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신인류>
참 이상한 일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데, 목격자가 없어도 소문은 만들어진다.
현기 자동차의 홍문기 부회장이 올림푸스 최치우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최치우는 누구에게도 그날 일을 발설하지 않았다.
홍문기 역시 자기 입으로 망신을 자초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문의 유출 경로는 하나밖에 없다.
홍문기를 수행했던 현기 직원들이 소문을 퍼트린 것 같았다.
최치우는 가능한 티가 나지 않게 지능적으로 홍문기를 구타했다.
하지만 3분 동안 극한의 고통을 맛본 홍문기가 금방 평정을 찾을 리 없었다.
아마 수행 비서나 경호원들에게 두들겨 맞은 흔적을 노출했을 것이다.
소문의 당사자가 홍문기라서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누가 들어도 재미있는 소문이다.
최치우가 홍문기를 팼다, 는 단순무식한 팩트는 재계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덕분에 최치우는 가만히 앉아서 강인한 이미지를 쌓게 됐다.
원래 홍문기는 재계에서 카리스마로 명성이 높았다.
알고 보면 개망나니지만, 그의 큰 체구와 화끈한 성격을 좋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최치우에게 완전히 뭉개졌다는 소문이 돌고, 홍문기의 남자다운 이미지는 쪼그라들었다.
대신 최치우가 현기 자동차 후계자를 팰 정도로 배짱이 두둑하고 싸움도 잘하는 남자로 인식 됐다.
임동혁은 재계에서 떠드는 소문을 듣고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치우의 진면목을 알고 있다.
파이트 클럽을 평정한 비공식 대한민국 최강자다.
홍문기 정도를 요리하는 건 손가락 하나라도 충분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찝찝한 마음도 들었다.
임동혁이 홍문기를 소개해 줬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어려서부터 또래의 재벌 2세로 비슷하게 성장해 온 처지다.
하지만 임동혁은 최치우를 만나 탄탄대로를 걸었고, 홍문기는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고 소문까지 났다.
“적당히 때리지… 사람을 완전 등신으로 만들었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올림푸스 대표실로 들어온 임동혁이 괜히 타박을 했다.
그러나 본전도 못 찾을 소리였다.
“우리나라 재벌 2세들은 왜 그렇게 인간 말종인 겁니까? 어디 부러트리려다 참은 겁니다.”
“이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습니다.”
“뭐, 이사님은 올림푸스 들어오고 많이 나아졌죠.”
“맞는 말이니 뭐라고 못 하겠고, 근데 기분은 엄청 나쁘고……. 대표님도 은근히, 아니 대놓고 말빨이 셉니다.”
“아무튼 중요한 일은 따로 있습니다.”
“현기 자동차의 후계자를 묵사발로 만든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가뜩이나 견제가 심한데, 이제 대놓고 퓨처 모터스의 빈틈만 찾을 겁니다.”
“내 군대 문제가 더 중요할 텐데요.”
“…….”
임동혁은 거짓말처럼 입을 딱 닫았다.
홍문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오너 리스크를 노출하는 경영자가 아니었다.
어리다, 경험이 없다 등 세간의 우려를 모두 불식시켰다.
그렇지만 딱 하나, 그의 병역 문제는 외부에서 올림푸스를 바라보는 아킬레스건이다.
만약 최치우가 2년 동안 회사를 비운다면 올림푸스 주가는 급격히 하락할 것이다.
전 세계에 벌려놓은 비즈니스는 기다렸다는 듯 네오메이슨의 공격 대상이 될 게 뻔했다.
임동혁과 브라이언, 백승수와 이시환이 아무리 노력해도 마찬가지다.
올림푸스에서 최치우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실제 지분도 혼자서 50%를 넘길 만큼 압도적이다.
그런 최치우의 부재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2년, 요즘은 21개월에 불과하지만 올림푸스에겐 너무나 긴 터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치우는 임동혁의 눈앞에서 100m 달리기 한국 신기록을 깼다.
심지어 청와대 안뜰에서 유영조 대통령에게도 달리기 실력을 보여줬다.
