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빅딜>
극비(極秘).
올림푸스에서 극비라는 단어는 함부로 쓰이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보안을 지켜야 할 중요한 사안일 때만 극비라는 코드 네임이 붙는다.
소울 스톤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극비로 취급됐다.
실험을 진행한 김도현 교수와 마틴 그랜트 교수, 그리고 최치우와 임동혁밖에 모르는 사안이었다.
마틴 교수는 하버드를 박차고 미래 에너지 탐사대로 오면서 보안 유지 서약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내용이 추가된 서약서를 한 장 더 쓸 수밖에 없었다.
마틴 교수를 포함해 누구든 비밀을 유출하게 되면 패가망신 수준의 소송을 당하게 된다.
공식적으로 실험 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네 사람은 조심해야 할 게 무척 많았다.
우선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없다.
잔뜩 취하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최치우는 특히 독주를 좋아하는 임동혁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위스키 한 잔쯤은 상관없지만, 자제를 못 할 것 같으면 아예 술을 멀리할 필요가 있었다.
어지간해선 술이나 도박 등을 그만두지 않는 임동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술이나 도박에 빠졌던 것은 아드레날린 중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올림푸스를 키우는 데 집중하며 더 큰 흥분을 느끼고 있다.
술을 아무리 좋아해도 임동혁이 사고를 칠 것 같진 않았다.
물론 음주만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전화 통화를 비롯해 이메일 작성, 채팅 메신저 등 통신 보안에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통신 보안이라는 말은 주로 군대에서 사용한다.
그러나 산업 스파이들이 활개 치기 시작하며 기업에서도 통신 보안을 강조하게 됐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산업 스파이들의 수법 또한 교묘해졌다.
007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기상천외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최치우 역시 도쿄대학교에서 기밀 자료를 빼낸 적이 있었다.
덕분에 독도의 해저 자원 개발이 가능해졌고, 미쓰릴의 단서도 찾을 수 있었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부와 기업들은 서로의 극비 자료를 손에 넣기 위해 눈에 불을 킨다.
올림푸스도 까딱하면 얼마든지 산업 스파이에게 털릴 수 있는 것이다.
톡톡톡-
최치우는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길 때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다.
오랜만에 여의도 사무실로 출근한 최치우는 서류를 보지 않았다.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생각을 정리할 뿐이었다.
사실 고민은 집에서 해도 된다.
굳이 사무실로 나올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직원들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 특별한 기운을 받는다.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움직이자.”
점심이 다가올 무렵, 최치우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생각은 충분히 했다.
행동으로 보여줄 타이밍이다.
“시간을 끌어봤자… 보안이 깨질 가능성만 높아져. 미래 에너지 탐사대 내부에서도 복잡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고. 내가 먼저 치고 나가야겠어.”
그는 소울 스톤 실험 결과를 언제까지 숨기긴 힘들다고 판단했다.
자신을 포함해 네 사람은 극비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미래 에너지 탐사대에는 김도현과 마틴 외에도 여러 명의 교수들이 포진해 있다.
나머지 교수들도 국내와 세계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소울 스톤을 놓고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지속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김도현과 마틴은 이미 소울 스톤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실험에 성공해 버렸다.
둘이 티 나게 행동하지 않더라도 묘한 기류가 맴돌 수밖에 없다.
다른 연구진들이 이상한 기색을 눈치 채면 미래 에너지 탐사대의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
기껏 해외 대학을 때려치우고 미래 에너지 탐사대로 합류한 교수들이 서운함을 느끼면 곤란하다.
최치우는 실험 결과를 어떻게 활용할지 매듭을 짓고, 너무 늦지 않게 내부적으로 사실을 공유 할 작정이었다.
“담판을 지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군.”
그는 유영조 대통령을 떠올렸다.
최치우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유영조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1년 6개월밖에 안 남았다.
그 전에 소울 스톤을 이용한 발전소 건립을 확정짓는 게 유리하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도 세계 최초의 친환경 대체에너지 발전소를 짓는 것은 쌍수를 들고 환영 할 일이다.
더구나 유영조 대통령의 퇴임 이전 대표적인 업적으로 삼을 수 있다.
최치우는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소울 스톤 발전소 건립을 놓고 정부에서 어떤 지원을 받아야 만족스러울까.
그는 유영조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보기 드물게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정치 지도자라고 느꼈다.
그러나 비즈니스는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다.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해야만 좋은 감정도 지킬 수 있다.
괜히 어설프게 양보하면 결국 인간관계도 틀어지고 만다.
최치우는 절대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한국 정부의 조건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다른 나라에 발전소를 지으면 된다.
이왕이면 국익을 우선하지만,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국가에 묶일 이유는 없다.
궁극적으로 올림푸스가 잘 되어야 장차 한국의 미래도 책임질 수 있다.
처억.
고민을 끝낸 최치우는 전화기를 들었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지만, 최치우의 결단은 올림푸스를 지금의 위치로 이끌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청와대 총무비서관 직통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총무비서관에게 마음대로 전화할 수 있는 사람도 한국에 몇 명 없을 것이다.
사실 곧바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도 된다.
최치우는 유영조 대통령이 소수의 최측근에게만 공개한 개인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
그래도 공적인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예의와 절차를 중시해야 한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 아니라면 청와대 비서실을 거치는 게 낫다.
“최 대표님!”
벨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무비서관이 전화를 받았다.
반가움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총무비서관은 1급 공무원이자 청와대 안살림을 책임지는 측근이다.
