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
“와-! 진짜 옛날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임동혁은 호들갑을 떨며 신이 난 티를 팍팍 냈다.
최치우는 귀찮은 듯 그에게 반응해주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 앉아 태블릿 PC로 국제 뉴스를 체크하고 있었다.
명백한 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동혁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자동차를 산다고 해서 롤스로이스를 골랐는데, 뭐 이런 걸 사왔냐고 타박을 받았던 게 불과 얼마 전입니다. 1년은 됐습니까?”
“여전히 차가 커서 좀 불편합니다.”
최치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임동혁이 마음대로 사온 롤스로이스 레이스는 최치우의 애마가 됐다.
덕분에 임동혁은 틈만 나면 자신이 차를 골라줬다고 생색을 냈다.
“그런 대표님이 전용기를 산다니! 이거 우리 영감도 못 가져본 건데… 그러고 보니 대통령도 없는 걸 우린 갖게 되는 겁니다!”
“대통령은 해외 순방에 전용기를 이용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거 전용기가 아니라 전세기입니다. 항공사에 임대료 주고 빌려 쓰고 있습니다. 사는 게 더 저렴한데, 그놈의 국민 정서가 뭔지 오히려 돈을 더 주고 임대를 한 겁니다.”
“그렇군요.”
최치우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영조 대통령도 없는 전용기를 자신이 사게 됐다.
투박한 비유지만 옛날로 치면 대통령은 왕이고, 청와대는 왕궁이다.
올림푸스는 왕궁에도 없는 걸 당당히 구매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재계에서도 항공사를 소유한 그룹을 제외하면 유일무이한 케이스였다.
임동혁의 모 기업인 한영그룹은 물론이고, 오성그룹도 배 아파 할 게 분명하다.
그들은 돈이 있어도 시선 때문에 전용기를 살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최치우의 말이 끝나자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정장을 입은 중년인과 오피스룩이 환상적으로 잘 어울리는 젊은 여성이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은 앉아 있는 최치우와 임동혁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AJ 에이전시의 김경호 본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유진 팀장입니다.”
최치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간단하게 악수를 나누며 통성명을 마친 네 사람이 마주앉았다.
AJ 에이전시는 전용기 구매를 알선하고 대행하는 전문 업체다.
그들에게 있어 전용기를 사려는 손님은 누구든 VIP일 수밖에 없다.
한 번의 거래로 최소 백억 원이 오가고, 수수료 또한 엄청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용기 거래를 총괄하는 김경호 본부장은 열성을 다해 설명을 했다.
임동혁은 비행기를 산다는 사실에 흥분한 듯 시종일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반면 최치우는 한참 여유로워 보였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필요해서 전용기 구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기분은 좋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떨리거나 대단히 기쁠 일도 아니었다.
그런 태도가 특이해서일까.
이유진 팀장은 본부장을 도와 설명을 곁들이면서 은근슬쩍 최치우의 얼굴을 훔쳐봤다.
최치우도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만, 비슷한 또래의 미녀가 보내는 눈빛은 색다른 자극을 준다.
최치우는 단정하지만 드문드문 섹시함이 엿보이는 이유진 팀장을 똑바로 쳐다봤다.
대담하고 노골적인 그의 시선에 이유진 팀장이 고개를 돌리며 뺨을 붉혔다.
남녀 사이의 기선 제압은 간단하다.
더 매력적인 쪽이 도발적으로 나가면 상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나이, 외모, 명성과 재력까지 모든 면에서 최치우는 먹이사슬 꼭대기에 위치한 포식자였다.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복잡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네, 대표님.”
최치우가 말을 끊자 김경호 본부장이 자세를 고쳤다.
누가 실질적으로 구매 결정을 할지 뻔했다.
대기업의 후계자로 알려진 임동혁도 올림푸스에서는 2인자다.
최종 결정은 당연히 최치우가 하게 될 것이다.
“우선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기종을 원합니다. 유럽이나 미국뿐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까지. 탑승 인원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고… 내부를 쓸데없이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반 여객기의 퍼스트 클래스 수준이기만 하면 좋겠군요.”
최치우의 요구는 명확했다.
