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최 대표님의 조건은… 대통령이라 해도 선뜻 승낙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 같군요.”
유영조 대통령은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난색을 표했다.
특정 기업에게 발전소 건립 비용과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20년 동안의 운영권은 국가에서 허락해 준 전례가 없다.
고속도로 민자 유치 같은 경우 길어야 10년의 운영권을 넘겨준다.
그것도 건설비 대부분을 민간 기업이 투자할 때 가능한 일이다.
최치우는 건설비와 부지까지 정부에 요구했고, 국가에서 관할하는 에너지 생산의 운영권을 20년이나 보장해 달라고 말했다.
만약 군사독재 시대의 대통령에게 똑같은 소리를 했다면 당장 남산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랬다간 최치우에 의해 정부가 박살 났겠지만.
“대통령님.”
최치우는 차분한 어조로 대통령을 다시 불렀다.
단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무리한 요구라는 사실을 최치우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껏 유영조 대통령은 올림푸스를 위해 많은 편의를 봐줬다.
정부가 방해만 안 해도 국내외 사업을 전개하는 데 큰 힘이 된다.
그래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최치우는 반드시 자신의 조건을 관철시킬 생각이었다.
“외람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지요. 세계를 놀라게 만든 소울 스톤, 그리고 대체에너지 개발 모두 우리 정부에서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사안입니다.”
대통령은 협상에 임할 자세를 보였다.
존재를 공개하는 것만으로 올림푸스 시가총액을 4배 넘게 뛰게 만든 물질이 바로 소울 스톤이다.
풍력, 수력, 태양력 등 다양한 대체에너지가 연구되고 있지만 대부분 국내 실정에 맞지 않다.
그런데 세계 최초로 친환경과 효율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소울 스톤 발전소를 세운다면, 유영조 대통령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사실 일은 올림푸스가 다 한다.
그래도 국민들은 어느 대통령 임기에 최초의 소울 스톤 발전소가 건립됐는지 기억할 것이다.
대통령 입장에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카드였다.
최치우는 그 점을 알기에 강하게 나가기로 작심했다.
“만약 올림푸스가 중국에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짓는다면, 중국 정부에서는 어떤 혜택을 제공할까요?”
“그런 가정은…….”
“부지와 건설 비용, 그리고 20년이 아닌 50년의 운영권도 보장해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는 미친 듯이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폭발적인 경제 발전으로 에너지 소모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다.
게다가 베이징의 대기오염이 세계적인 뉴스가 되는 등 친환경 이슈에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 와중에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지을 수 있다면 중국의 1인자인 국가 주석이 두 발 벗고 나설지 모른다.
유영조 대통령은 최치우가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국가의 수반과 한창 승천하고 있는 젊은 CEO의 1 대 1 독대.
여기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
청와대와 여당의 보좌를 받아 실무진끼리 협상할 문제가 아니었다.
최치우도 그럴 생각이 없기에 곧장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유영조 대통령은 대승적 결단을 요구하는 최치우의 눈빛을 느꼈다.
하지만 이대로 모든 걸 내줄 순 없었다.
정부가 퍼주기식 계약을 체결하면 비판에 휩싸일 여지가 있다.
소울 스톤 발전소 건립은 양날의 검이다.
대통령은 조금이라도 정부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어야 한다.
“우리 정부가 부지를 제공하고, 10년의 운영권을 보장해 주면 적절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나요?”
“죄송하지만, 그렇다면 중국이나 인도에 발전소를 짓겠습니다.”
“그리 쉬운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올림푸스의 뿌리는 대한민국에 있지 않습니까? 오성그룹이나 다른 대기업들이 무턱대고 해외 공장을 늘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지요.”
대통령의 말속에 뼈가 담겨 있었다.
국내 기업은 정부의 관할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소울 스톤 발전소를 해외에 지으면 한국 정부와 척을 져야 한다.
이제까지의 우호적 관계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
그래서 오성그룹이나 현기자동차 그룹도 이런저런 손해를 봐가며 국내 정치에 휘둘린다.
그러나 올림푸스는 다르다.
최치우는 대통령의 뼈 있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성그룹을 포함한 국내 대기업은 제조업이 기반입니다. 반도체, 자동차, 화학, 중공업, 조선……. 분야를 막론하고 대규모 공장과 수많은 근로자를 생산 라인에 투입해야만 합니다.”
순간 유영조 대통령의 안색이 변했다.
아차, 싶은 것이다.
