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4분의 1>
4라는 숫자는 한자 문화권에서 오래도록 불길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21세기,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가 연결되는 시대지만 여전히 웬만한 건물 엘리베이터에는 4층 대신 F자가 표시돼 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13이라는 숫자, 또는 666을 연상시키는 6이라는 숫자는 불길하게 여겨지는 편이다.
그래도 6층이나 13층을 다른 글자로 바꿀 만큼 유난스럽지는 않다.
확실히 서양에 비해 동양 3국이 미신이나 징크스를 강하게 의식하는 것 같았다.
“소울 스톤을 공개하고 주식이 4배 올랐는데, 이제 4분의 1 확률로 실험을 하다 실패하면……. 우리 시총도 다시 4분의 1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최치우는 임동혁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임동혁은 나름대로 라임을 맞춰서 농담을 한 것이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최치우와 김도현은 웃을 수 없었다.
머지않아 임동혁도 괜한 농담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농담이 진짜로 실현 가능성이 높은 최악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실험을 한 번 할 때, 4분의 1이 나올 확률보다 4분의 3이 나올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물론 25%의 가능성이 결코 낮은 수치는 아니다.
대부분의 주요 연구 실험은 0.1%의 가능성을 보고도 도전을 한다.
그렇게 수백 번의 실패를 거듭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성공 확률도 충분히 높은 셈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를 풀자고 농담을 하기에는 실패하면 잃을 게 너무 많았다.
공기가 싸늘해진 것을 느낀 임동혁은 입을 다물었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했을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최치우는 표정을 풀고 김도현을 쳐다봤다.
“실험 날짜는 언제로 결정이 났습니까?”
중요한 실험을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필요하다.
최치우는 김도현과 마틴에게 사흘의 시간을 줬고, 오늘 회의에서 구체적인 실험 일정과 계획을 듣기로 했다.
김도현 교수는 지난 사흘 동안 밤을 샌 듯 평소보다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가 안경을 콧대 위로 올리며 천천히 대답했다.
“나흘 뒤 최종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에요. 그동안 지속적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지요.”
“시뮬레이션 확률은 달라진 게 있습니까?”
“여전히… 오차를 고려했을 때 25% 안팎의 성공률을 보여주고 있어요.”
김도현 교수는 미안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최치우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계속된 시뮬레이션에도 확률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25%의 성공 가능성은 안정적으로 확보된 셈 아닙니까.”
“맞아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긴 시기상조이지만……. 초고강도 레이저로 소울 스톤의 코어를 자극하는 시뮬레이션과 실험을 계속하게 되면, 언젠가 성공률을 대폭 높일 수 있을지 몰라요.”
“실험 노하우와 기록이 쌓이면 나아질 여지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물론 해봐야 아는 부분이겠지요. 그러나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은 나도, 마틴 그랜트 교수도 동의하고 있어요.”
“좋습니다.”
최치우가 손뼉을 짝 부딪쳤다.
힘을 내자는 의지가 간단한 동작에 담겨 있었다.
“4분의 1이라고 했죠, 임 이사님.”
방금 전 적절하지 못한 농담을 뱉었던 임동혁이 눈짓으로 답했다.
그는 최치우가 한 번 더 타박을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임동혁의 예상은 빗나갔다.
최치우는 밝은 목소리로 희망적인 메시지를 내보냈다.
“우리에겐 2개의 소울 스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소울 스톤을 2개 더 찾아내면… 적어도 1개의 소울 스톤에서는 성공적으로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임동혁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3개의 소울 스톤이 파괴되겠지만, 어쨌든 1개는 살아남아 중대형 발전소와 맞먹는 에너지를 생산하게 된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가 가져온 확률로 보면 분명한 사실이다.
“잃어버릴지 모르는 3개의 소울 스톤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성공을 바라보면 됩니다. 한 번만 성공해도 세계 최초의 업적이니까. 게다가 김 교수님 말씀이 맞다면, 미래 에너지 탐사대도 점차 성공률을 높일 수 있겠죠. 나중에는 25%가 아닌 50%, 70%, 90%의 성공률로 소울 스톤의 에너지를 개발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긍정적일 수 없었다.
최치우도 처음에는 25%라는 낮은 확률, 그리고 소울 스톤이 파괴될 수 있다는 리스크를 걱정했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현재 단계에서는 초고강도 레이저 실험이 최선이다.
