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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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는 브라이언 머스크와 함께 화재가 발생한 공장으로 이동했다.
다른 임원들은 대동하지 않았다.
오직 둘이서만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브라이언도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기색을 보였지만, 최치우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T 모터스는 망할 위기에 처했지만, 아무나 넘볼 수 있는 회사가 아니다.
화재 사고로 주가가 폭락하기 전 시가총액은 우리 돈 30조 원에 육박했다.
만약 정상적으로 전기차 4,500대가 출고 됐다면 올해 안에 시총이 100조까지 뛰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주가가 3분의 1로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총 10조면 우습게 볼 수 없다.
올림푸스의 시총은 이제 20조를 향해 근접하고 있다.
최치우의 명성은 시총 100조가 넘는 기업의 CEO 이상이지만, 유명세가 바로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절대 가볍게 T 모터스 인수를 언급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부우우웅-
공장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깊은 침묵이 공기를 누르고 있었다.
엔진 소리만 고요함을 깨트리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브라이언도, 조수석에 앉은 최치우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T 모터스 생산 공장은 실리콘밸리에서 차로 60마일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있다.
이제 10분 정도만 더 달리면 공장이 보일 것 같았다.
“5억 달러의 자금을 투자하겠다는 것도 인수를 염두에 두고 던진 카드였습니까?”
그때 브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제법 긴 침묵을 깨고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이다.
최치우는 그가 원하는 답을 바로 내주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질문으로 다시 한번 브라이언의 평정심을 깨트렸다.
“생산 공장의 화재,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하나요?”
“……!”
핸들을 잡은 브라이언의 두 손에 실핏줄이 일어났다.
저도 모르게 힘을 꽉 준 것이다.
“사고가 아닌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언론과 당국이 사고로 결정을 내렸고, 다른 이야기를 해봤자 가십이 될 뿐이겠지요.”
브라이언은 들끓는 감정을 자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내듯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제 와서 다른 의혹을 제기해 봤자 T 모터스의 이미지만 더 나빠진다.
네오메이슨이 증거를 남겨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우기 힘든 심증은 있다.
최치우는 심증을 뒷받침할 최소한의 자료도 확보했다.
그래봤자 이미 불에 탄 공장을 살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브라이언과 의기투합하는 계기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의적인 방화 사건입니다. 기계 오작동으로 인한 화재가 아니라.”
충격적인 말이지만, 브라이언은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핸들을 잡고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물었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최 대표님이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 긴급한 자금을 투자해 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인수도 그렇고, 화재 언급까지……. 무슨 속셈으로 나를 찾아온 건지 물어야겠습니다.”
최치우가 만족스러운 답을 하지 못하면 브라이언은 당장 차를 세울 것 같았다.
그는 위기에 몰렸어도 자존심까지 버리진 않았다.
의문스러운 상대에게 불에 탄 공장을 견학시켜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최치우는 고개를 돌려 브라이언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절벽 끄트머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티고 있는 힘겨움이 느껴졌다.
올림푸스의 도약을 위해서, 네오메이슨과의 전쟁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 브라이언은 반드시 필요한 사람 같았다.
무엇보다 그가 가진 전기차 노하우와 열정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최치우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전기차 시대를 앞당겨 온 T 모터스가 이대로 몰락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올림푸스와 함께 다시 시작해 보자는 말을 하려고 미국까지 날아온 겁니다.”
브라이언은 묵묵히 차를 몰았다.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걸 보니 일단 최치우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려는 것 같았다.
“에릭 한센. 들어봤죠? 월스트릿의 천재. 그의 계열사가 T 모터스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재가 나기 직전 일주일 동안 보유 지분 50%를 매각했더군요.”
브라이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처음 듣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최치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더 충격적인 진실을 알려줬다.
“물론 남아 있는 50%의 보유 지분은 폭락하며 손해를 봤겠죠. 하지만 에릭 한센은 화재 직전 주가가 고점에 있을 때 절반을 처분하며 손실액을 보전했습니다. 마치 화재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정확한 타이밍에 빠져나간 에릭의 돈은… 중동의 오일뱅크로 들어갔습니다.”
끼이이익-
브라이언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갓길에 차를 세운 그는 최치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추측입니까,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화재가 아닌 방화라는 것은 추측입니다. 그러나 에릭 한센이 기막힌 타이밍에 T 모터스 주식을 빼서 오일뱅크로 돌렸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의 계열사 자금 흐름을 확보했습니다.”
빠앙-! 빠아앙-!
브라이언이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들을 내리쳤다.
자동차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쌓이고 쌓인 분노를 풀어낸 브라이언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기계 오작동으로 그만한 화재가 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누군가 불을 질렀다는 생각은 일부러 피하려 했는데!”
“에릭 한센과 함께 움직이는 세력은 전기차 시대를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석유 패권을 지키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죠.”
“그럼 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브라이언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최치우에게 조언을 구했다.
최치우는 어설픈 위로를 하지 않았다.
위기일수록 냉정하게 현실을 진단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T 모터스의 주식은 계속 떨어질 겁니다. 지금 시총이 100억 달러까지 떨어졌죠.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당장 5억 달러의 긴급 자금도 못 구하는 형편 아닙니까?”
“…….”
“내가 5억 달러를 투자해도 미국 정부가 구호 자금을 집행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공장에 불까지 지른 놈들인데, 미친 듯 로비를 할 게 뻔합니다.”
“절대로 T 모터스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와 함께, 올림푸스와 함께 싸웁시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함께 싸우자.
그것이 T 모터스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최치우의 진심이었다.
브라이언은 운명을 걸고 일생일대의 선택을 내려야 했다.
실리콘밸리 외곽의 고속도로 갓길, 멈춰선 자동차 안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인류가 누려야 할 미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국과 미국의 젊은 영웅이 손을 잡을 것 같았다.