올림푸스는 시가총액으로 재계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 됐다.
하지만 다른 대기업과는 비슷한 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올림푸스의 직원은 현재 진행 중인 공채 인력을 포함해도 300명 이하입니다. 저희는 내수 시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내일 당장에라도 세계 어느 나라로든 본사를 이전할 수 있습니다.”
최치우는 정중한 태도로 정곡을 찔렀다.
오성그룹은 본사를 옮기고 싶어도 못 옮긴다.
국내 고용 인력이 이미 너무 많고, 공장과 시설 투자도 어마어마하게 이뤄졌다.
오성의 제품이라면 무조건 믿고 사주는 내수 시장을 놓치기도 어렵다.
세금 문제를 비롯해 뿌리가 한국에 단단히 얽혀 있는 셈이다.
오성그룹이 뿌리 깊은 나무라면, 올림푸스는 자유롭게 바람을 타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민들레다.
미쓰릴 연구, 프로메테우스, 남아공 광산 개발, 그리고 소울 스톤까지.
어느 하나 내수 시장에 의지하지 않는다.
거기에 직원 수도 적고, 아직까지 공장이나 설비 투자도 한 적이 없었다.
내일 당장 옮길 수 있다는 말은 과장이지만, 몇 달 안에 뚝딱 본사를 이전하는 게 가능하다.
그로 인한 타격보다 올림푸스 본사를 새로 받아들일 국가에서 제공할 특혜가 훨씬 더 클 것이다.
정부의 영향력은 독점에서 나온다.
국가를 벗어날 수 없는 상대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올림푸스처럼 언제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기업은 결코 독점할 수 없다.
최치우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인이 됐고, 올림푸스 역시 21세기형 글로벌 기업이었다.
단순히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글로벌 기업이 아니다.
세계 어디서든 문제없이 비즈니스를 전개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기업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구글이나 페이스북, 애플도 글로벌 기업은 아니었다.
최치우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장을 열고 있었다.
유영조 대통령은 최치우의 말에 담긴 진의를 파악했다.
젊은 CEO가 호기롭게 배짱을 부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소울 스톤 발전소를 짓기 위해 최치우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마저 부차적인 문제가 됐다.
올림푸스를 대한민국이 품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최 대표님,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거……. 참 놀라운 일입니다.”
유영조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최치우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세대는 군사정권과 싸우며 시대를 바꾸었지요. 그리고 오래도록 이 나라의 주인 행세를 해왔습니다. 재벌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불호령 앞에 몸을 낮추고 허리를 숙였었지요. 그게 또 나라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한데 이제 세상이 바뀌었나 봅니다.”
명동의 큰손 전금녀가 최치우를 보며 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유영조라는 구시대의 거인이 최치우라는 새 시대의 신성을 오롯이 인정하는 순간이다.
최치우는 유영조 대통령에게 작지만 중요한 명분 하나를 건넸다.
“소울 스톤 발전소가 세워지면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대체에너지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보다 안전하고, 보다 깨끗한 환경에서 마음껏 풍요를 누릴 수 있기를. 내가 무리를 한번 해보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최치우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비즈니스를 위해 속에 숨겨둔 칼을 휘둘렀지만, 서로 품격을 잃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나이와 지위를 초월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꼰대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유영조는 몇 없는 존경스러운 어른이었다.
“이렇게 합시다. 청와대에서 논의가 시작되면 언론이 냄새를 맡겠지만, 전격 발표까지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는 것으로.”
“올림푸스에서 소식이 새어나가는 일은 없도록 신경을 쓰겠습니다.”
“정부와 올림푸스의 MOU 체결은 상징성을 감안해 환경부 장관이 대표로 나가는 게 어울릴 듯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정부에서 만든 안을 최대한 존중하겠습니다.”
최치우는 원하는 조건을 받아냈다.
그렇기에 나머지 사소한 문제는 모두 양보할 용의가 있었다.
발전소를 어디에 지을지 부지 선정도 정부에게 맡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가장 필요한 지역에 발전소가 들어서야 주민들도 수혜를 입는다.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다시 훈훈해졌다.
최치우는 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지어 건국 이후 유례가 없는 특혜를 쟁취했다.
소울 스톤은 더 이상 미래의 에너지원이 아니다.
바로 지금,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현재의 대체에너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최치우와 올림푸스는 역사를 쓰고 있었다.
***
쉬이이이이-
한 줄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최치우와 임동혁은 언덕 위에서 소울 스톤 발전소가 건립될 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때요? 기대 이상이죠?”
