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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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는 바쁜 사람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보다 더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물론 1분 1초를 쪼개가며 시달리는 처지는 아니었다.
원한다면 얼마든 휴가를 떠날 수 있는 위치다.
그러나 최치우의 말 한 마디, 선택 한 번에 달린 책임의 무게감이 다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 역시 세계의 리더들이다.
전용기를 타고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한 번의 선택으로 수십억 수백억의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 바로 최치우다.
최치우에게 달리기는 본업이 아니다.
다른 선수들처럼 태릉에서 합숙을 하며 올림픽을 준비할 여유는 없다.
그렇다고 갑자기 올림픽에서 국가대표 마크를 달면 온갖 특혜 시비가 불거질 것이다.
물론 메달을 따면 모든 논란은 사라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전까지 최치우의 이름이 부정적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걸 막을 수 없다.
이상태 감독은 최치우가 자연스럽게 올림픽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떨떠름한 얼굴로 운동장에 나타났던 그는 순식간에 열렬한 최치우교 광신도로 변했다.
한국, 아니 아시아 최초의 100m 달리기 금메달을 이뤄낸 감독으로 역사에 남을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손기정 기념 육상 선수권에서 우승을 하는 겁니다.”
두 눈에 불꽃을 띄운 이상태 감독이 의욕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최치우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들어보는 대회입니다만.”
“선수권이 출범한지 3년밖에 안 됐습니다. 하지만 대한체육협회에서 계속 키우려는 대회입니다. 국내 역사상 최고의 육상 영웅인 손기정 선수를 기리며 마라톤을 비롯해 중장거리 종목을 모두 겨루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TV에서 마라톤 중계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참가 자격은 따로 없습니까?”
“기념 선수권이라 아마추어의 참가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1차 예산에서 기록을 통해 대부분 걸러지는데, 말이 기념 대회지 사실상 제 2의 전국체전과 비슷한 위상이라 일반인이 참여한 기록은 아직 없습니다.”
“거기서 우승을 하면…….”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어차피 9초대 기록을 세우면 누구도 토를 달지 못 할 겁니다.”
9초는 한국인이 단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철벽이다.
10초 초반의 기록만 세워도 한국 최고로 우뚝 설 수 있다.
최치우의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너무 빨리 달려 8초의 벽을 깨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올림푸스의 CEO가 100m 올림픽 금메달을 노리는 것부터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래도 물리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8초의 벽을 깨면 현생 인류의 한계를 지나치게 초월해버리게 된다.
영웅이나 괴물이 아닌 외계인 취급을 받을지 모른다.
‘100m를 달리면서 힘든 척도 해야 하고, 자세도 잡아야 되고… 거기다 시간까지 정확히 체크해야 하는군.’
다른 선수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쓰지만, 최치우는 온갖 생각을 하면서 결승선을 통과해야 한다.
이상태 감독은 최치우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손기정 기념 육상 선수권에 출전하는 걸로 진행을 시키겠습니다, 대표님.”
“감독님, 이왕 하는 거 올림푸스가 선수권을 후원하도록 하죠. 후원사 대표로 육상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직접 출전하는 게 명분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상태의 입이 귀에 걸렸다.
한국에서 육상은 비인기종목이다.
마라톤을 제외하면 변변한 스폰서를 찾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데 올림푸스라는, 현기를 제치고 시가 총액 2위로 뛰어오른 글로벌 대기업이 육상 대회를 후원하겠다고 나선다.
거기다 최치우는 한국 신기록을 세우고 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을 것이다.
앞으로 뉴스에서는 주구장창 육상과 달리기 이야기를 할 게 뻔했다.
수십년 넘게 외면 받았던 비인기 종목 육상의 전성기가 찾아올지 모른다.
평생을 육상인으로 살아온 이상태 감독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당연했다.
그는 최치우가 이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 이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육상 불모지로 남을 것이다.
하늘이 최치우에게 지력과 무력을 올인해서 퍼줬다고 쉽게 생각하면 된다.
단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걸림돌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대표님.”
“네.”
“혹시 약물이나 그런 건…….”
“아, 전혀 아닙니다. 도핑 해봐도 됩니다.”
“그럼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감기약이나 이런 것들만 주의해서 피하시면 됩니다.”