이번에도 남미의 베네수엘라를 다녀온 만큼, 언제 어디로 소울 스톤을 찾아 떠나게 될지 모른다.
초장거리 비행이 불가능한 중형기는 탈락이다.
대신 다른 부자들처럼 비행기 내부를 다이아몬드나 황금 등으로 꾸미며 헛돈을 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웬만한 전용기는 기본적인 편의 시설만 갖춰도 충분히 럭셔리할 것이다.
김경호 본부장은 눈치 빠르게 최치우의 의도를 캐치했다.
“초장거리 비행을 위해서는 두 가지 기종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보잉 787과 에어버스의 A350입니다.”
“둘 다 중대형 기종이죠?”
“네, 대표님. 탑승 인원은 적다고 하셨지만, 아프리카나 남미까지 경유 없이 한 번에 가기 위해서는 두 기종이 적합합니다.”
“가격은 어느 정도입니까?”
“저희 AJ에서 특별히 제공해 드리는 서비스를 적용했을 때…….”
김경호 본부장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정도로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최치우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두 기종 모두 대략 삼천억 원 내외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액수가 크긴 크네요.”
“B787은 최대 1만 4천㎞, A350은 1만 5천㎞까지 운항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최대 운항 거리가 짧은 중소형 기종을 선택하시면 천억 원 이하로 다양한 선택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전용기로 B787이나 A350 같은 중대형 기종을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제적인 거부들도 천억 원 안팎의 중소형 기종을 구매해 럭셔리하게 장식하는 편이다.
하지만 최치우는 전용기를 구입하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지구 반대편까지 보안을 유지한 채 언제든 날아갈 수 있는 게 아니면 무의미하다.
“대표님, 굳이 일반 항공사에서 쓰는 중대형 기종을 구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임동혁도 최치우가 비교적 작은 전용기를 선택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삼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가 오가자 약간 놀란 눈치였다.
돈을 물 쓰듯 쓰는 임동혁에게도 쉽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최치우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AJ 에이전시 사람들을 만나기 전부터 절반 이상 결정을 내리고 왔다.
그의 생각은 단순명료했다.
필요하면 산다.
소울 스톤을 안전하게 확보해서 얻는 이익은 삼천억 원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샐러맨더의 소울 스톤에 담긴 에너지가 7천억 원을 들여 건설하는 춘천 열병합발전소보다 강력하다는 결과까지 이미 나왔다.
아도니스의 소울 스톤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연구 개발이라는 미션이 남았지만, 2개의 소울 스톤만으로 1조 이상의 가치는 확보한 셈이었다.
“A350으로 진행합시다. 이제 12월이니 올해 안에 법인 리스 시작하면 절세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빨리 진행되도록 도움 부탁합니다.”
보통 자동차를 살 때도 고민을 오래 하고 구입을 결정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치우는 옷 가게에서 쇼핑하듯 3천억 원이 넘는 비행기를 사기로 했다.
임동혁을 포함해 비행기를 팔려고 온 김경호 본부장과 이유진 팀장도 모두 놀랐다.
“파이낸스와 관련 된 실무는 임 이사님이 담당할 겁니다.”
“네, 네, 대표님. 저희도 저와 이 팀장이 최대한 빠르게 구매가 이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미팅은 이사님과 계속해 주세요. 임 이사님, 맡기고 갈게요.”
최치우는 임동혁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기 드문 미녀인 이유진 팀장의 눈길이 발목을 잡았지만, 원할 때 언제든 기회를 만들 수 있으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30분 사이에 3천억짜리 거래를 결정하고 밖으로 나온 최치우는 기지개를 크게 켰다.
새로운 차원인 현대로 환생하게 된 것도 어느덧 4년이 넘었다.
그동안 최치우는 누구보다 밀도 높은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진짜 차원이 다른 인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정복해야 할 높은 산이 수두룩하게 눈에 보인다.
미팅룸에서 나온 최치우는 딴 길로 새지 않고 김도현 교수에게 갈 계획이었다.
두 번째 소울 스톤에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담겨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일상에서도 끝없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
굵직한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올림푸스가 전용기 구입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또 한 번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법인 리스로 경비를 나눠서 지불하고, 절세 효과까지 볼 수 있지만 어쨌든 3천억 원은 천문학적 액수다.
