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107화 (107/243)

# 107

***

각오는 했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최치우는 인천공항에서 미국 LA, 그리고 LA에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아무리 편안한 퍼스트 클래스를 타도 30시간 넘는 비행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최치우는 비행기 안에서 업무를 보고, 시시각각 올라오는 뉴스를 확인했다.

요즘은 기내에서도 와이파이를 쓰는 게 어렵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카스에 도착할 즈음에는 오랜 비행의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물론 비행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최치우는 휴식 없이 로봇처럼 일을 해왔다.

그가 마음을 푹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승무원들의 극진한 서비스를 받는 것은 휴가나 다름없었다.

최치우의 지루하면서도 편안한, 묘한 휴가는 카라카스에 도착하며 끝이 났다.

최치우는 카라카스에서 가장 좋은 호텔 스위트룸을 빌려서 짐을 풀었다.

여독을 풀려고 호텔을 선택한 게 아니다.

일종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쓴 것이다.

그는 5일 동안 머무를 예정이라며 스위트룸을 예약했다.

실제로는 내일 해가 뜨기 전 카나이마 국립공원으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몸은 엔젤 폭포가 있는 카나이마로 가지만, 기록으로는 계속 카라카스에 머무는 셈이다.

또한 최치우는 투숙하는 내내 청소가 필요 없다고 당부했다.

호텔 측에서는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스위트룸 고객들은 종종 비슷한 요청을 한다.

최치우가 이렇게까지 조치를 취하는 건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거물이 됐다.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이나 사설탐정들이 최치우의 행적을 쫓을지 모른다.

보통 사람이 CIA에게 추적을 당한다고 말하면 망상병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최치우 정도면 CIA의 요주 인물 리스트에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다.

혹시 행적이 드러났을 때, 최치우가 매번 자연 현상이 두드러지는 곳을 찾는 게 알려지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다.

그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변수까지 차단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히 카나이마 국립공원까지는 차로 이동할 것이다.

기껏 호텔로 알리바이를 만들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말짱 꽝이다.

다행히 베네수엘라에는 편법으로 렌트카를 이용할 방법이 널려 있었다.

넉넉한 현금을 주고 현지인이 대신 차를 빌리게 만든 것이다.

최치우의 여권은 어디에도 쓰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오프로드를 주차할 수 있는 지프를 빌렸다.

경제적으로 후진국일수록 돈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반면 선진국은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잡혀 있어 요령을 부리기 힘들다.

준비를 마친 최치우는 운기조식을 하며 기운을 다스렸다.

만에 하나 샐러맨더 같은 상급 정령이 나타나면 혈전을 벌여야 한다.

폭포가 후보지이기 때문에 물의 정령이 나올 확률이 높다.

과연 그곳에 정령이 있을까.

물의 정령도 불의 정령처럼 파괴적일까.

여러 의문이 최치우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아슬란 대륙에서 정령과 직접 부딪친 경험은 많지 않았다.

다만 고문서와 이야기를 통해 배운 지식의 양이 어마어마할 따름이다.

‘몸으로 배운 것과 글로 배운 것은 천지차이. 이번에도 고생 꽤나 할 수밖에 없겠어.’

최치우는 엔젤 폭포에 정령이 존재한다면 고생 할 마음을 먹었다.

편하게 소울 스톤을 얻으리란 기대는 딱 접어뒀다.

샐러맨더와 싸울 때처럼 죽을 고비를 넘겨도 좋으니 정령이 있기만 하면 너무 기쁠 것 같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으니까.”

운기조식을 마친 최치우는 현대의 오랜 격언을 곱씹었다.

베네수엘라까지 날아와서 온갖 귀찮은 일을 혼자 해결하고 있다.

이만하면 부끄럽지 않게 스스로를 도운 셈이다.

이제 엔젤 폭포로 달려가서 하늘이 최치우를 도왔는지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

은밀하게 나갈 채비를 하는 최치우의 동작이 바빠졌다.

