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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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는 차를 타고 강남으로 움직였다.
늦은 밤이지만, 강남은 진정 불야성(不夜城)이었다.
화려한 조명이 더해져 낮보다 더 밝고 활기찬 느낌이 감돈다.
형형색색 슈퍼카가 클럽과 술집이 즐비한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것도 낯선 풍경이 아니다.
슈퍼카에 탄 남자들은 창문을 반쯤 내리고 시선을 즐긴다.
그들은 마치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맹수처럼 위풍당당하게 강남 거리를 주름잡는다.
하지만 웬만한 슈퍼카도 롤스로이스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다.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는 중고차 거래가 활성화돼 있다.
반면 롤스로이스는 중고 매물이 매우 적은 편이다.
진짜 부자들이 신차로 사서 오래 타는 차가 바로 롤스로이스다.
최치우가 몰고 온 롤스로이스 레이스 앞에는 환희의 여신이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그는 요란하게 엑셀을 밟으며 배기음을 뽐내지 않았다.
물 흐르듯 조용하게 논현역 골목으로 들어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최치우의 레이스를 쳐다봤다.
구형 람보르기니와 R8을 타고 한껏 거들먹거리던 남자들은 말없이 창문을 올렸다.
진짜가 나타나면 어중이떠중이는 몸을 사리는 게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최치우는 자신의 차를 향해 쏟아지는 관심을 의식하지 않았다.
겨우 그런 걸 즐기려고 논현동으로 온 게 아니다.
여의도 사무실에서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급히 나온 이유는 하나였다.
강남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임동혁을 픽업하기 위해서다.
임동혁은 몇 안 되는 대학원 동기들과 모임이 있어 차를 두고 나갔다.
어차피 아침까지 마실 작정이기에 택시를 탄 것이다.
그런데 최치우가 사무실에서 뛰쳐나온 시간은 밤 11시 무렵이었다.
하필이면 강남에서 절대 택시가 안 잡히는 마의 시간이다.
콜택시나 택시 어플 모두 자정 근처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장 임동혁을 만나 중요한 대화를 나누려는 최치우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물론 임동혁이 수표 한 장을 꺼내들면 택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강남에서 여의도까지 10만 원을 준다는데 마다할 택시는 없다.
하지만 그러는 시간에 최치우가 움직이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어차피 여의도에서 만나도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결국 최치우는 여자 친구도 아닌 임동혁을 데리러 운전대를 잡게 됐다.
“이야! 이 동네에서 보니 때깔이 확 삽니다. 역시 차는 이래야지.”
미리 길에 나와서 기다리던 임동혁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최치우의 차를 직접 골라준 사람이 임동혁이었다.
지이잉-
“시간 없습니다. 빨리 타세요.”
최치우는 창문을 살짝만 내리고 차갑게 말했다.
길바닥에서 농담 따먹기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임동혁도 분위기를 간파하고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웬만한 일이면 최치우가 밤 11시에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장 만나기 위해 강남까지 데리러 올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 게 분명했다.
사실 임동혁도 오랜만에 동기들과 모인 자리에서 예고 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불평스럽게 툴툴거릴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전화로 말해주지 못할 정도면.”
임동혁은 다시 액셀을 밟고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한 최치우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하지만 최치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계속 앞을 보고 운전을 하면서 대답했다.
“T 모터스 공장의 화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고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에릭 한센을 의심하는 겁니까?”
임동혁은 대번에 그의 이름을 꺼냈다.
최치우와 에릭이 어떤 관계인지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특히 얼마 전에는 뉴욕에서 에릭과 엘리시움 동아시아 지부장 루이스 해밀턴이 굴욕을 당했다.
임동혁은 최치우 덕분에 어디서도 보기 힘든 진풍경을 목격했었다.
한국의 신성 최치우와 월스트릿의 천재 에릭 사이에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에릭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최치우의 아리송한 대답에 임동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뒤늦게 안전벨트를 하며 말을 계속했다.