아직 올림푸스의 시가총액이 3조 원가량인 걸 고려할 때 무려 10분의 1을 전용기에 투자한 셈이다.
그럼에도 주주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최치우가 임시 주총에서 사자후를 터트리며 올림푸스 경영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실히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 들면 주식 팔고 떠나라는 최치우의 포효는 여전히 건재했다.
대신 그로 인해 엘리시움과 소송전을 벌이게 됐고, 결국 뉴욕주 법원이 재판을 열기로 했다.
사실 재판 자체가 무산되는 게 베스트 시나리오였다.
미국에서의 소송은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우는 뉴욕주 최고의 로펌인 LCK를 선임해 착실히 준비를 해왔다.
소송전에서도 승리 할 자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그는 에릭 한센과 엘리시움이 네오메이슨이라는 울타리로 묶여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최치우가 전금녀를 통해 전기차 회사의 지분을 확보한 걸 알게 되면 먼저 거래를 제시 할 것이다.
최치우는 유리한 위치에서 함정에 빠진 네오메이슨 세력을 잡아먹을 작정이었다.
물론 전금녀의 주식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진짜 필살기는 따로 있다.
전금녀라는 비장의 무기보다 몇 배 더 강력하고 충격적으로 전쟁터를 초토화시킬 카드를 꺼낼 때가 됐다.
“교수님, 예정보다 이르지만 지금이 완벽한 타이밍입니다.”
최치우는 각오를 굳힌 얼굴로 김도현 교수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미래 에너지 탐사대를 이끄는 김도현 교수, 그리고 임동혁까지. 오랜만에 3인 회의가 소집된 자리였다.
그만큼 중대한 발표가 뒤따를 것이다.
“치우 군, 하지만 아직은…….”
“알고 있습니다. 소울 스톤에 담긴 에너지를 추출하기 위한 연구는 더 오래 걸리겠죠. 그러나 사람들은 당장 드러난 결과 이상으로 가능성을 중요하게 봅니다. 주식이 10배, 20배 거품처럼 들끓는 회사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매출이나 이익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대박이 날 거라는 가능성을 보여만 주면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최치우는 소울 스톤의 존재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소울 스톤이라는 물질이 있고, 그 안에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었다는 사실만 발표하면 된다.
대체에너지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획기적인 발표가 될 것이다.
오직 올림푸스만 독점한 미지의 가능성.
석유가 펑펑 터지는 유전을 통째로 발견한 것 이상의 충격을 선사할 게 확실하다.
“우리 시가총액이 10배는 더 뛸 거라고 장담합니다.”
임동혁은 흥분을 감추지 못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소울 스톤의 존재만 공개해도 3조 원 규모의 시가총액이 30조 이상으로 뛸 것 같았다.
아무 매출도 못 내는 IT회사들이 신제품에 대한 기대감만으로 미친 주가를 형성하는 세상이다.
올림푸스는 그동안 주식 버블에서 살짝 비껴나 있었다.
항상 큰 관심을 받았지만, 투자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결정적 한 방이 부족했다.
하지만 소울 스톤이 공개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방아쇠이자 올림푸스 주가 폭등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엘리시움이 소송을 거는 논리는 명확합니다. 제 경영 방침이 주주들의 이익을 위배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소울 스톤을 공개하고, 우리 주식 가치가 미친 듯 높아지면……. 엘리시움의 논리는 저절로 힘을 잃게 됩니다.”
최치우의 목소리에는 굳건한 힘이 실려 있었다.
김도현 교수는 학자다.
그렇기에 승부를 내리는 결단력은 최치우를 따라갈 수 없다.
괜히 가장 어린 최치우가 리더인 게 아니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나는 연구진과 함께 데이터를 준비하고, 검증까지 완벽히 해놓지요.”
“네, 교수님. 새해가 밝으면 소울 스톤을 공개하겠습니다. 온 세상이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열광하게 될 겁니다.”
최치우는 전율을 일으키는데 소질이 있었다.
김도현 교수와 임동혁은 잠시 말을 잃고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다가오는 새해, 최치우가 24살이 되면 천지개벽과 맞먹는 충격이 세계를 강타할 것이다.
최치우는 두 손으로 역사를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