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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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는 명동의 은행 지점 입구에서 전금녀를 만났다.
그녀는 깔끔하지만 수수한 차림이었고, 누구의 주목도 끌지 않았다.
당연히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거리의 평범한 할머니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눈썰미 있는 사람들은 최치우를 알아봤다.
최치우는 연예인보다 높은 인기와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의 대도시에 가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21세기 이후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스타 CEO라는 평가가 과언이 아닌 것이다.
“대바아악! 저 사람 최치우 맞지?”
“응? 어디?”
“저기, 저기 할머니랑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 올림푸스 최치우잖아!”
“어, 어! 진짜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전금녀는 웃음을 흘리며 최치우의 유명세를 직접 확인했다.
“홀홀홀, 확실히 세계적인 스타는 뭔가 다르구만.”
“불편하시면 자리를 옮길까요?”
“아니, 어차피 여기서 볼일이 있으니까 말이네.”
은행은 오후 4시면 문을 닫는다.
물론 내부에서는 직원들이 밤늦도록 야근을 하는 게 일상이다.
그러나 외부인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금녀는 영업이 끝난 은행 건물에 볼일이 있다고 말했다.
“들어가지. 더 있다간 자네 팬들로 움직이기 힘들어지겠네.”
“어디로 가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디긴 어딘가. 은행에 가는 게지.”
“하지만 지금은 영업시간이 끝났습니다.”
“홀홀, 자네 이 전금녀를 너무 낮춰 보는 거 아닌가?”
전금녀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녀는 여장부처럼 앞장서 걸었다.
최치우는 전금녀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계속 밖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해 슬슬 부담스러워지던 참이다.
삐빅-
전금녀는 굳게 닫힌 은행 문을 잠시 쳐다보다 비상벨을 눌렀다.
만약을 대비해 비상벨을 누르면 내부와 스피커폰으로 소통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4시 이후에는 은행에서 문을 열어주진 않았다.
좋은 말로 타이르거나 청원 경찰을 불러서 쫓아낼 뿐이다.
“영업시간 끝났습니다.”
역시 스피커폰 너머로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나 했지만, 은행과 미리 약속을 해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은 금방 반전됐다.
“나 전금녀일세.”
“아… 회장님!”
“홀홀, 회장 아니래도 그러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해?”
“앗, 죄송합니다. 금방 모시겠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옆에서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전금녀는 그저 자신의 이름을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은행 직원의 태도가 갑자기 180도 달라졌다.
말만 앞서는 게 아니었다.
곧바로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은행 직원이 전금녀를 맞이했다.
스피커폰으로 응대를 한 여직원만 나온 게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직급이 높아 보이는 중년 남성도 같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어르신.”
“그래, 그래. 한 지점장도 별일 없었는가?”
“어르신 덕분에 무탈했습니다.”
중년 남성은 이곳의 지점장이었다.
메이저 시중 은행의 지점장은 사회에서 대기업 임원, 혹은 그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그런 사람이 영업시간을 한참 넘겨 찾아온 전금녀를 극진히 모셨다.
‘확실히 대단한 할머니야.’
최치우는 다시금 전금녀의 저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 입장에서는 현금을 많이 보유한 고객이 VVIP다.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은행 지점도 돈이 급히 필요할 때가 종종 있다.
은행이라고 해서 돈을 무한정 찍어내 가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전금녀는 대기업에 급한 돈을 빌려주듯 은행의 부탁도 들어줬다.
평상시 각 지점마다 수백억에서 천억 이상의 예금을 맡겨두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그녀의 본거지인 명동이라면, 은행 지점장이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같이 오신 분은……. 아!”
지점장이 최치우를 쳐다보다 탄성을 흘렸다.
올림푸스의 CEO 최치우임을 뒤늦게 알아본 것이다.
“늦게 알아보는구만. 이 노친네보다 훨씬 유명한 사람인데 말이야.”
전금녀의 말이 지점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대중적 인지도나 위상은 최치우가 훨씬 높다.
그러나 수긍하면 전금녀에게 실례를 하는 셈이다.
명동의 은행 지점장 입장에서는 전금녀가 대통령 못지않은 VIP다.
그는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말꼬리를 흘렸다.
“아, 그게…….”
“홀홀홀. 됐네, 이 사람아. 내 금고 좀 보려고 왔네.”
“네! 모시겠습니다.”
전금녀가 본론을 꺼냈다.
위기를 모면한 지점장은 땀을 닦으며 등을 돌렸다.
은행의 지점장을 이토록 쩔쩔매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몇 없다.
최치우는 새삼 현금 보유량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자산의 규모, 세계적인 영향력만큼 주머니 속 현금도 무서운 것이다.