“누군가 T 모터스 공장에 불을 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에릭 한센은 아닐 겁니다. T 모터스 주가가 폭락하며 에릭 또한 엄청난 손실을 입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값이 떨어진 주식을 대량 매수한다고 해도 언제 손실을 회복할지 모릅니다. 에릭이 M&A로 수작을 부리지만, 이렇게 회사를 망할 위기로 몰아넣으며 벼랑 끝에 서지는 않습니다.”
임동혁의 논리는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최치우도 그와 똑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여의도에서 깨달은 사실을 임동혁에게 말해주면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부와아아앙-!
때마침 도로가 트이며 최치우가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커다란 차체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몸이 의자에 파묻히는 중력을 느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차의 움직임이 마치 최치우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했다.
“T 모터스에 투자된 주식 수천억 원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에릭이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에게는 석유 패권을 지키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
임동혁은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남자다.
석유 패권이라는 말만 듣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려는 찰나, 최치우가 핸들을 꺾으며 말을 이었다.
“전기차 회사와 대체에너지 기업에 에릭이 얼마나, 어떻게 투자를 했는지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인류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체 누구입니까? 그리고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네오메이슨.”
“네?”
임동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부딪쳤다.
짝-!
“뉴욕에서 에릭에게 굴욕을 줄 때! 그때도 대표님이 네오메이슨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에릭을 이용했거나, 아니면 함께 움직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그리고 우린 지금 김도현 교수님의 자택으로 가는 중입니다.”
“이 시간에 김 교수님의 자택을 방문한단 말입니까?”
“T 모터스 공장을 불태운 놈들이 교수님께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한시라도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경계 태세를 갖춰야죠.”
최치우는 마치 전시 상황에 돌입한 장군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입으로만 전쟁, 전쟁거리는 게 아니었다.
상대는 석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최고의 전기차 회사 생산 공장에 불을 질렀다.
더구나 에릭은 이미 아프리카 게릴라 반군 레드 엑스를 동원한 전력이 있다.
그들이 김도현 교수나 임동혁, 또는 최치우 자신을 노리고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석유 패권, 인류의 운명…….”
임동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최치우가 해준 말을 곱씹으며 열심히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동기들과의 모임에서 마신 술기운은 벌써 저만치 날아가고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최치우도 여의도에서부터 계속 날이 곤두선 상태였다.
그동안 에릭 한센과 네오메이슨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주식과 인수 합병으로 거액의 돈을 벌면서 폼을 잡는 같잖은 상대가 아니었다.
석유 패권을 비롯해 다양한 영역에서 인류의 운명을 제멋대로 조종하고 있을지 모르는 어둠의 손길이다.
김도현 교수의 자택으로 달려가는 길, 최치우는 밤하늘처럼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지난밤, 최치우는 급하게 임동혁을 픽업하고 김도현 교수의 연희동 자택까지 다녀왔다.
그는 급작스레 주최한 3인 회의에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오메이슨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에릭과 네오메이슨의 연관점은 무엇인지 등 밝히지 못했던 비밀을 공유했다.
그들이 T 모터스의 공장까지 태워버린 이상 수면 아래에서 싸울 시기는 지났기 때문이다.
올림푸스는 전 세계에서 네오메이슨과 맞서는 선봉장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적어도 임동혁, 김도현과는 모든 것을 터놓고 의논할 필요가 있었다.
해가 뜰 무렵까지 길게 이어진 3인 회의가 끝나고, 최치우는 가장 먼저 경호 업체부터 물색했다.
연예인들 행사 보조를 돕는 수준의 경호 업체로는 부족하다.
그는 실전이 발생했을 때 확실하게 의뢰인을 경호할 수 있는 최고의 전문가들을 원했다.
한국에서 거의 벌어지지 않는 총격전도 염두에 두고 훈련하는 경호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다.
당연히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돈을 아낄 일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김도현 교수나 임동혁이 피습을 당하면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손해를 입는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전문 경호원이 붙는 걸 부담스럽게 여겼다.
치안이 잘 갖춰진 한국에서 약간 오버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최치우의 태도는 강경했다.