그렇지만 갑자기 걸려온 최치우의 전화를 무척 반기고 있었다.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청와대 실세들에게도 최치우는 스타였다.
보통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은 재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청문회 시즌만 되면 불러다가 괴롭힐 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치우처럼 어린 나이에 스스로 세계에 우뚝 선 사람은 건드릴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국민 여론이다.
그러한 여론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인물이 최치우이기 때문이다.
“비서관님, 잘 지내셨죠?”
“그럼요. 이렇게 전화도 다 주시고……. 혹 필요하신 일이 있으십니까?”
총무비서관의 역할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청와대 집사다.
과연 그는 눈치 빠르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최치우는 말을 돌리지 않고 그가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던졌다.
“대통령님을 뵙고 싶습니다.”
“어떤 용무라고 말씀을 드리면 될는지요?”
“레임덕을 막을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을 선물로 드리겠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총무비서관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말이었다.
최치우가 없는 말을 지어내며 허세를 부릴 사람은 아니다.
짧지만 강렬한 침묵이 감돌았다.
“바로 말씀을 드리고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최 대표님.”
“감사합니다.”
최치우는 전화기를 들고 짙은 미소를 지었다.
대통령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거래를 따낼 준비가 끝났다.
언제나처럼 최치우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
청와대 안가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대통령 내외가 거주하는 특급 경호처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민정수석도 대통령의 특별한 초청 없이는 안가에 들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최치우에겐 청와대 안가의 마당이 낯설지 않았다.
벌써 몇 번이나 대통령이 직접 내려준 차를 마셔봤기 때문이다.
휘이이-
초봄이긴 해도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이따금 부는 바람은 따스하기 보단 차갑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유영조 대통령은 뜰에 앉아 차를 마시는 걸 즐겼다.
“어때요? 향이 좋지요.”
“그윽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습니다.”
“허허허, 맞아요. 참으로 그윽한 향이지요.”
대통령은 손수 내린 차가 마음에 드는 듯 다향(茶香)을 즐겼다.
지난번 만남에서 유영조 대통령과 최치우는 마음을 많이 터놓았다.
최치우는 100m 세계신기록을 세울 수 있는 달리기 능력을 보여줬고, 대통령은 향후 국가 대표 감독을 소개해 주기로 약속했다.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통수권자에게 미리 능력의 일부를 보여준 것이다.
최치우로서도 모험을 한 셈이었다.
잘못하면 이상한 돌연변이 취급을 받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얻은 게 적지 않았다.
그가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음을 간파한 대통령이 네오메이슨에 대해 알려줬기 때문이다.
에릭 한센과 같은 거물들의 연합체, 네오메이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최치우의 전략이 달라졌다.
대통령과 최치우는 서로 부족한 정보를 전달하며 윈윈(Win-Win)하는 관계가 됐다.
그러고 나서 오늘 다시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사이 최치우는 소울 스톤을 공개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대통령도 소울 스톤의 실체가 가장 궁금 할 것이다.
“S대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했다지요. 세계적인 석학들이 서울로 모여들고……. 최 대표님이 우리나라를 위해 참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아 대견합니다.”
유영조 대통령의 입에서 미래 에너지 탐사대 이야기가 나왔다.
에둘러 말하지만, 소울 스톤 연구 개발 과정을 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치우는 찻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사실 그 말씀을 드리기 위해 대통령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정권 후반기,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레임덕을 막아주겠다고… 그리 말했다 들었습니다. 최 대표님의 패기가 느껴졌지요.”
레임덕, 즉 정권 말기 지지율이 떨어지는 현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렇기에 어떤 정부도 레임덕이라는 단어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최치우는 대놓고 레임덕을 막아주겠다는 말을 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건방진 도발로 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유영조 대통령의 인상은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물론 그가 마냥 인자하고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아무리 우호적인 관계라 해도 최치우의 카드가 성에 미치지 못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소울 스톤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
차의 잔향을 음미하던 대통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설마 했지만 가장 극적인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통령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현재 정부에서 건립하는 춘천시 열병합발전소, 그 이상의 전력을 소울 스톤 하나로 생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가능성이 아닌… 전력 생산까지 확실하다는 뜻이 맞습니까?”
유영조 대통령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임기 중 세계 최초의 소울 스톤 대체에너지 발전소를 건립할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되면 최치우가 호언장담한 것처럼 레임덕을 막는 게 꿈은 아니다.
역대 최고의 지지율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른다.
최치우는 확신을 담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화력 발전과 동일한 원리로 열기와 증기를 발생시키는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소울 스톤 발전소를 건립하는 비용과 유지 비용은 열병합발전소 대비 절반 이하입니다. 결정적으로 환경성 부분에서는… 기존의 어떤 발전소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미래가 성큼 다가왔다.
그것도 대한민국에 최초로.
유영조 대통령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우리 과학기술보좌관은 소울 스톤을 상용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측했습니다.”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게 올림푸스 스타일입니다.”
최치우가 가볍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웃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고 싶은, 상상을 뛰어넘는 보물이 나타났다.
당연히 공짜로 보물을 가질 수는 없다.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대통령이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최 대표님에게 무엇을 해주면 되겠어요? 솔직한 바람을 듣고 싶습니다.”
타이밍이 왔다.
최치우는 유영조 대통령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봤다.
“발전소 건립 비용과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향후 20년 동안 소울 스톤 발전소의 운영권을 올림푸스가 소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