군대를 안 가는 가장 깔끔한 방법이 달리기였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혹은 올림픽 메달을 따게 되면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최치우가 이미 받은 훈장의 경우 명예가 주어질 뿐, 별도의 특혜는 따라오지 않는다.
물론 100m 달리기 말고 다른 종목을 선택해도 된다.
하지만 최치우는 육상을 택한 이유가 있었다.
타고난 신체 능력이 중요한 육상은 동양인이 영원히 정복하지 못할 종목으로 여겨진다.
단거리인 100m 달리기는 육상에서도 백미다.
장거리 마라톤은 동양인 금메달리스트를 여럿 배출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100m 달리기는 동양인이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최치우는 100m 달리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왕 메달을 따서 병역 면제를 받을 거라면 동양인의 한계를 깨트리고 싶었다.
올림푸스도 세계의 중심을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옮기고 있다.
최치우가 개인으로 동양인의 벽을 넘는 것은 회사의 방향과도 일치한다.
100m 달리기에서 동메달만 따도 영원히 역사에 남아 수많은 동양인들에게,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선사할 것이다.
“금메달을 딸까요, 은메달을 딸까요? 아니면 동메달?”
최치우는 마음먹기에 따라 메달 색깔을 고를 수 있었다.
임동혁도 그가 허풍을 떠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믿기 어려워도 직접 달리기 기록을 측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동혁의 걱정은 다른 부분이었다.
“대표님이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는 것, 그렇게 병역 면제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메달을 따는 순간, 사람들은 대표님을 영웅이 아닌 괴물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심상치 않은 말이었다.
최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을 자세를 취했다.
임동혁은 가끔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평소에는 구박 덩어리지만, 괜히 최치우가 임동혁을 파트너로 삼은 게 아니다.
“처음에는 도핑 테스트를 비롯해 별짓을 다할 겁니다. 결국에는 대표님이 세계적인 CEO이면서 올림픽 금메달을 딸 만큼의 육체 능력을 타고났다는 걸 인정하게 되겠지만… 그다음에는 어떨 것 같습니까?”
“영웅으로 신격화하는 사람들이 생길 테고, 반대로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생기겠죠.”
“인류 역사에서 그 누구도 지력과 무력으로 동시에 정점을 찍은 적은 없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지력은 기업을 경영하는 능력, 그리고 무력은 운동입니다. 병역 면제를 위해 올림픽에 나서는 순간… 대표님은 최초의 신인류가 되는 겁니다.”
“마냥 즐거운 길은 아니겠군요.”
“지금보다 훨씬 외롭고, 고독한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이 대표님을 신으로 여기거나 괴물로 여긴다면… 진짜 행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임동혁의 물음이 가슴을 묵직하게 때렸다.
최치우는 환생하는 차원에서 항상 파란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때로는 이질적인 대상으로 여겨지는 게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육상에 출전해 100m 달리기 메달을 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임동혁의 말대로 대중은 최치우를 신적인 존재 아니면 괴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로인한 피로감과 고독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우는 이미 선택을 내렸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어설프게 내려올 수 없다.
이 세계에서 끝장을 본다.
신인류(新人類)이자 신인류(神人類)가 되어 역사를 다시 쓸 것이다.
최치우는 진심어린 경고를 해준 임동혁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따로 마음을 표현하진 않았다.
그에게는 구박을 하는 게 더 잘 어울린다.
“육상 국가 대표 감독을 만나겠습니다. 청와대에서 다리를 놓아주기로 했습니다. 이사님이 일정을 조율해 주세요.”
“아니, 내가 비서팀장도 아니고…….”
“어차피 공채 끝나고 요즘 할 일도 없는 거 다 압니다. 내가 올림픽 안 나가고, 그냥 군대 가버리면 이사님이 제일 힘들어지는 거 모릅니까?”
“이제는 협박까지…….”
“금요일까지 미팅 일정 잡아서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최치우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임동혁은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거리며 올림푸스를 이끄는 방식이다.
