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한계 너머>
모험심 충만한 탐험가들도 어둠이 내린 카나이마 국립공원을 돌아다니진 않는다.
카나이마 국립공원 면적의 30%가량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다.
그만큼 신비롭지만, 그래서 뭐가 나올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다.
특히 엔젤 폭포는 베네수엘라 주민들에게 신성한 폭포로 불리며 경배와 두려움을 동시에 받고 있다.
따라서 엔젤 폭포 바로 옆에 쓰러진 최치우를 발견해 줄 사람이 나타날 리 없다.
해가 뜨고, 부지런한 여행자들이 폭포로 다가오면 그때야 발견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풀숲과 바위, 나무와 폭포 사이에 깃든 마나가 최치우를 이불처럼 덮었다.
대자연의 기운인 마나는 몇몇 정령처럼 이성이나 인격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그저 순수한 자연의 정수, 그 자체다.
마나와 친숙해지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자주 받아들이고,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결국 마나를 느끼는 마법사들이 꾸준히 수련과 실전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최치우는 전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6서클을 완성시켰다.
동해 바다에 빠지며 대자연의 힘을 직접 느낀 영향도 크게 받았다.
그 후 무공 위주로 수련을 거듭했고, 실전에서 마법을 쓸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연달아 위기를 맞으며 한계까지 마법을 쓰게 됐다.
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시작에 불과했다.
불구덩이 속에서 샐러맨더와 싸운 것, 그리고 아도니스와 전력으로 부딪친 것 모두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마나의 축복이 쓰러진 최치우에게 임하고 있었다.
최치우는 목숨을 건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실전보다 좋은 훈련은 없다는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자칫하면 생명이 날아가는 극한의 실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다.
물론 정말 죽을 수도 있지만, 살아남으면 그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솨아아아아-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미세한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나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최치우는 7서클의 벽을 깨게 됐다.
눈을 뜨면 한층 친숙해진 마나를 느끼며 7서클 마법을 캐스팅하게 될 것이다.
6서클에 해당하는 미니 퀘이크, 프로즌, 인페르노만 해도 작은 규모의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파괴적인 마법이다.
그보다 한 단계 위인 7서클 마법은 말 그대로 기적을 재현할 수 있다.
만약 8서클에 도달해 어스 퀘이크, 블리자드, 헬파이어를 펼치게 되면 최정예 군부대 하나로도 최치우를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아슬란 대륙에서도 8서클 대마도사 클래스의 마법사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사실 최치우는 아슬란 대륙에서 인간으로 유일하게 9서클 현자 클래스에 올랐다.
하지만 평생을 마법에만 매진하며 살았던 제로딘 시절과 지금의 최치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과거의 지식과 경험을 갖춘 상태에서 마법을 배우기에 치트키를 쓴 셈이다.
제로딘으로는 중년이 된 나이에 7서클을 깨트렸었다.
그런데 최치우는 현대의 나이로 23살에 불과하다.
과연 최치우가 과거의 자기 자신, 제로딘을 넘어설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우우우웅!
최치우를 포근하게 감싼 마나는 끊임없이 공명하고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7서클의 벽을 허문 그의 내상도 자연스레 치유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계까지 몸을 내던지며 도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기적이 임한 밤이었다.
***
“저희 호텔에서 머무시는 동안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호텔 전체를 관리하는 지배인이 일부러 최치우를 찾아와 질문을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치우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가장 비싼 호텔 스위트룸을 일주일이나 빌렸다.
그래놓고 사흘 동안 청소를 포함한 모든 직원의 스위트룸 출입을 거부했다.
나흘째 되는 날 룸서비스로 식사를 시킨 게 전부였다.
사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카나이마 국립공원에 다녀왔고, 나흘째가 되어서야 돌아왔기 때문이다.
엔젤 폭포의 정령 아도니스를 소멸시키고 소울 스톤을 얻은 최치우는 베네수엘라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삼 일의 숙박은 취소했다.
물론 돈은 체크인 할 때 미리 지불했기에 다시 돌려받지 못한다.
애초에 환불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최상급 정령의 소울 스톤을 찾았는데 뭐가 아쉽겠는가.
마음 같아선 베네수엘라의 호텔을 통째로 사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호텔 서비스를 총괄하는 지배인 입장에선 여러모로 궁금해 미칠 지경일 것이다.
최치우는 베네수엘라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글로벌 셀레브리티다.
그런 주요 인물이 수천만 원의 숙박료를 내고 사흘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나흘째 체크아웃을 한다.
혹시 호텔에서 불쾌한 일이라도 겪었는지, 대체 무슨 생각인지 호기심이 생기는 게 정상이다.
만약 최치우가 인터뷰나 sns에서 베네수엘라의 호텔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라도 하면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날 터.
국제적인 유명 인사의 말 한마디는 수십 편의 광고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들 유명해지기 위해 기를 쓰고, 일단 유명해지면 어디서든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최치우는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짓는 지배인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덕분에 편안한 휴식을 즐겼습니다. 갑자기 다른 일정이 생겨 일찍 돌아가지만, 다음에도 베네수엘라에 오게 되면 이곳을 선택할게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저희 호텔에서 고객님을 영구 VIP로 등록해 특별히 모시겠습니다. 카라카스에 머무시는 동안 1인 비서와 운전기사, 가이드 등 원하시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꼭 다시 찾아주십시오.”
지배인은 조금 마음이 놓인 듯 최치우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약속했다.
최치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를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을 때, 베네수엘라는 유력한 후보지가 될 것 같았다.
