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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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이뤄진 비밀스러운 미팅은 최치우의 일방적 통보와 함께 끝났다.
받아들이느냐는 엘리시움이 판단할 문제다.
최치우는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없었다.
확실하게 이기는 싸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 길, 임동혁이 옆에서 그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진짜, 비행기 안에서 기대하라고 했지만 설마…….”
“이사님, 미국 왔다고 한국말 까먹었어요?”
“그게 아니고… 천하의 에릭 한센이 이렇게 당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볼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굴욕을 선사할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저 인간, 진짜 콧대 높고 자존심 강하지 않습니까. 아마 며칠은 잠을 못 잘 겁니다.”
“어떻게 에릭을 코너로 몰 수 있었는지, 비결을 가르쳐 줄까요?”
최치우의 말에 임동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혹시라도 최치우가 마음을 바꿀까 봐 얼른 대답했다.
“당연히 알고 싶습니다. 월스트릿의 천재를 무너트리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지만… 보면서도 불가사의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죠. 치명상은 입혔지만. 아무튼 비결은 별거 없습니다.”
최치우는 쌀쌀한 바람에 코트 옷깃을 여미며 숨을 골랐다.
콘크리트 정글인 뉴욕 맨해튼을 가로지르며 비즈니스 비법을 알려주려니 기분이 묘했다.
썩 잘 어울리는 배경인 것이다.
“인정사정 봐주지 마라.”
“네?”
“간단하죠. 하지만 아무나 못 지키는 비결입니다.”
“음…….”
임동혁은 뭔가 와닿는 듯 신중한 얼굴이었다.
최치우는 걷는 속도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에릭 한센의 자산은 올림푸스의 시가총액보다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한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더 독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 델피 한센을 먼저 감옥에 집어넣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겁니다.”
시작은 에릭이 먼저 했다.
아프리카의 레드 엑스를 움직여 헤라클래스 대원을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뒤로 계속된 최치우의 복수는 집요하고 정확했다.
델피 한센의 스캔들을 터트려 구속시킨 건 결정적 한 방이었다.
그때부터 에릭은 냉정함을 잃었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최치우에게 굴욕을 당하는 지경에 처했다.
“사실 그때는 저도 대표님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동생까지 건드리는 걸 보고…….”
임동혁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최치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사님도 생각보다 순진하군요. 싸움에 비겁한 게 어디 있습니까. 내 식구들이 죽거나 다치게 생겼는데 정도만 고집한다면……. 그냥 망해야죠.”
최치우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내뱉은 말은 화살처럼 임동혁의 심장을 찔렀다.
제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자부하며 살아도 그는 재벌 2세다.
날 때부터 온실 속 화초였고, 최치우를 만나 진짜 세상에 눈뜨고 있었다.
임동혁이 섬뜩함을 느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동안 최치우는 무림을 떠올렸다.
명분만 고집하다 천마에 의해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던 정파무림의 답답함이 생각났다.
그에게는 비즈니스도 실제 전투와 다를 게 없었다.
주먹과 칼로 싸우느냐, 돈과 기술로 싸우느냐.
단지 그 차이일 뿐이다.
“루이스 해밀턴이 소를 취하하겠습니까?”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겨 말이 없던 임동혁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최치우는 구글맵으로 현재 위치를 확인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취하할 겁니다.”
“지금 취하하면 얻는 것 없이 망신만 당하는 꼴인데… 정말 그러겠습니까?”
“버티면 더 큰 망신을 당하게 되겠죠. 잃는 건 점점 늘어나고. 루이스와 에릭은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쯤에서 손해를 수습하려 들 겁니다. 어차피 우리 주식이 오르는 바람에 자기들도 이득을 봤고. 대신 다른 작전을 짜면서 다음 기회를 노릴 것 같군요.”
최치우는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태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승부가 끝난 싸움이다.
지나간 싸움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강자의 몫이 아니다.
어쩌다 한 번 겨우 이기는 사람이나 승리의 축배를 터트리기 바쁘다.
언제나 이겨야 하는 사람, 반드시 이기는 사람은 늘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법이다.
최치우는 큰 산처럼 느껴지던 에릭에게 수치심을 안겨줬지만 기고만장하지 않았다.
만약 벌써 목표를 다 이뤘다고 생각해 방심하면 언제든 에릭에게 복수를 당할 수도 있다.
에릭이 최치우 때문에 큰 손해를 봤지만, 아직 그의 자산과 영향력은 건재하다.
뿐만 아니다.
에릭 한센을 전면에 내세운 네오메이슨의 실체는 더더욱 거대할 것이다.
최치우는 빌딩 정글을 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서방 세계를 굴복시킨 징기스칸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고독을 느끼며 싸웠을 게 분명하다.
정상의 외로움을 이겨내야만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최치우는 세상과의 싸움보다 험난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지난 1달, 기록적 성장을 갱신했던 올림푸스는 적당히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고독한 군주의 마음을 품은 최치우가 건재한 이상, 올림푸스는 끝없이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달려 나갈 것이다.
***
하루가 지나고, 엘리시움은 재판을 관활하는 뉴욕주 법원에 소송 취하서를 제출했다.
많은 언론들이 올림푸스와 엘리시움의 소송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기사로 쓰기 딱 좋은 흥미진진한 구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소울 스톤이라는 신물질을 공개하며 세계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아시아의 신성, 올림푸스.
금융계의 약탈자로 악명이 자자한 월스트릿의 전통적인 강자, 엘리시움.
동양과 서양.
신흥 세력과 전통 세력.