그렇다면 현실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한다.
최치우는 정신 승리가 아닌, 현실에 기초한 대안을 제시하며 긍정의 힘을 키웠다.
“우리 각자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김도현과 임동혁이 최치우를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 보통 지시가 떨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무려 소울 스톤을 걸고 실험을 진행하게 된 상황이다.
오늘 최치우가 말하는 부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우선 나는 더 많은 소울 스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게 구하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견제도 심해지겠지만, 최선을 다해야죠. 교수님께선 실험 성공뿐 아니라 보안 유지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주세요. 결과를 떠나서 실험이 진행된다는 사실 자체가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됩니다.”
“명심하겠어요.”
“현재 미래 에너지 탐사대에서 소울 스톤 실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죠?”
“나와 마틴 교수, 우리 둘밖에 없어요. 다른 연구진에게도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어요.”
“다행입니다. 그러나 마틴 교수가 본의 아니게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흘릴지 모릅니다. 각별히 주의하도록 일러주세요.”
“한 번 더 확인해 볼게요. 치우 군 말대로 실험 전부터 결과가 난 이후까지… 나와 마틴 교수만 참여하며 진행을 하겠어요.”
김도현 교수가 사뭇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소울 스톤을 걸고 실험을 한다는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면 골치가 꽤나 아파질 것이다.
성공 여부를 떠나서 온갖 언론과 투자자들이 관심을 보이고,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할 게 뻔했다.
최치우는 아직까지 마틴 그랜트 교수와 인간적인 신뢰를 쌓지 못했다.
결국 미래 에너지 탐사대를 이끄는 김도현 교수가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다.
곧이어 최치우의 시선이 임동혁에게 향했다.
“임 이사님.”
“네.”
“지금도 직원 채용부터 경영 전반에 걸쳐 일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최치우는 먼저 당근을 줬다.
임동혁이 팀장들을 독려하며 올림푸스의 대소사를 챙기는 걸 치하했다.
실제로도 그가 없으면 올림푸스의 톱니바퀴는 돌아가지 않는다.
뜻밖의 칭찬을 받은 임동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는 찰나, 최치우는 당근 다음 곧장 채찍을 들었다.
“만에 하나 소울 스톤이 실험에서 파괴되어도, 그리고 내가 소울 스톤을 찾느라 회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져도……. 올림푸스가 흔들림이 없도록 체계를 단단히 잡아줘야 됩니다.”
“그러겠습니다.”
임동혁은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각오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대답을 하는 표정도 전에 없이 진지해 보였다.
최치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 것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회사가 크게 휘청거릴 수 있는 실험을 앞두고 있다.
그 실험을 나흘 앞두고 김도현과 임동혁에게만 특별히 당부를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최치우가 어떤 마음으로 지시를 내리는지 이해했다.
더더욱 각별히 최치우의 말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치우는 4분의 1의 확률에 잠식되는 대신, 밝게 웃으며 대안을 찾는 쪽을 택했다.
아직 최악의 상황은 펼쳐지지도 않았다.
설령 최악의 결과가 나와도, 혼자서 하이 엘프 제국군 수만 명에게 포위당했던 경험보다는 나을 것이다.
최치우는 여전히 다른 차원에서 보여줬던 야성을 잃지 않았다.
다만 현대 사회에 맞춰 야성을 컨트롤하는 법까지 깨달았을 따름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일반 경영인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실험을 선택한 것만으로도 최치우는 야성을 증명한 셈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실험이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올림푸스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왼쪽과 오른쪽에 앉은 김도현, 임동혁과 함께.
그리고 서울과 남아공에서 밤을 새며 땀을 흘리는 식구 같은 동료들과 함께.
최치우는 막아서는 모든 벽을 돌파하며 질주할 태세였다.
소울 스톤 실험을 앞둔 지난 시간은 그에게 쓰지만 몸에 좋은 약이 된 것 같았다.
***
운명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이면 김도현과 마틴이 비밀리에 소울 스톤 실험을 하게 된다.
최치우는 오늘 아침까지 시뮬레이션 실험 결과 보고서를 받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점심이 지나면 김도현 교수와 마틴 교수 모두 휴식을 취할 것이다.
