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동방의 별>
상쾌한 미팅이었다.
막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기에 시간도 30분이면 충분했다.
뉴욕 최고의 로펌이라는 LCK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만약 올림푸스가 소울 스톤을 공개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서 주가가 폭등하지 않았어도 해볼 만한 싸움이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30억 달러이던 시총이 1달 사이 120억 달러를 돌파했다.
최치우와 LCK의 파트너 변호사 모두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
엘리시움의 소송을 받아들인 뉴욕주 법원도 내심 당황했을 거라는 관측까지 나왔다.
재판을 열기로 결정하긴 했지만, 이후 올림푸스 주가가 기록적인 상승률을 갱신하며 재판의 의미가 퇴색됐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미팅을 마치고 나오며 임동혁에게 말했다.
“역시 어디를 가나 최고는 뭔가 다릅니다. 준비 상황부터 브리핑까지, 아주 깔끔하게 일하네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뉴욕, 아니 미국 최고의 로펌을 섭외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임동혁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코앞에 보이는 뉴욕 거리에서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LCK를 한발 빨리 선임한 것은 누가 뭐래도 임동혁의 공로였다.
최치우도 이번에는 임동혁을 타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송 잘 마무리하고, LCK와 전속 계약을 맺는 것도 고려해 보죠.”
“전속 계약이라면…….”
“국내 파트는 사내 법무팀을 따로 만들어야겠지만, 해외 사업이나 국제 분쟁은 LCK에게 법적인 업무를 위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좋은 생각입니다.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임동혁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장의 소송전에서 이기는 데에만 집중한 것이다.
그는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최치우를 새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최치우는 현재에 충실하면서 항상 미래를 위한 포석을 깔아둔다.
그렇기에 늘 준비된 상태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최치우가 자신을 빤히 보는 임동혁에게 퉁명스레 질문을 던졌다.
임동혁은 고개를 저으며 솔직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대표님과는 싸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싸울 일이 있겠습니까? 싱겁게.”
최치우는 피식 웃으며 앞서 걸어나갔다.
LCK 사무실과 호텔은 가까운 거리라 걷는 게 더 편했다.
그는 시차로 인한 여독을 풀고, 루이스 해밀턴이 제안한 비공개 미팅 일정을 정할 계획이었다.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인 루이스가 뉴욕까지 날아와 최치우를 만나려 한다.
사실 그도 직접 재판에 참석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에서 최치우를 만나려는 이유는 불 보듯 뻔하다.
소송전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으니 이제라도 딜을 하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에릭 한센까지 대동하겠다고 말했다.
상황이 급해지니 자꾸 실책이 나오고 있었다.
에릭과 루이스가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공개한 셈이다.
최치우는 쌀쌀한 뉴욕의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셨다.
뉴욕에 올 때마다 전리품을 얻어갔지만, 이번엔 차원이 다를 것 같았다.
적장의 목은 아니어도 팔다리는 확실히 베어갈 수 있다.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최치우의 얼굴 위로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아직 새해 분위기가 남아있는 맨해튼에 차가운 피바람이 불 것 같았다.
***
비공개 미팅은 빠르게 성사됐다.
아쉬운 쪽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루이스 해밀턴은 올림푸스 홍보팀에게 먼저 연락을 할 정도로 코너에 몰려 있었다.
최치우는 심지어 그와 직접 통화를 하지도 않았다.
한국에 있는 홍보 팀장을 통해 시간과 장소를 조율했다.
아쉬울 게 하나도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보여준 것이다.
그리하여 뉴욕에 도착한지 사흘 째 되는 날, 동시에 뉴욕주 법원의 첫 번째 재판을 이틀 앞둔 날, 최치우는 루이스를 만나게 됐다.
“뉴욕에서 만나니 더 반갑습니다.”
최치우가 임동혁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오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루이스 해밀턴, 그리고 에릭 한센과 악수를 나눴다.
