최치우의 이름을 연호했다.
“최치우! 최치우!”
“고맙습니다, 대표님!”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바탕 기분 좋은 소란이 끝나고, 최치우는 정기석과 직원들을 천천히 돌아봤다.
“여러분, 독도는 저에게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독도의 해저 자원 프로젝트 덕분에 지금의 올림푸스가 탄생했습니다.”
모두 진지한 얼굴로 최치우의 말을 경청했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움직이는 글로벌 리더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정기석 단장도 말없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올림푸스는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짓고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대체에너지로 대한민국과 인류의 미래를 밝힐 겁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독도의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시추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하이드레이트를 확보하면 대한민국 경제는 비장의 무기를 장착하게 되겠죠. 서로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도 올림푸스가 응원하겠습니다.”
최치우의 목소리는 정기석과 가스 사업단 직원들에게 전율을 일으켰다.
24살의 청년.
그가 바다 위에서 내뱉은 말은 거대한 파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집어삼켰다.
짝짝짝- 짝짝짝짝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쳤다.
최치우는 파도 소리와 함께 울리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경의를 표해야 한다.
가스 사업단 직원들의 박수는 오래도록 끊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최선의 경의를 최치우에게 표현했다.
바닷바람은 차가워도 훈훈한 공기가 독도의 시추 시계를 감싸고 있었다.
***
짧지만 강렬한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인 최치우는 시추 기계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시추 기계는 여러 층으로 이뤄져 있었다.
층마다 들어선 장비와 역할이 다르다.
최치우는 정기석에게 설명을 들으며 해저 시추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파악 할 수 있었다.
머리로만 아는 것과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독도 시추 기계를 돌아본 건 최치우에게도 좋은 공부가 됐다.
꽤 오래 시추 기계에 머무른 최치우는 먼저 돌아오는 배에 올라탔다.
정기석은 가스 사업단 직원들과 함께 마지막 배를 탈 예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최치우가 탄 배에는 몇 명의 선원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선원들은 조타실에서 배를 움직이는데 집중한다.
여지없이 갑판으로 나온 최치우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동해 바다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좋다, 이 바람.’
최치우는 배 후미의 갑판에서 눈을 감고 바다 냄새를 맡았다.
조타실의 선원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전방 항로를 주시한다.
최치우가 후미 갑판에서 눈을 감든 뭘 하든 굳이 신경 쓸 가능성은 낮았다.
휘이이- 휘이이이-
거꾸로 부는 바람이 최치우의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최치우는 타이타닉의 주인공처럼 양 팔을 좌우로 넓게 펼쳤다.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나왔을 때부터 몸이 마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는 현대에서 7서클의 벽을 넘었다.
7서클이면 아슬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사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레벨이다.
최치우가 마법이 사라진 지구에서 빠르게 7서클을 돌파한 원동력은 다름 아닌 동해 바다였다.
바다의 심연을 느끼는 경험을 통해 마나를 급속도로 받아들이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독도 인근으로 나오면 사방의 마나들이 격하게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마법을 펼치면 평소보다 몇 배의 위력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플래시!”
최치우는 재미삼아 7서클 마법을 캐스팅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순식간에 오른손으로 이동했다.
자기 몸이 아닌 사물을 순간이동 시키는 건 무척 까다롭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찌릿-
그때였다.
최치우의 감각에 뭔가 날카로운 게 걸렸다.
마치 낚싯줄에 사나운 물고기가 매달린 기분이었다.
장난삼아 7서클 마법을 펼치며 마나를 일으킨 순간, 기다렸다는 듯 뭔가 반응한 것이다.
‘마나가 작용할 때 이만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은…… 정령인가?’
최치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갑판 너머 바다를 쳐다봤다.
파도는 그리 거세지 않았다.
그러나 최치우의 감각이 헛발질을 했을 리 없다.
츠팟!
바로 그 순간, 갑작스레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최치우는 재빨리 고개를 꺾었고, 바다에서 솟구친 물방울은 갑판에 떨어졌다.
“이거였군.”
그냥 물방울이 아니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주먹 만한 크기의 물방울 덩어리가 한데 뭉쳐 있었다.
헌터로 살았던 차원에서 슬라임이라는 D급 몬스터가 이와 비슷하게 생겼다.
어떻게 보면 물방울 덩어리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커다란 젤리 같다.
분명한 건 평범한 자연현상은 아니었다.
물방울이 흩어지지 않고 덩어리로 모여 꿀렁거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운딘. 오랜만에 보니 헷갈렸어.”
최치우는 물방울 덩어리의 정체를 간파했다.
하급 물의 정령, 운딘이었다.
슬라임을 닮은 운딘이 난데없이 최치우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뭔가 이상한데…….”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하급, 중급, 상급 정령은 인격이 없다.
단순하고 뚜렷한 의지만 존재 할 뿐이다.
물론 운딘이 최치우의 마나에 반응해 모습을 드러냈을 수도 있다.
“약하긴 해도 소울 스톤을 품고 있겠지. 어쨌든 잘 만났다.”
최치우는 얼른 운딘을 소멸시키고 소울 스톤을 챙길 생각이었다.
배의 선원들이 후미 갑판을 보고, 이상한 점을 느끼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저벅저벅-
마음을 굳힌 최치우가 운딘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법을 쓰지 않고 권왕의 아랑권이나 소림사 금강나한권 일 초식만 펼쳐도 금방 소멸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인격이 없는 운딘이 분명한 메시지를 내뿜은 것이다.
[정령의 대적이여, 너에게 심판을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