무엇보다 둘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올림푸스를 이끄는 리더의 결정에 임동혁과 김도현도 마지못해 수긍을 했다.
최치우는 아무 이유 없이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가 한밤중에 긴급회의를 주최하고, 경호원부터 찾는 걸 보면 심각성을 느낄 만했다.
최고의 업체를 추천받은 최치우는 이후로도 바쁘게 움직였다.
날밤을 샜지만 눈도 붙이지 않았다.
우선 T 모터스 공장 화재의 진실부터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미 언론에서는 기계 오작동에 의한 화재로 결론이 났다.
깐깐한 미국 보험회사에서도 사고로 판정을 내렸다.
그렇기에 이제와 한국에서 진실을 추적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만약 별다른 소득이 없을 경우 석유 패권을 위해 네오메이슨이 일을 벌였다는 주장은 최치우 혼자만의 추측이 된다.
물론 최치우는 증거가 없어도 자기 확신을 믿고 움직일 것이다.
그래도 보다 확실한 대응을 위해서는 진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사실 T 모터스의 화재는 벌어진 일이다.
네오메이슨이 수면 위로 마각을 드러냈다면, 여기서 멈추진 않을 것 같았다.
사태를 관망하다가 언제 또 이런 대형 사고를 일으킬지 모른다.
그들의 다음 수를 예측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최치우는 급한 대로 어나니머스 인도 지부장을 찾았다.
오랜만에 거금을 주고 의뢰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미스터리한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는 중요한 고비마다 최치우의 힘이 돼 줬다.
물론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거래 관계지만, 그들 입장에서도 최치우처럼 믿음직한 의뢰인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어나니머스는 거래 대금을 비트코인으로 요구했다.
당국의 추적이 불가능한 가상 화폐가 음지의 결제수단으로 떠오른 것이다.
예전처럼 복잡하게 자금 세탁을 해서 현금을 건넬 이유가 없어졌다.
최치우는 어나니머스와 다시 거래를 하며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상 화폐의 위력을 체감했다.
일을 맡기려다 새로운 트렌드를 공부하게 된 셈이다.
이렇게 얻은 지식은 분명 써먹을 때가 나타난다.
“어나니머스 하나만 믿고 있을 순 없어.”
최치우는 자타공인 세계 1위 해커들에게 일을 맡기고도 안심하지 않았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네오메이슨을 집중적으로 해부하고 싶었다.
그동안 네오메이슨과 에릭 한센을 너무 만만히 보다 뒤통수를 맞은 격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진실을 파헤칠지 막막했다.
그러나 최치우의 네트워크, 즉 인맥은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세계적인 명성, 실리콘밸리의 스타들을 능가하는 인기, 각종 행사를 다니며 명함을 주고받은 거물들.
그것은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최치우의 무기였다.
최치우가 전화를 하면 받는 사람은 엄청나게 반가워했다.
어려운 부탁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최치우에게 마음의 빚을 지울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도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는 말을 쓴다.
최치우 레벨에서 만나는 국제적인 거물들끼리는 더욱 심하다.
전화 한 통이면 건너건너 CIA 국장이나 이스라엘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 지부장이 연결되는 게 허풍이 아니었다.
최치우라는 이름 석 자의 값어치는 전 세계에서 통하는 보증수표가 됐다.
오히려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그가 동원할 수 있는 힘은 무서울 정도였다.
한밤의 소동이 있고 정확히 1주일 뒤, 최치우는 어나니머스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라인에서 날아온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T 모터스의 화재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에릭 한센의 금융 자산이 어디에 집중 투자 돼 있는지, 에릭과 알게 모르게 연결 된 것처럼 보이는 자금 출처가 어디인지.
보고서를 읽는 최치우의 표정이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가 드디어 네오메이슨의 실체에 근접했다는 사실이다.
최치우는 수면 아래에 숨어 있던 빙산의 진면목을 직시하게 됐다.
에릭 한센이 아닌, 그를 움직이는 주인에게 제대로 선전포고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