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석유 전쟁>
에릭 한센이 작년부터 각 국의 대체에너지 개발 회사에 투자를 실시한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월스트릿의 선수들은 에릭이 좋게 보면 금융 천재, 나쁘게 보면 약탈적 M&A를 즐기는 하이에나란 걸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에릭을 혁신적인 투자자로 인식해 왔다.
그가 전기차, 대체에너지, 우주 로켓 등 미래를 여는 사업에 투자하며 이미지 메이킹을 했기 때문이다.
최근 여동생의 탈세와 횡령 스캔들로 곤욕을 치렀지만, 에릭의 이미지는 여전히 좋은 편이었다.
최치우와 에릭을 동서양의 젊은 혁신가로 비교하는 기사도 종종 실릴 정도였다.
물론 최치우는 그의 실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에릭이 네오메이슨의 일원인 것도, 혁신적인 이미지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돈에 눈이 먼 하이에나인 것도 다 안다고 여겼다.
이미 여러 번 에릭 한센을 궁지에 몰았고, 잊지 못할 굴욕을 선사하기도 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에릭의 존재가 무진장 커보였지만, 이후로는 금융 자산이 많을 뿐 한 수 아래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나니머스와 세계 각국의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받은 보고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 감춰진 진실 속 에릭 한센은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네오메이슨의 선봉대이자 정찰조였다.
금융으로 돈을 버는 건 에릭에게 주어진 진짜 임무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돈이라면 얼마든지 잃어도 된다.
수백억, 수천억을 잃어도 네오메이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에릭의 역할은 새롭게 등장한 혁신적인 사업을 파악해 낱낱이 분석하는 것이다.
전기차, 대체에너지, 우주 로켓, 자율 주행 시스템 등등.
인류와 세계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나타나면 에릭은 무조건 투자를 감행했다.
그는 주요 투자자 자격으로 사업의 속살을 살펴보고, 네오메이슨과 정보를 공유한다.
덕분에 대외적으로는 혁신적인 투자자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새로운 사업이 네오메이슨의 패권, 석유를 비롯한 기존의 질서에 위협이 될지 간을 보는 스파이인 셈이다.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앞장서서 혁신적인 사업을 망친다.
이번처럼 T 모터스 공장에 불을 지른 것은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다.
보통은 주가 조작으로 장난질을 치고, 기업의 재무 구조를 취약하게 만든 다음 경영진을 교체하면 게임 끝이다.
과거 애플이 스티브 잡스를 쫓아낸 게 실수였다면, 에릭과 네오메이슨은 고의로 수많은 혁신가의 싹을 짓밟았다.
원래는 전기차 분야도 그렇게 망치려고 했었다.
그런데 최치우가 전금녀의 현금을 동원해 주가를 방어했고, T 모터스에 관심을 보이자 다급해진 것이다.
경영권을 흔들기 힘든 상황에서 전기차 4,500대가 풀리면 각 국의 인프라가 급성장할지도 모른다.
석유 패권으로 세계의 질서를 주름잡는 네오메이슨에겐 뼈아픈 카운터펀치다.
그렇기에 부랴부랴 불을 내며 완성된 차는 물론이고, 생산 설비까지 날려 버린 것이었다.
네오메이슨도 꼬리가 밟힐 것을 각오하고 무리수를 뒀다.
그리고 결국 진실을 추적하는 최치우에게 꼬리를 잡혔다.
사실 최치우는 에릭에게 타격을 입히려고 전금녀의 자금을 동원했을 뿐이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석유 패권을 놓고 네오메이슨과 한판 붙은 셈이 됐다.
‘내가 아니었으면 불을 지르는 강수를 두진 않았겠군. 책임감을 느껴야 하나…….’
최치우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동차 시장을 바꿀 거라고 주목받았던 T 모터스 주가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들은 미국 정부에 구호 금융을 요청하며 망하기 직전까지 내몰린 신세로 전락했다.
최치우와 에릭의 싸움이 나비 효과가 되어 어마어마한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에릭 한센, 네오메이슨……. 너희들의 잘난 패권을 위해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라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쓰레기 같은 놈들이었어.’
수천억을 날려가면서 기어코 싹을 밟는 모습을 보면 네오메이슨의 야욕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다.
최치우가 부랴부랴 김도현 교수와 임동혁에게 경호원을 붙인 것도 당연했다.
전기차 공장에 불을 지를 정도면 킬러를 보내는 건 일도 아니다.