대체에너지라는 신기술을 무기로 삼은 회사와 금융이라는 숫자를 무기로 삼은 회사.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위치한 두 회사의 싸움은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법원에서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싱겁게 결판이 난 것이다.
올림푸스 쪽으로 승기가 기울어져 있었지만, 엘리시움이 먼저 꼬리를 내린 건 이변이었다.
엘리시움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금융계의 하이에나다.
그들은 오성그룹 같은 사자마저 물어뜯어 원하는 것을 얻어낸 전력이 있다.
그런데 올림푸스를 상대로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제껏 엘리시움이 먼저 칼을 뺐다가 아무 것도 못하고 도망간 적은 없었다.
냉철한 전략가로 유명한 루이스 해밀턴이 올림푸스 임시 주주총회에서 살짝 흥분했고, 그로인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겪게 됐다.
물론 최치우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의도하진 않았다.
주어진 상황에 맞춰 최선을 다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사람들, 특히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기자들 눈에는 임시 주총에서 돈보다 비전이 중요하다며 사자후를 터트린 것조차 치밀한 계산으로 보였다.
문제의 발언이 아니었다면 루이스가 섣불리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계산된 결과이건 우연의 일치이건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최치우가 끊임없는 시험을 이겨내고 우뚝 섰다는 사실이다.
엘리시움은 최치우라는 젊은 CEO를 세계 무대에 검증해 준 꼴이 됐다.
단순히 자기 영역에서만 빛나는 전문가는 꽤 많다.
또 비즈니스 능력을 갖춘 전문 경영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문가의 위상과 경영 능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은 매우 드물다.
최치우는 연이은 프로젝트 성공과 소울 스톤 공개로 전문가임은 확실히 입증했었다.
다만 나이가 어리다보니 경영 능력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것과 대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 예전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자질한 문제들이 엄청나게 발목을 잡는다.
최치우도 계속해서 여러 시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엘리시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값진 경험이었다.
올림푸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은 뉴욕에서도 감지 됐다.
소울 스톤, 주가 폭등, 엘리시움 격퇴.
세 가지 키워드가 최치우의 리더십을 굳건히 받쳐주고 있었다.
세계 수도라는 뉴욕의 거물들도 한국에서 날아온 젊은 CEO 최치우를 궁금해 했고, 진심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뉴욕 타임즈 인터뷰? 흐음……. 그건 좀 고민되는데, 팀장님 생각은 어때요?”
최치우는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엘리시움의 소송 취하 소식이 알려지고, 여기저기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웬만한 인터뷰는 다 거절하지만, 뉴욕 타임즈에서 1면을 내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치우는 한국에서 밤낮 없이 바빠진 홍보 팀장의 의견을 물었다.
리더라고 해서 모든 것을 혼자 결정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유능한 직원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 그게 진짜 리더의 덕목이다.
“저는 하시는 게 낫다고 생각 되어요, 대표님. 우리나라에서 NYT 본지 1면에 인터뷰가 실린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국내 최초라면 의미가 있겠군요. 일정 잡아주세요.”
최치우는 홍보 팀장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한민국 첫 번째라는 설명을 들으니 없던 욕심도 생겼다.
“대표님, 그런데 NYT에서 분명 소울 스톤에 대해 자세히 물어볼 것 같아요. 한국 언론처럼 사전 질문으로 필터링을 하긴 힘든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리 물어봐도 우리가 공개할 수 있는 수준만 언급하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네, 홍보 관점에서는 인터뷰 초점이 소울 스톤보다 대표님 개인 위주로 맞춰지는 게 낫거든요. 그래야 대표님과 올림푸스 전체 브랜드 이미지 확립에도 더 크게 도움이 되구요.”
“그 부분 염두에 둘게요.”
“감사합니다. 인터뷰 사진도 꼭 저희가 고르게 해주세요. 아니다, 제가 NYT에 따로 요청해 두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대표님.”
“우리 팀장님 덕분에 든든하네. 한국은 지금 새벽일 텐데, 안 피곤해요?”
“피곤해도 버텨야죠. 대표님 시간에 맞춰서 일하는 거 다이나믹해서 좋아요.”
“마음에 없는 소리 같지만, 어쨌든 땡큐. 한국 가서 봅시다.”
“네, 일정 마무리 잘하고 오셔요. 이사님께도 안부 부탁드릴게요.”
“오케이.”
최치우는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넘치는 열정으로 최치우를 보좌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올림푸스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 것이다.
“딱 좋네, 딱 좋아.”
최치우는 호텔 유리 너머로 맨해튼 전경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천루 위로 무엇보다 밝게 빛나는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최치우라는 이름의 별은 사방으로 서광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어둠은 밤보다 빛나는 별을 잡아먹으려 하겠지만, 최치우의 눈부신 광휘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불과 2년 전, 최치우는 거물들만 모이는 맨해튼 파티에서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단기간에 NYT 1면에 실리는 인터뷰를 부탁받는 처지가 됐다.
맨해튼, 뉴욕, 그리고 서부 실리콘밸리에서도 최치우와 올림푸스를 주목하고 있었다.
1달 사이 급등한 시가총액 120억 달러, 우리 돈 12조는 결코 과대평가된 거품이 아니다.
오히려 올림푸스가 그려나갈 미래에 비하면 여전히 저평가를 받은 것인지 모른다.
징기스칸도 처음에는 그저 동양의 폭군 정도로만 여겨지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서방 세계를 모조리 무너트렸다.
진군의 깃발을 든 최치우는 동경과 함께 본능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몽골 기병이 역사에 새긴 서방 세계의 악몽을 올림푸스가 재현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