승자의 여유가 묻어 나왔다.
반면 루이스와 에릭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특히 에릭은 원래도 새하얀 피부가 더욱 창백해 보였다.
이런 자리에서 최치우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이잉- 틱!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는 동안 최치우의 품에서 미약한 신호음이 울렸다.
반경 10m 내외에 도청 장치가 없다는 뜻이다.
최치우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작은 것도 놓치지 않았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그는 다른 차원에서 방심한 강자들을 쓰러트리며 최강자가 됐다.
이제 와서 자신이 똑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먼저 갑작스러운 미팅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치우 대표님.”
루이스가 유려한 영어로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최치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게다가 여기 있는 에릭과는 워낙 친한 사이라서, 언제든 만나야죠.”
에릭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최치우와 에릭은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선전포고를 마친 사이다.
이후로는 최치우의 연전연승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음… 두 분이 막역한 사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루이스는 금시초문인 듯 에릭과 최치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에릭은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냉기가 풀풀 풍겼다.
예전 같으면 속을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난생 처음 최치우라는 강적을 만나 펀치를 얻어맞은 에릭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냉정한 표정을 짓는 것뿐이다.
여동생 델피 한센의 스캔들부터 시작해 최치우는 인정사정 봐주는 게 없다.
한번 물면 끝까지 놓지 않는다.
전사의 본능으로 덤벼드는 최치우를 감당하기엔 에릭은 온실 속 화초였다.
월스트릿의 천재, 잔혹한 기업 사냥꾼도 적수를 잘못 만난 것이다.
“아무튼, 바로 본론을 이야기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시간이 많지 않아서.”
최치우는 루이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순간 루이스의 눈썹이 찌푸려질 듯 흔들리다 말았다.
그는 결코 시시한 사람이 아니다.
엘리시움이라는 초거대 펀드의 동아시아 지부장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VIP로 극진한 대우를 받는데 익숙했다.
그런데 오늘은 최치우에게 시간을 뺏는 귀찮은 손님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시움이 먼저 칼을 뽑았는데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물러설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이틀 뒷면 법원에서 첫 번째 재판이 열리는데… 엘리시움에서는 소를 취하하려 합니다.”
예상했던 그대로다.
이길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건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
그러나 루이스는 마냥 꼬리를 말진 않을 것이다.
뭐라도 얻어내기 위해 딜을 제시할 확률이 높았다.
“사실 올림푸스가 유리한 입장에 섰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소송전이 진행되면 올림푸스의 이미지도 악화되지 않을까요. 만에 하나, 엘리시움과 주주 연합이 승소하거나 우호적인 판결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은 미국이라는 걸 기억해 주십시오, 대표님.”
루이스의 이야기 내용은 협박에 가까웠지만, 태도는 간곡히 설득을 하는 사람 같았다.
괜히 끝까지 가면 서로 좋을 게 없으니 적당히 합의를 하자는 것이다.
최치우는 섣불리 답하지 않고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로 했다.
임동혁이 뭐라고 말하며 나서려는 것도 제지했다.
“계속 들어보죠, 지부장님의 생각을.”
“소송을 취하하는 대신…….”
루이스가 조건을 말하려는 찰나, 에릭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턴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루이스에게 양해를 구했다.
곧이어 에릭이 최치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최 대표님, T 모터스에서 확보한 우호 지분을 전량 매각해 주길 바랍니다. 그럼 엘리시움은 이번 소송을 포기하겠습니다. 아울러 올림푸스의 경영권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보유 지분을 매도할 의사도 있습니다.”
에릭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만큼 격식을 갖춰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조건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소송만 포기하는 거라면 올림푸스에서 받아줄 리 없다.
그렇기에 엘리시움이 가진 올림푸스 주식을 팔겠다는 것이다.
임동혁은 눈을 크게 떴다.