원래 D-DAY 전날에는 푹 쉬는 게 왕도다.
수능 전날에도 휴식이 가장 중요하다.
최치우는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초조해할 두 사람을 위해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믿고 맡기는 것, 먼저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리더로서 해줄 수 있는 역할이다.
타닥- 타다닥-
최치우는 여의도 올림푸스 본사의 대표실에 나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사무실에 나온 건 제법 오랜만이었다.
실험이 내일이라 해서 최치우까지 마냥 손 놓고 놀 수는 없다.
오히려 정신없이 일을 하는 게 시간을 빨리 보내는 방법이다.
그는 본사에서 공채 절차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남아공 본부의 업무도 세밀하게 챙겼다.
80명을 뽑는데 8만 명 넘게 몰린 올림푸스 공채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합격자의 2배수를 선발한 최종 면접에는 웬만하면 최치우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160명 중에 80명이라……. 마음에 드는 사람이 많아서 합격자를 늘릴 수 있었으면 좋겠군.’
최치우는 꼭 80명만 뽑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필요한 인원이 그 정도가 맞다.
하지만 최종 면접에서 놓치기 아까운 우수한 인재들을 발견하면 80명을 넘겨도 상관없다.
올림푸스는 튼튼하게 성장을 지속하는 중이다.
계속해서 사람은 더 필요해질 것이고, 80이 아닌 800명을 미리 뽑아놔도 감당할 수 있다.
물론 억지로 규모를 늘리는 건 최치우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소수 정예를 훨씬 더 좋아한다.
그러나 최종 면접을 보기 전부터 80명이라는 숫자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올림푸스라는 기업의 리더가 된 최치우는 사람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과거처럼 마냥 혼자서 싸울 때와는 다른 시야를 갖게 된 것이다.
“면접이 끝나면 남아공에도 가야겠는데…….”
최치우는 이시환이 보낸 메일로 눈길을 돌렸다.
남아공 본부는 얼른 공채가 끝나고 새로운 직원들이 수혈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개발하는 광산이 늘어나면서 업무량이 두 배, 세 배로 뛰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좋은 소식이었다.
이시환은 남아공 본부장을 맡기엔 너무 어린 나이와 짧은 경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 인력과 전문가들을 무난하게 통솔하며 광산 개발 사업을 진두지휘하는데 성공했다.
이시환의 타고난 성품과 자질을 알아본 최치우의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리키와 헤라클래스도 점검하고, 또 소울 스톤도 찾고.”
최치우는 남아공에서 할 일을 천천히 읊었다.
리키도 최근 새로운 대원들을 뽑았다.
훗날 올림푸스의 칼이 되어줄 헤라클래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남아공에 간 김에 소울 스톤을 찾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정령들은 자연의 기운이 강한 곳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남아공 인근에는 사막지대를 비롯해 기이한 자연 현상이 도드라지는 장소가 많다.
최치우에게 있어 남아공은 정령을 찾고 소울 스톤을 확보하기에 최적의 국가다.
소울 스톤을 공개한 이상, 베네수엘라 같은 제삼국으로 떠나면 의심을 살지 모른다.
그러나 남아공에는 올림푸스의 사업체가 있기에 언제든 편하게 방문해도 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소울 스톤이니까.”
최치우는 더 빨리, 더 많은 소울 스톤을 확보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샐러맨더, 그리고 아도니스.
2개의 소울 스톤이 있었기에 내일 벌어질 실험을 승인하는 게 가능했다.
만약 소울 스톤이 하나밖에 없었다면 선뜻 위험한 실험을 진행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치우는 다른 모니터를 켜고 남아공에서 가볼 만한 장소를 검색했다.
열사의 사막에는 아무래도 불의 정령이나 대지의 정령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그게 뭐가 됐든, 설령 하급 정령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실험의 성공률을 높이고,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해선 무조건 소울 스톤이 많아야 한다.
내일 있을 실험은 최치우의 손을 떠났지만, 그는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추구했다.
김도현 교수의 최선과 임동혁의 최선, 그리고 최치우의 최선이 교차되고 있었다.
최치우는 실험 결과를 듣고, 최종 면접을 본 후 남아공으로 날아갈 계획을 정했다.
세계를 무대 삼아 지구를 누비는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