“그래야죠.”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활화산 같은 내공이 단전에 자리 잡고 있는 그가 감기에 걸릴 일은 없다.
물론 이상태의 염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올림푸스는 프로메테우스라는 획기적 해독제를 개발한 회사다.
최치우가 육상 기록을 세우면 너도나도 약물을 의심할 것 같았다.
아마 수십 차례의 도핑 테스트를 받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어떻게 검사를 해도 최치우의 몸에서 무엇도 발견하지 못 할 것이다.
현대 과학으로 내공을 검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대표님.”
최치우와 이상태 감독이 악수를 나눴다.
서로의 필요에 의한 관계지만,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도 있다.
올림푸스의 마법사 최치우가 바람을 후 불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 바람이 대한민국 육상계를 향해 불어닥치기 직전이었다.
***
“일정이 나왔습니까?”
“개최식은 11월 15일. 그때 1차 예산을 뛸 겁니다.”
“그런데 무슨 육상 대회를 찬바람 쌩쌩 부는 가을에, 아니지. 11월 15일이면 초겨울이라 불러도 무방합니다.”
“손기정 선수의 기일이 11월 15일입니다.”
“아……. 이거 또 나만 역사의식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인데, 미리 좀 말해주면 어디 덧납니까?”
임동혁이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손기정 기념 육상 선수권은 11월 15일에 개최 될 예정이다.
여느 때와 달리 많은 언론이 이번에 열리는 육상 선수권을 주목하고 있었다.
올림푸스가 후원사로 참여하고, 육상 인기를 위해 최치우가 100m 달리기 종목에 출전한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글로벌 스타 CEO로 불리는 최치우의 100m 달리기 출전은 그 자체로 뜨거운 이슈를 만들어냈다.
해외의 CEO들은 자선 활동을 위한 이벤트 경기에 출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최치우는 올림푸스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며 시가총액만 부풀리지 않았다.
딱딱한 한국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가져왔다.
대한민국이 실리콘밸리를 위협하며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문화부터 바꿔야 한다.
올림푸스나 오성그룹처럼 특출난 회사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경쟁력과 분위기가 바뀌지 않으면 영영 실리콘밸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문화에서 제2의 올림푸스, 제2의 오성그룹은 나오기 힘들다.
반면 실리콘밸리에서는 매 달 창의적인 기업들이 탄생과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최치우는 올림푸스를 성공시키며 대한민국의 체질을 변화시킬 작정이었다.
군사 독재 시절, 까라면 까는 정신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환경이 필요하다.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최치우의 일거수일투족이 한국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독도는 왜 가는 겁니까?”
입술을 삐쭉거리던 임동혁이 툭 질문을 던졌다.
최치우는 올림푸스 대표실에서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서 포항으로 내려가 울릉도행 배를 탈 계획이었다.
“독도 해저 자원 탐사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오랜만에 현장을 보려고 합니다.”
“정기석 고문이 최근 다시 단장으로 취임하며 현장에 복귀했습니다.”
“사실 그 뉴스를 보고 내려가는 겁니다. 정 단장님과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
“하긴… 대표님에게 있어 독도는 특별한 장소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남 이야기 하듯 말하는군요. 독도가 아니었으면 이사님도 나랑 만날 일이 없었는데.”
“그럼 독도가 내 인생도 바꿔준 셈입니다. 사실 별 관심 없었는데, 독도 지킴이 사업에 후원이라도 좀 하는 건 어떻습니까?”
“뉴욕에 광고 하고, 그런 건 쓸데없는 돈 낭비라서. 차라리 독도 해저 자원 사업에 지원을 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 문제도 상의하고 돌아오죠.”
“알겠습니다. 일정은 며칠 정도입니까?”
“빠르면 이틀. 울릉도와 독도의 기상 상황이 나쁘면 사흘이 될 수도 있고, 더 늘어날 수도.”
“현안이 생기면 연락하겠습니다.”
“요즘은 독도에서도 인터넷이 잘 터지니까.”
최치우는 가볍게 웃으며 짐을 마저 정리했다.
대화를 마친 임동혁은 목례를 하고 대표실 밖으로 나갔다.
배낭에서 빠진 것은 없는지 확인한 최치우는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학생들의 마음과 비슷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독도는 최치우에게 무척 특별한 장소다.