한국이 치안 안전지대지만, 지금까지 생명의 위협을 못 느낀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소울 스톤 발전소가 완공되고, 실제로 도시의 에너지를 책임지기 시작하면… 그때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최치우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에릭을 몇 번 이겼다고 해서 승부가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막 네오메이슨이라는 빙산의 모습을 알아가는 단계였다.
씨익-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최치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야 싸울 만한 적수라는 느낌이 드는군. 어쩐지 너무 만만했어.”
최치우의 영혼에 각인된 호승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받기만 하는 성격이 아니다.
은혜든 원수든 되로 받으면 말로 갚아줘야 직성이 풀린다.
무엇보다 세계를 주무르며 인류의 발전을 막는 집단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전금녀가 피해를 봤기 때문만은 아니다.
특권 의식에 찌들어 있을 네오메이슨의 존재 자체가 너무 거슬렸다.
“재수 없는 새끼들.”
최치우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그는 현대에 환생한 이후 쌍욕을 뱉은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더 심한 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최치우에게 불멸의 전사라는 칭호를 붙여준 첫 번째 세상, 링스 월드의 하이엘프 제국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이엘프들은 숭고한 핏줄을 자부하며 다른 종족을 착취했다.
결국 치우는 무자비한 살육 전쟁 끝에 하이엘프 황제와 황태자를 죽이고 제국을 몰락시켰다.
네오메이슨의 음모를 알고 보니 하이엘프 제국의 냄새가 났다.
단순히 돈만 밝히는 집단이었다면 이 정도로 열이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릭과 네오메이슨은 최치우로 하여금 역겨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최치우는 네오메이슨이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온 패권을 와르르 무너트릴 작정이었다.
“시궁창에 떨어져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해주지.”
살기가 묻어나오는 말이 현실이 되기까지, 최치우는 쉬지 않고 달릴 것 같았다.
***
-홀홀홀, 처음부터 다 날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들어간 일. 자네 원망은 하지 않겠네.
전화기 너머 들리는 전금녀의 목소리에서 홀가분한 감정이 전달됐다.
그녀는 최치우를 믿고 3천억이 넘는 거금을 투자했다.
T 모터스에 투자한 2천억 원 이상의 주식은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드림 모터스의 지분도 여파를 맞아 30% 넘게 하락했다.
몇 달 사이 무려 천억 원이 넘는 손실을 입은 것이다.
보통 사람은, 아니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길길이 날뛰며 원망을 쏟아내야 정상이다.
그런데 전금녀는 달랐다.
명동 제일가는 큰손이라도 3천억 원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6.25를 경험한 전쟁 세대인 전금녀는 누구 못지않게 악착같이 살면서 돈을 모았다.
그녀가 올림푸스로 달려와 난동을 피워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거물은 거물다웠다.
돈놀이로 큰손이 됐지만, 전금녀는 평범한 수전노가 아니었다.
최치우는 그녀의 통 큰 배포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여사님. 저를 한 번 더 믿어보시겠습니까?”
-자네도 어지간히 대단한 친구야.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 한 번 더 믿어달라니. 사기를 쳤으면 나라를 거덜 냈을 그릇이네.
“비즈니스와 사기는 한 끗 차이죠. 다 같이 잘살면 비즈니스, 자기 혼자 잘살면 사기.”
-홀홀홀홀, 그거 참 기가 막히게 맞는 소리로구만.
전금녀의 독특한 웃음소리가 길게 울렸다.
통화를 하고 있지만, 마치 그녀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최치우는 다시 힘을 주어 말했다.
“아직 손절하기엔 이릅니다. 바닥에 떨어진 주가, 제가 올리겠습니다.”
-자네가 보통 사람이 아닌 건 알지만, 무슨 수로 망해가는 회사를 일으킨단 말이야? 미국 정부에서도 구제금융을 망설이는 상황에……. 아니 그런가? 이대로 가면 남은 2천억도 다 날릴지 모르네.
“사흘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 안에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사흘? 고작 3일 동안 무슨 일을 하겠냐마는……. 어차피 바닥을 친 주식, 자네를 믿고 조금 더 인내해 보지.
“그럼 다시 연락을 하겠습니다.”
최치우는 당당했다.
전금녀에게 미안함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비굴해지지 않았다.
당장은 T 모터스의 화재로 손해를 봤지만, 끝까지 자신을 믿으면 보답 할 자신이 있었다.
사흘은 무척 짧은 시간이지만, 충분히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전금녀와 통화를 마친 최치우는 비행기 탑승 게이트로 걸어갔다.
그의 목적지는 미국이다.