세상을 구하는 데 쓰일 소울 스톤을 찾기 위해 최치우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

카나이마 국립공원은 베네수엘라 동남부 볼리바르 주에 위치하고 있다.

최치우는 어두운 새벽을 뚫고 볼리바르까지 달려갔다.

차명으로 빌린 지프카는 기대 이상으로 쓸 만했다.

무조건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했기 때문에 최신식 차량을 구할 수 있었다.

볼리바르까지 가는 길 곳곳에는 오프로드가 펼쳐져 있었다.

만약 제대로 된 지프카를 구하지 않았다면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렸을 것이다.

‘역시 가성비보단 무조건 최고를 구하는 게 답이야.’

최치우는 자신이 철학을 상기하며 엑셀을 밟았다.

세상에는 가성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효율적인 선택을 위해 머리를 쓰다가 오히려 놓치는 게 더 많아지기 십상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최고의 것을 선택하면 된다.

어차피 최치우에게 있어 비용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하루 온종일을 달리고 또 달려 볼리바르에 도착했다.

수도다운 면모를 보이던 카라카스와 달리 볼리바르는 오지가 따로 없었다.

이곳에도 대도시가 있지만, 현대식 인프라가 매우 미비했다.

마치 한국의 70년대나 80년대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날 것 그대로의 여행을 찾는 사람들에겐 베네수엘라가 매력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최치우는 여행을 즐기러 남미까지 날아온 게 아니었다.

수도 카라카스의 낭만적인 골목도, 볼리바르의 거친 풍경도, 심지어 베네수엘라가 자랑하는 세계 제일의 미녀들도 관심 밖이었다.

최치우는 볼리바르에서 60㎞ 떨어진 카나이마 국립공원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볼리바르에 도착하자마자 국립공원에 대한 정보를 물색했다.

인터넷 검색에는 한계가 있다.

현지의 살아 있는 정보는 결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다.

다행히 볼리바르 곳곳에는 카나이마 국립공원 투어를 진행하는 여행사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돌아가며 상담을 받은 최치우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카나이마 국립공원은 엄청나게 넓다. 우리나라 경상남도와 북도를 합친 크기라니……. 그래서 여전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구역이 있고, 여행사에서는 안전이 확보된 코스만 겉핥기로 겨우 훑어보는 편이야. 엔젤 폭포는 기후가 나쁘면 접근하기 힘들고. 위험한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국립공원이라는 이름만 보면 작고 안전한 놀이동산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아프리카나 남미의 국립공원은 야생 그 자체다.

공원의 경계도 불분명하고, 국가에서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한다.

여전히 카나이마 국립공원에는 미개척지가 있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인간의 발길이 아예 닿지 않은 지역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사실만 봐도 카나이마 국립공원이 얼마나 넓고 험한 오지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해가 떨어지기 직전, 카나이마에 들어가 밤을 기다린다. 그 후 아무도 없을 때 엔젤 폭포로 가서 정령의 존재를 확인하면 되겠어.’

활동 수칙을 정한 최치우는 다시 차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60㎞ 떨어진 공원 인근까지는 지프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저녁이 다가올 때쯤 공원에 들어가면 된다.

간혹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탐험가들이 공원에서 캠핑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최치우가 그들과 마주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특히 엔젤 폭포 주변은 밤이 되면 야생동물이 출몰하는 지역이라 탐험가들도 피한다고 했다.

최치우는 현지에서 발로 뛰며 얻은 소중한 정보를 되뇌며 시동을 걸었다.

부와아앙-

또 다시 거친 길을 돌파해야 할 지프가 야생마 같은 배기음을 내뿜었다.

그렇게 또 1시간 가까이 고독한 질주를 계속했다.

최치우는 드디어 카나이마 국립공원 인근에 다다랐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엔젤 폭포,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앙헬 폭포라 부르는 곳에 발을 내딛어야 한다.

처억!

지프차 문을 닫고 내린 최치우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운기조식으로도 완벽히 해소할 수 없는 피로가 몸 구석구석을 괴롭혔다.

그렇지만 이미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금방 어두워질 것이다.