최치우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내 진지한 표정이던 임동혁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금싸라기 부지를 내주다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부에서 큰마음을 먹은 것 같습니다.”
“누구 덕분이겠어요? 나의 찬란한 협상력의 결과 아닙니까?”
최치우는 농담을 던지며 기분을 냈다.
부지를 직접 확인하니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 것처럼 손끝으로 뜨거운 기운이 넘쳤다.
발전소가 들어설 지역은 외딴 지방이 아니었다.
수도권, 그것도 서울에 바로 인접하여 한창 뜨고 있는 도시 광명의 외곽 공터를 부지로 제공 받게 됐다.
원래 정부에서는 서울과 한참 떨어진 지방 도시를 우선순위에 놓았었다.
그러나 최근 개발이 시작된 광명 뉴타운이 변수로 급부상했다.
광명 뉴타운은 서울 인근에 개발되고 있는 대규모 신도시 프로젝트다.
국토부는 서울의 들끓는 부동산 시장을 광명 뉴타운 수요로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소울 스톤 발전소라는 월척을 들고 온 것이다.
부지와 건설 비용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20년의 운영권을 넘기는 파격적인 조건이지만 이미 협상은 끝났다.
다른 기업 같으면 퍼주기 논란이 생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자부심으로 떠오른 올림푸스를 정부보다 더 강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환경성과 효율성, 안정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울 스톤 발전소는 세계가 주목하는 혁신 시설이다.
그러한 소울 스톤 발전소에서 생산된 에너지로 광명 뉴타운의 전력을 공급한다면?
뉴타운의 인기도 올라가고, 한국 정부의 친환경 대체에너지 정책도 알리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그렇게 부지가 수도권으로 결정 된 것이다.
“광명 뉴타운에 입주할 수십만 명이 쓸 전기를 소울 스톤 하나로 해결하게 될 겁니다.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최치우는 모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뉴타운도, 발전소도 건립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
공사가 진행 중인 뉴타운의 첫 번째 아파트 단지는 2년 후 입주 예정이다.
발전소도 지금부터 설계를 시작하면 그즈음 완공 될 것이다.
그러나 2년이라는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갈 것 같았다.
겨우 700일만 지나가면 상상도 못 했던 미래가 현실이 된다.
환경 오염 없이, 그리고 원자력처럼 위험부담 없이 도시의 에너지를 책임질 수 있다.
최치우는 소울 스톤으로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초석을 쌓은 것이다.
그 짜릿한 기분은 말로 설명 할 수 없다.
몇 조원 대의 부자가 되거나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는 것보다 더 가슴 뛰는 일이었다.
‘물론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지. 우린 겨우 샐러맨더의 소울 스톤 하나로 에너지 추출에 성공했을 뿐, 아도니스의 소울 스톤은 파괴될 수도 있어. 더 많은 소울 스톤을 찾아서 실험 성공률을 높여야 해.’
최치우는 전율을 느끼면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소울 스톤은 반영구적인 에너지원이다.
대신 현재로선 수량이 한정돼 있고, 에너지 추출 성공률이 25% 수준이다.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최치우가 발에 땀이 나도록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한다.
우우우우웅-
그때였다.
최치우의 주머니 속 폰이 정신없이 울렸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전금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국 최고의 현금 부자인 전금녀는 기꺼이 최치우의 장기 말이 돼 주기로 했다.
그녀가 3,000억을 투자한 덕분에 주요 전기차 회사의 주가가 유지됐다.
주가를 조작해 전기차 회사를 집어삼키려던 에릭 한센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고 나서 제법 오랜만에 연락이 온 것이다.
“여사님, 잘 지내셨죠?”
최치우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예전처럼 홀홀홀거리는 전금녀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그런데 전금녀의 음성에서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뭔가 큰일이 터진 듯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최치우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T 모터스의 공장에 불이 났다는구먼.”
“미국 공장에요?”
발전소 부지를 보며 들떠 있던 최치우는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T 모터스는 업계 1위의 전기차 회사다.
전금녀는 최치우의 말을 듣고 T 모터스에만 2,000억 원이 넘는 현금을 쏟아부었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상반기 출고 예정이던 전기차 4,500대가 홀라당 불에 타버렸다네. 아무래도 수상쩍지 않은가?”
전금녀는 T 모터스의 화재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치우도 마찬가지였다.
캄캄하고 음침한 음모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았다.
미래의 에너지 패권을 둘러싼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