사실 베네수엘라는 미녀들의 나라로 유명한데 작은 로맨스도 만들 겨를이 없어 아쉽기도 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네, 고객님. 공항까지 모실 차량은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최치우는 한국에서 들고 온 캐리어를 호텔 직원에게 맡겼다.
그러나 카라카스에서 새로 산 백팩은 직접 챙겼다.
작은 백팩 안에 소울 스톤을 넣었기 때문이다.
‘외국 부자들이 왜 전용기를 사는지 몰랐는데… 고민해 봐야겠어.’
최치우는 호텔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며 색다른 생각을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소울 스톤을 들고 한국으로 올 때, 미국 공항 직원들이 깐깐하게 검문을 했었다.
베네수엘라 공항에서도 검문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일반 보석류 또는 공예품으로 둘러대면 공항에서도 통과를 시켜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검문을 해도 그들은 소울 스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울 스톤을 이용한 대체에너지 개발이 궤도에 오르고, 프로젝트가 세상에 공개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들 절대 구할 수 없는 소울 스톤을 찾기 위해 눈이 빨개질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편하게 외국에서 소울 스톤을 들고 귀국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용기가 있으면 공항 통과와 검문 절차가 한결 간소해진다.
게다가 시간이나 경로에 구애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항공 이동을 할 수 있다.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세계적인 거부들이 전용기를 사는 건 단순히 폼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다.
편의성과 보안 유지, 프라이버시 보호 등 여러 측면에서 그만한 가치를 하는 것이다.
‘돈이 얼마 정도 드는지 알아봐야겠다.’
최치우는 진지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내일이라도 전용기를 구입할 수 있다.
당연히 일시불로 구입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올림푸스의 경비로 비용 처리를 하면 세금을 아끼는 데 도움이 된다.
외국에서는 전용기가 활성화돼 있지만, 한국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국내 정서 때문에 오성그룹 같은 재계 1위의 대기업도 전용기를 사지 못했다.
그런데 올림푸스가 전용기를 구매하면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려하는 소리도 나오겠지만, 최치우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는 것, 그게 올림푸스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전용기든 연구 예산이든… 무조건 돈을 아끼는 게 능사는 아냐. 쓸 땐 확실하게 써야 더 클 수 있어.’
최치우는 베네수엘라에서 최상급 소울 스톤만 얻은 게 아니었다.
아도니스와 사투를 벌이며 7서클의 벽을 뛰어넘었고, 전용기 구입처럼 스케일이 큰 생각도 하게 됐다.
많은 것을 품에 안고 예정보다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이만하면 소소한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 불러도 될 것 같았다.
***
한국에 도착한 최치우는 하루를 조용히 보냈다.
단순히 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의도 펜트하우스에서 그동안 소홀했던 사람과 일을 하나둘 점검한 것이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환생의 경험이라는 치트키로 무장한 최치우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정신없이 올림푸스 업무에 집중하느라 놓친 게 많았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을 챙기지 못했다.
원래 세계적인 기업의 CEO 중에서 가정적이거나 다정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글로벌 비즈니스 세계는 한 걸음만 삐끗해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살얼음판이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의 최치우였다면 주위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올림푸스 같은 기업을 만들어 팀을 꾸리지도 못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에서 환생한 최치우는 사람들과 함께 같은 꿈을 꾸는 법을 배웠다.
독불장군이 아닌 리더가 되는 방법을 비로소 터득한 셈이다.
“네, 어머니. 다음 주 주말에는 집에 잠시 들릴게요. 푹 쉬세요.”
최치우는 오랜만에 어머니와 통화를 나눴다.
서대문과 여의도.
무척 가까운 거리지만 일이 바빠 자주 찾아뵙기 어려웠다.
그래도 항상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었다.
매번 사양해도 손수 만든 반찬과 음식을 여의도 집으로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최치우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다 듣고도 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허철후에게 전화를 걸 차례였다.
산신령이라는 별호로 유명한 허철후는 한국 최고의 심마니다.
그가 구해준 호령독삼 덕분에 최치우는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만독불침을 이뤘다.
뿐만 아니라 프로메테우스를 개발하는 데 허철후의 역할이 지대했다.
최치우는 허철후를 올림푸스의 제약 부분 고문으로 초빙했고, 프로메테우스 1과 2를 개량하는 일의 전권을 맡겼다.
스스로를 책망하며 은거기인으로 살아가던 허철후가 최치우를 만나 일약 글로벌 기업의 중역이 된 것이다.
사실 허철후는 연봉이나 명예 같은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신 올림푸스에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며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데 의의를 뒀다.
일을 하는 동기도 특별했고, 사적으로 맺은 인연도 각별하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지만, 최치우에게 있어 허철후는 보통 인연이 아닌 게 당연했다.
최치우는 폰에서 허철후의 이름을 찾았다.
곧이어 그가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진동이 울리며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연스레 먼저 메시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성공했네, 다음 수를 알려주게……. 됐다!”
최치우는 문자를 소리 내 읽고, 짧은 환호성을 질렀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명동의 큰손 전금녀였다.
그녀가 실리콘밸리의 전기차 회사인 T 모터스와 드림 모터스 주식을 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돈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주식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식 또한 한정돼 있고, 시장에 풀려야 매입을 할 수 있다.
전금녀는 막대한 현금을 동원해 최치우가 제시한 만큼의 지분을 매입해 냈다.
드디어 에릭 한센과 네오메이슨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칼이 최치우 손에 들어왔다.
기대보다 일찍 낭보를 받아든 최치우는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구치는 걸 느꼈다.
언제 어떻게 칼을 휘두를지, 즐거운 고민으로 하루를 보내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