오성그룹을 약탈한 엘리시움이 손을 털고 나가면 앞으로 경영권 분쟁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다른 금융자본도 완벽한 승리를 거둔 올림푸스를 함부로 노리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임동혁에게 결정권이 있었다면, 그는 분명 루이스와 에릭의 딜을 받았을 터였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최치우다.
최치우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에릭에게 대답했다.
“T 모터스 주식이라면 한국의 전금녀 여사가 매입한 것 같은데,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선수끼리 이럴 겁니까? 내가 T 모터스와 드림 모터스에 공을 들이는 걸 알고 방해하려는 수작임을……. 설마 모를 거라 생각했나요?”
“어떻게 생각해도 좋습니다만, 팁을 드리죠. 전금녀 여사님도 전기차 산업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T 모터스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주주로서 노력을 기울일 겁니다.”
“치우 최!”
결국 에릭이 먼저 최치우의 이름을 불렀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전금녀가 갑자기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한 덕분에 T 모터스 주가는 기준선을 유지하게 됐다.
주가를 인위적으로 떨어트려 장난을 치려던 에릭의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
이제라도 전금녀가 빠지면 주도권은 다시 에릭의 손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최치우는 그렇게 되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단순히 에릭을 공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가능성을 보이는 전기차 회사를 살리는 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괴롭히지만 않으면 T 모터스는 언젠가 대박을 낼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전금녀가 보유한 주식 가치도 대폭 오르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도 답은 명확하다.
에릭과 네오메이슨의 탐욕을 위해 전기차 회사를 망가트리게 놔둘 순 없었다.
“에릭, 옛정을 생각해서 친절히 설명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루이스 지부장님도 잘 들어주면 좋겠군요.”
최치우는 한 템포 숨을 골랐다.
자신을 노려보는 금융계의 두 거물에게 치명상을 입힐 시간이 왔다.
“올림푸스가 소울 스톤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주가가 폭등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이라는 홈그라운드에서 지저분한 소송전이 벌어지고, 엘리시움은 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올림푸스의 주식이나 사업권을 요구했겠죠. 오성그룹을 약탈했던 방식 그대로. 아닙니까?”
루이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고 시작한 소송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협상을 하자. 칼을 들고 나를 찌르려다가 도리어 반격을 당하게 되니까 협상이라, 세상을 그렇게 편하게 살면 안 되죠. 칼을 뽑았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피를 봐야 합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최치우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목소리에 담긴 기운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최치우가 내뿜는 기운은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에릭과 루이스는 보이지 않는 힘에 짓눌리는 듯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임동혁도 덩달아 체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신 백기를 들고 꼬리를 내릴 수 있는 기회를 드리죠.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면 향후 엘리시움을 상대로 경영 침해 및 무고로 역소송을 걸겠습니다.”
“그, 그런…….”
루이스가 이마에 흥건히 맺힌 땀을 닦으며 탄식을 흘렸다.
최치우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최치우의 눈동자는 에릭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네오메이슨이 무슨 수를 써도 올림푸스를 건드릴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얼마든지 당신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공략할 수 있습니다. 소울 스톤의 등장으로 다른 대체에너지 개발 회사의 주식이 폭락하면서 손해를 많이 봤죠? 게다가 전기차 회사는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없게 됐고.”
“…….”
에릭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모두 최치우의 말대로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입니다, 에릭. 당신은 날 막을 수 없어요. 그 뒤에 있는 누군가… 빨리 나와야 할 겁니다.”
얼음성 같은 에릭 한센의 멘탈이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로 들리는 듯했다.
최치우는 임동혁에게 장담한 것처럼 에릭과 루이스에게 씻기 힘든 굴욕을 안겼다.
처음 맨해튼에서 에릭을 만났을 때는 천외천처럼 그가 멀게만 느껴졌었다.
그런 에릭이 상처를 입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최치우는 서방 세계를 뒤흔든 무자비한 침략자 징기스칸처럼 동방의 별로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