이윽고 최치우를 태운 비행기가 하늘 높이 비상했다.
최치우는 홀라당 불에 타버린 T 모터스의 생산 공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전기차를 향한 인류의 도전이 막힌 바로 그곳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다.
짓밟힌 폐허 속에서 꽃을 피워낼 수 있을지, 최치우의 행보에 실린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
최치우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려 곧장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T 모터스 본사를 포함해 세계의 혁신을 주도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실리콘밸리에 터를 잡고 있다.
금융의 중심은 뉴욕, 정치의 중심은 워싱턴, 무력의 중심은 펜타곤, 그리고 기술의 중심은 실리콘밸리다.
중국이 많이 컸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는 여전히 공고하다.
그나마 중국의 알리바바, 텐센트가 대항마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올림푸스가 등장해 전 세계 대체에너지 혁신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멀었지.”
최치우는 T 모터스 본사 건물에 내려서 혼잣말을 읊조렸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따라잡을 수 있다.
애플, 페이스북, 구글 등 실리콘밸리의 엄청난 저력을 극복하려면 갈 길이 멀다.
다만 희망적인 사실은 올림푸스가 초단기간에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을 위협하는 라이벌로 급부상했다는 점이다.
최치우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려 했다.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T 모터스 본사로 날아온 것도 실리콘밸리 접수 작전의 일환이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 대표님.”
최치우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극진한 인사를 받았다.
T 모터스의 CEO인 브라이언 머스크와 세 명의 임원들이 최치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최치우입니다.”
최치우는 브라이언과 악수를 나눴다.
지금 T 모터스는 언제 파산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출고를 앞둔 전기차 4,500대가 불탔으니 고객들에게 받은 예약금을 돌려줘야 한다.
동시에 공장의 생산 설비도 보수해야 다시 전기차를 만들 수 있다.
돈이 들 곳은 많은데 주가는 바닥을 치고, 자금은 말라붙었다.
이미 적자 상태에서 회사를 이끌어온 브라이언 머스크가 도망가지 않은 게 용한 일이었다.
미국 정부까지 T 모터스의 요청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최치우가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한국의 CEO지만, 소울 스톤을 공개하며 일약 세계적인 혁신가로 떠오른 영웅이 망하기 직전의 회사를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쨌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T 모터스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최치우는 브라이언과 함께 본사 안으로 들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평범한 질문이지만, 임원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재 상황을 떠올릴수록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CEO답게 감정을 숨기고 차분히 대답했다.
“정부가 구제금융을 심사하고 있지만 아직은 답이 없습니다. 당장은 공장의 생산 직원과 연구 인력을 휴직 상태로 돌려놓았습니다.”
“1달, 길어야 2달이 지나면 휴직에 들어간 직원들이 다른 회사로 떠나겠군요.”
최치우는 말을 돌리지 않고 정곡을 찔렀다.
뼈아픈 지적이지만, 상처를 숨기면 더 깊게 곪을 뿐이다.
방금 처음 만났어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한가롭게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브라이언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을 보수하고, 예약금을 반환하는 데 우선 5억 달러가 필요합니다.”
5억 달러, 우리 돈 5천억 원을 망해가는 기업에 투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최치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5억 달러면 급한 불을 끌 수 있습니까?”
“우선 한숨 돌리고 직원들을 복귀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부도 구제금융을 승인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사실 최치우도 어느 정도는 조사를 마치고 왔다.
브라이언 머스크,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전기차 회사를 이끄는 괴짜 기술자.
경영 능력은 극과 극의 평가를 받지만, 브라이언이 가진 전기차 기술에 대한 열정과 실력은 진짜다.
최치우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브라이언을 직접 보고 싶었다.
다행히 그는 벼랑 끝에서도 현실 도피를 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바로 공장으로 가시죠.”
“네?”
최치우의 말에 브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석연치 않은 화재로 소실된 공장에 가봤자 가슴 아픈 광경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때 최치우가 단 한 문장으로 브라이언의 마음을 흔들었다.
“5억 달러, 내가 투자하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 그럼……?”
최치우는 자리에 멈춰서 브라이언과 임원들의 얼굴을 돌아봤다.
올림푸스는 자선사업을 하는 회사가 아니다.
최치우 역시 마찬가지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더 큰 성공을 이룩한다.
그게 최치우와 올림푸스의 일관된 목표다.
곧이어 최치우의 입에서 믿기 힘든 발언이 나왔다.
“올림푸스가 T 모터스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아니, 반드시 인수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