24살이 끝나가는 시점, 최치우는 병역이라는 커다란 산을 넘어야 한다.
내년에는 소울 스톤 발전소와 퓨처 모터스만 빛을 보는 게 아니라 올림픽도 열린다.
동양인 최초의 100m 달리기 금메달이 벌써부터 눈앞에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
“날도 추운데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거참.”
이상태 감독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뜬금없이 위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지시가 내려왔다.
가끔씩 정부 고위층이 국가 대표 감독에게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용이 너무 황당했다.
올림푸스 CEO 최치우의 100m 달리기 기록을 측정하라는 지시였다.
이상태도 최치우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평소에는 최치우의 팬을 자처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세계를 호령하는데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국가 대표 운동선수를 응원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상태 감독은 국가 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한창 바쁜 시기였다.
아무리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도 운동선수가 아닌 일반인의 기록을 측정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에잉, 쯧쯧.”
이상태가 혀를 차며 출발선에서 몸을 푸는 최치우를 쳐다봤다.
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최치우를 만났지만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최치우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이상한 짓을 벌이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빨리 치우고 소주나 한잔 해야긋다. 오늘은 텃다, 텃어.”
한 번 더 궁시렁거린 이상태 감독이 호루라기를 들었다.
정식 경기에서는 기계음으로 출발 신호를 준다.
그러나 약식 테스트에서는 호루라기를 부는 걸로 충분하다.
이상태는 최치우에게 수신호를 줬다.
곧 호루라기를 불 거라고 알려준 것이다.
‘자세도 모르면서 무슨 달리기를 한다고, 쯧쯧.’
최치우는 육상 선수들의 출발 자세를 모르는 것 같았다.
평범하게 선 채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으로 또 다시 불만을 되새긴 이상태 감독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이익-!
호루라기 소리마저 신경질적으로 퍼졌다.
최치우는 내공을 두 다리로 퍼트리며 트랙을 박찼다.
파박! 파바바박!
운동화와 트랙이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순수한 육체 능력에 약간의 내공을 가미하면 게임 끝이다.
육상 선수들의 자세와는 거리가 먼, 단순하고 무식하게 땅을 박차는 달리기지만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슉! 슉! 슉!
최치우의 두 팔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몸은 몇 미터씩 앞으로 도약했다.
‘뭐, 뭐야 이건-!’
인상을 쓰고 있던 이상태 감독의 표정도 변했다.
그의 얼굴 위로 경악이라는 낯선 감정이 떠올랐다.
지난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한 전설적인 육상 선수 우사인 볼트를 직접 봤을 때도 이만큼 놀라지 않았었다.
쐐애액-
최치우가 쏜살처럼 이상태 감독을 지나쳐 달려갔다.
이상태는 가까스로 스톱워치를 눌렀지만, 100% 정밀한 기록을 재지는 못했다.
“9초… 88? 9초 88!”
이상태 감독이 스톱워치에 떠오른 숫자를 읽었다.
그는 눈을 비벼가며 몇 번이고 다시 기록을 확인했다.
분명 조금 늦게 버튼을 눌렀는데 9초 88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이 나왔다.
세계신기록에는 미치지 못해도 올림픽 메달을 다툴 수 있는 기록이다.
한국 신기록은 기본이고, 아시아 전체 신기록이었다.
종전까지 카타르의 페미 오구노데가 9초 91로 아시아 신기록을,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가 9초 58로 세계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운동선수가 아닌, 세계적인 기업을 이끄는 CEO인 최치우가 이상태 감독이 보는 앞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어때요? 감독님. 이만하면 올림픽에 출전해도 되겠습니까.”
총알처럼 저만치 달려갔던 최치우는 지치지도 않는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이상태 감독은 가까이 걸어오는 최치우를 부둥켜안았다.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진 것이다.
“그, 금메달! 금메달 하나만 땁시다-! 금메달 딴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최치우는 이상태 감독의 품에 안겨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애원하지 않아도 육상 불모지 대한민국에 영원불멸의 트로피를 안겨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