여유를 부리며 쉴 틈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질리도록 쉬어야지.”

그가 스트레칭을 하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한국에 가도 편히 쉴 수 있는 팔자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매일을 전쟁처럼 치열하게 보낸다.

최치우만 유독 워커홀릭인 게 아니었다.

밖에서 보기엔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누리며 편하게 사는 것 같지만, 보통 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고민과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다.

마치 백조가 물 위에선 우아하게 보여도 수면 아래에선 죽어라 발길질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후-! 가보자!”

최치우는 자신에게 기합을 불어넣고 땅을 박찼다.

여기서부턴 마음 편이 경공을 펼쳐도 된다.

그는 봉인이 풀린 사람처럼 바람을 가르며 국립공원을 가로질렀다.

휘익-

눈앞에 나타난 높은 철조망을 가볍게 뛰어넘는 건 기본이다.

최치우는 감각을 예민하게 끌어 올리며 길을 만들었다.

관광객이 다니는 트래킹 코스를 선택하지 않았기에 무성한 식물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쐐애액- 투두두둑!

총알처럼 빠른 속도로 경공을 펼치며 한 손으로 식물을 걷어내는 게 무척 성가셨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북부를 생각하면 이 정도 고생은 양반이다.

적어도 뜨거운 불길 안으로 뛰어들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또 모르지, 불보다 무서운 게 물이라고 했는데.’

한참 길을 만들며 전진하던 최치우가 잠시 멈춰 섰다.

그는 무작정 달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최치우가 지프를 세운 곳은 엔젤 폭포에 가기 좋은 위치였다.

차에서 내린 다음에는 나침반을 세팅한 뒤 끊임없이 달려왔다.

작정하고 경공을 펼쳤기에 웬만한 차보다 빨리 공원을 가로질렀다.

즉, 이쯤 달려왔으면 폭포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오오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국립공원을 스산한 바람소리가 채웠다.

언제 어디서 야생동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최치우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쏴아! 쏴아아아아-!

‘찾았다.’

그는 어렵지 않게 엔젤 폭포의 물줄기 소리를 들었다.

내공을 귀에 집중시키면 레이더처럼 작은 소리도 탐색할 수 있다.

더구나 엔젤 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폭포다.

900m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를 최치우가 감지하지 못할 리 없다.

‘이 방향 그대로 조금만 더 달리면… 나온다.’

그는 눈을 빛내며 다시금 땅을 박찼다.

광활한 자연 위로 최치우의 발자국이 남겨지고 있었다.

엔젤 폭포에 도착하면 이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정령을 불러낼 것이다.

최치우는 캘리포니아 화재 현장에서 얼음 속성 마법으로 샐러맨더를 자극했었다.

정령의 영역에서 인위적으로 다른 속성의 자연 재해를 일으키는 것.

그게 바로 정령을 불러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쏴쏴쏴쏴!

점점 더 물줄기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감각을 예민하게 끌어올리지 않아도 들릴 정도였다.

엔젤 폭포가 가까워질수록 피부에 닿는 기운도 거세졌다.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고 특별한 힘이 엔젤 폭포에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았다.

“와아!”

이윽고 최치우는 외마디 감탄사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979m의 깎아지른 절벽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벼락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최근 유수량이 급증했다더니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폭포와 제법 떨어져 있었는데도, 최치우의 옷이 폭포에서 튕겨져 나온 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엔젤 폭포의 위엄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폭포수만 대단한 게 아니다.

끈끈하게 온몸을 옥죄는 영험한 기운은 더더욱 심상치 않았다.

최치우는 정령의 존재를 확신했다.

분명 엔젤 폭포 어딘가에 정령이 숨 쉬고 있다.

그런데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설마 했는데 역시……. 샐러맨더보다 더 강한 힘이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를 일으킨 상급 불의 정령, 샐러맨더를 능가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짙은 어둠 속 폭포 앞에 마주 선 최치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상급 정령을 넘어 인격을 지닌 존재, 최상급 혹은 정령왕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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