독도 해저에 묻힌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개발하는 프로젝트가 올림푸스의 출발점이었다.
최치우는 S대 미래 에너지 탐사대 소속으로 수면 아래에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독도 바다에 휩쓸린 이시환을 구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대자연의 기운과 소통하는 방법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현대에서 마법 클래스가 빠르게 성장하는 것도 독도 바다에서의 깨달음 덕분인지 모른다.
“이게 몇 년만에 가는 독도인지……. 벌써 동해 바다 냄새가 그립군.”
최치우는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들었다.
사무실에 더 있어봐야 일을 못 하지 싶다.
그냥 빨리 포항으로 내려가 울릉도행 배를 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서 설렘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
울릉도에 도착한 최치우는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여전히 수염 자국이 무성한 상남자, 정기석은 최치우를 보자마자 덥석 안았다.
“우리나라의 보물인 줄 알았는데 세계의 보물이 됐십니다. 내 인생 최고의 자랑이 최 대표님 안다는 거 아입니까, 커허허허!”
정기석 특유의 독특한 말투가 최치우를 웃게 만들었다.
파릇파릇한 20살, 대학 1학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시 단장으로 취임하셨다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최치우가 정식으로 인사를 건네자 정기석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제 후배들한테 현장을 물려줘야 되는데… 염치 불구하고 또 단장이 됐십니다.”
“가스 사업은 어떤가요?”
최치우는 울릉도의 아름다운 해변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정기석과 대화를 나눴다.
몇 년이나 못 봤기에 할 이야기가 쌓여있다.
그러나 역시 독도 해저 자원 프로젝트부터 물을 수밖에 없었다.
“최 대표님 덕분에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서 시추 기계를 바다 가운데 꽂았다 아입니까.”
“그게 벌써 3, 4년 전 일이군요.”
“해저 채굴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고 있십니다. 핵심 기술도 김도현 교수님께 받았었고…….”
정기석이 말한 기술은 최치우가 도쿄대에서 빼낸 것이다.
덕분에 독도 해저 자원 프로젝트는 탄력을 받았고, 최치우도 전세계의 신비 현상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새삼 도쿄대에서 모험 아닌 모험을 펼치던 생각이 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추한 하이드레이트를 상품화 할 수 있는지 시험 할 단계가 됐십니다. 다시 단장이 된 것도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 아이겠습니까.”
짧은 대화였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알 것 같았다.
독도 해저에 묻힌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시추하는 단계는 넘었다.
다만 시추한 하이드레이트를 사용 가능한 가스로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독도 해저 자원 프로젝트의 마지막 고비를 앞두고 정기석이 책임자가 된 셈이다.
무거운 왕관을 쓴 정기석의 표정은 내내 진중해 보였다.
“잘 될 겁니다. 단장님은 여기에 인생을 걸었잖아요.”
“최 대표님이 씨앗을 뿌렸으니 열매를 잘 맺을 수 있게 노력하겠십니다. 그게 평생 나라에서 주는 밥을 묵어온 저 같은 놈들 책임 아이겠습니까, 커허허허!”
정기석은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예나 지금이나 한 결 같은 모습에 최치우도 덩달아 밝게 웃었다.
“일기예보는 보니까 내일은 맑다고 합니다. 오늘 푹 쉬시고, 아침 일찍 현장으로 넘어 가면 될 것 같십니다.”
“다행이군요. 사실 날씨 핑계로 울릉도에 오래 있고 싶기도 했는데.”
“커허허-! 그거야 얼마든지, 우리는 최 대표님만 괜찮으면 여기서 같이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하! 그랬다간 임동혁 이사가 입에 칼을 물고 찾아올 겁니다.”
최치우는 기분 좋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울릉도는 서울과 공기부터 다르다.
눈을 돌리면 펼쳐지는 풍경은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자연의 기운이 강성한 곳이라 마나도 쉽게 느껴졌다.
여러모로 컨디션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단장님과 술잔을 나누고 싶지만, 내일을 위해 참겠습니다.”
“소주는 내일 현장 다녀와서 찐하게 한잔 드리겠십니다.”
어느새 최치우와 정기석은 해변길을 가로질러 숙소 앞에 다다랐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독도로 향한다.
최치우는 동해의 심연으로 휩쓸렸던 순간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렸다.
왠지 독도의 바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