***
휘이이이이-!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기업의 대규모 생산 공장은 도심 외곽에 건설된다.
T 모터스의 공장 역시 실리콘밸리 중심과는 꽤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브라이언과 함께 공장에 도착한 최치우는 천천히 구석구석을 살폈다.
공장 밖에서 보면 그렇게 심한 화재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장 내부는 엉망이었다.
화재는 물류 창고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고객의 품에 안겼어야 할 4,500대의 전기차가 뼈대만 남은 채 앙상하게 타버린 모습은 공포영화 속 장면 같았다.
T 모터스는 화재의 잔해조차 치우지 못했다.
폐기물을 버리고, 공장을 청소하는 데 수십억 원의 비용이 든다.
워낙 갑자기 터진 사고라 브라이언과 임원들은 대책을 마련하기 바빴다.
그래서 아직 청소 용역 업체와 계약을 체결하지도 못한 것이다.
“당장 정리부터 합시다. 미국 정부에서 구제 금융을 진행하기 위해 언제 현장 심사를 나올지 모릅니다. 그때도 지금 같은 모습이면 빌미를 주게 됩니다.”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최치우의 지적을 받은 브라이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다.
지금 T 모터스에는 외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패닉에 빠진 내부 당사자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를 냉정하게 지적해 줄 조언자, 최치우는 그 역할을 수행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청소 이후에는 직원들을 복귀시키는 게 우선입니다.”
“하지만 생산 설비를 보수하기 전에는 직원들이 돌아와도 할 일이 없습니다.”
브라이언은 최치우의 두 번째 지적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망가진 공장을 고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인건비를 날리더라도 직원들의 복귀를 서둘러야 합니다. 공장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수한 인력은 한번 뺏기면 찾아오기 힘듭니다.”
“그건 그렇지만…….”
“자금이 문제라면 올림푸스에서 5억 달러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원하겠습니다.”
최치우는 말만 내세우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T 모터스 인수 의사를 밝혔다.
5억 달러가 아닌 수십억 달러의 투자를 감행하기로 결정을 내린 셈이다.
“휴직에 들어간 직원들은 불안해하고 있을 겁니다. 이미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겠죠. 그들에게, 그리고 T 모터스를 지켜보는 세상에 확신을 줘야 합니다. 불의의 사고가 일어났지만 미래는 더욱 밝을 것이라고.”
최치우의 말에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사고 이후 계속해서 축 늘어져 있던 브라이언은 심장이 뜨겁게 뛰는 기분이었다.
“올림푸스의 인수는 강력한 반전의 메시지가 되겠죠.”
최치우는 다시금 인수를 언급했다.
불과 2시간 전에 했던 말이지만, 브라이언의 자세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브라이언도 최치우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떤 방식으로 인수를 생각하는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현재로선 T 모터스 주식이 계속 떨어질 전망입니다. 그렇기에 손해를 보고라도 하루 빨리 지분을 매도하려는 대주주들이 있죠. 올림푸스의 CFO 임동혁 이사가 그들과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내일 증시가 열리면 올림푸스는 순식간에 T 모터스의 대주주로 등극할 예정입니다.”
최치우는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상대가 빠져나갈 수 없는 판을 만든 다음 게임을 한다.
브라이언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최치우를 적으로 돌린다면 상상하기 힘들 만큼 괴로워질 것 같았다.
“추가로 브라이언, 당신이 소유한 지분의 절반을 나에게 매각해 주길 바랍니다. 그럼 나와 올림푸스가 1대 주주, 당신이 2대 주주가 되는 겁니다.”
사실 브라이언 입장에서는 뼈아픈 조건이다.
주식이 바닥을 친 상태에서 지분을 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재가 나기 전이었다면 훨씬 더 비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최치우는 T 모터스의 위기를 발판삼아 세계 최고의 전기차 회사를 집어삼키는 셈이다.
아무도 엄두를 못 내는 모험이지만, 위기를 이겨내면 역사에 남을 투자로 길이길이 칭송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비즈니스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최치우가 승부수를 던진 것처럼 브라이언도 운명의 주사위를 던질 차례였다.
회사가 망하느냐, 다시 기회를 얻느냐의 기로에서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경영권은…….”
“전기차에 대해서는 당신이 세계 최고의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CEO 직위는 물론이고, 기술 개발과 생산에 대한 전권을 계속 가져가면 됩니다. 대신!”
최치우는 단서를 달았다.
브라이언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T 모터스 인수와 관련된 모든 작업을 중단할 것이다.
그는 미래를 여는 혁신적 기업가지만, 손해 보는 자선사업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기술 이외의 파트는 나를 믿고 맡겨줘야 합니다. 홍보, 가격 책정, 유통까지.”
브라이언은 최치우의 요구를 어느 정도 예상한 눈치였다.
그러나 뒤이어진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T 모터스라는 브랜드 이름도 바꿀 겁니다.”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름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세계 최고의 전기차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까?”
“하지만 어떻게 쌓은 브랜드 가치인데…….”
“사람들은 T 모터스를 들으면 공장에 불이 난 것부터 떠올리겠죠. 새로운 이름, 새로운 이미지로 세계 최고의 전기차 브랜드를 만듭시다. 그리고 석유 패권을 유지하려는 놈들에게 한 방 먹여줍시다.”
최치우가 손을 내밀었다.
그냥 악수나 하자는 게 아니다.
브라이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올림푸스라는 동아줄을 잡지 않고서는 절벽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비록 처음 만난 사이지만 최치우는 브라이언의 영혼을 휘어잡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처억.
잠시 망설이던 브라이언이 최치우의 손을 맞잡았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벼랑 끝에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T 모터스, 아니 퓨처 모터스의 역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