타닥- 타다닥-
영업이 끝난 은행 안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직원들은 모니터에 고개를 박고 업무를 마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대출, 펀드, 당일 업무 계산 등 은행 직원들의 진짜 일은 오후 4시 이후에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다들 전금녀를 향해 목례를 했다.
바쁜 와중에도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전금녀도 손자, 손녀 같은 직원들을 격려하며 지점장을 따라 걸어갔다.
“고생이 많지? 내 조만간 보약이라도 돌릴 테니 기운들 내게.”
아무리 봐도 그녀는 단순한 VIP 고객이 아닌 것 같았다.
지점장은 금고로 들어가는 육중한 문을 열었다.
비밀번호와 지문 인식은 물론이고, 지점장의 승인이 없으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금고다.
최치우도 은행 지점의 내부 금고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쿠구구궁-!
첫 번째 보안 문이 열렸다.
업무에 집중하던 직원들도 슬금슬금 고개를 돌려 금고를 쳐다봤다.
전금녀가 금고에 들어가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은행 지점 금고가 외부인에게 개방되는 모습이 신기한 것이다.
모름지기 금고란 은행의 심장인 동시에 금단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거래가 온라인으로 이뤄져도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돈이 없으면 허상에 불과하다.
삐비빅- 삐-!
지점장은 육중한 문을 연 이후로도 몇 개의 잠금장치를 더 해제했다.
심지어 금고 안에 갈림길도 있었다.
용도에 따라 몇 개의 작은 금고들이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밖에서 예상하는 것과 달리 상당히 크고 넓다.’
최치우는 처음 구경하는 금고 내부를 꼼꼼히 확인했다.
은행 강도가 될 일은 없지만, 오늘의 경험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개인 금고를 설계하는 데 참고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열겠습니다, 어르신.”
지점장이 마지막 관문 앞에 다다랐다.
전금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치우도 시선을 돌려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명동의 큰손 전금녀가 자신을 은행 내부로 데려온 이유가 곧 드러날 것이다.
“고맙네, 한 지점장. 잠시 최 대표와 이야기 좀 나눠도 되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금 떨어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늘의 배려, 내 오래 기억해 두지.”
“감사합니다.”
지점장은 마지막 관문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물러났다.
바로 앞 잠금장치까지 떨어져 전금녀와 최치우를 기다리려는 것이다.
최치우는 멀어지는 지점장을 쳐다보지 않았다.
드디어 전금녀의 전용 금고가 공개됐기 때문이다.
“홀홀, 어떤가?”
“예상은 했지만… 기대 이상이군요.”
“그럴게야. 이걸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는 건 역시 자네가 난사람이라 그렇겠지.”
최치우는 놀라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전금녀는 이만큼 평정을 유지하는 그를 인정했다.
열린 문 너머 최치우의 눈앞에는 5만 원권 다발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최치우가 태어나서 본 현찰 중 가장 많은 액수일 것이다.
그는 뉴욕 증시에 상장을 하며 보유 지분이 1조를 넘어가는 걸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개인 계좌에도 당장 쓸 수 있는 금액이 수백억 원 이상이다.
하지만 모두 주식 시장과 통장에 찍힌 숫자일 뿐, 현찰로 본 적은 없었다.
물론 굳이 현찰을 뽑아서 확인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막상 어마어마한 양의 현금 더미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평범한 아파트 안방 정도 크기의 금고가 신사임당으로 빽빽이 차 있었다.
“홀홀, 현찰로는 이 지점에다 제일 많이 보관해 두었네. 다른 은행 지점과 몇 개의 개인 금고도 따로 있지.”
“대단하십니다.”
최치우는 순수하게 칭찬을 했다.
전금녀는 좋은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배경이 좋은 금수저도 아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 혼자만의 몸으로 전쟁을 겪으며 돈을 벌었다.
그녀의 삶에는 한국의 현대사가 녹아 있다.
단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끈기와 집념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자네를 굳이 은행으로 불러서 금고까지 보여준 것은 한 가지 당부를 하기 위함이야. 백문이불여일견이라, 눈으로 보고 들으면 마음에 오래 남지 않겠는가.”
“맞습니다. 은행 금고는 제게도 낯선 곳이라서 오늘을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홀홀, 잘되었구만. 나는 요즘 사람들처럼 똑똑하지 못해서 금융이니 투자니, 세계 경제니 이런 건 잘 모르네. 그런데 어떻게 이 나이 먹도록 돈놀이로 성공했는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알고 싶습니다.”
진심이었다.
최치우가 이제 와서 전금녀에게 경영이나 투자 기법을 배울 일은 없다.
다만 역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할머니의 인생관이 궁금했다.
거기서 약간의 지혜만 깨달을 수 있어도 돈으로 못 살 교훈을 얻는 셈이다.
최치우의 진지한 눈빛을 본 전금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사실 별거 없었지. 돈을 숫자로 보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돈을 숫자로 생각하는 놈들에겐 절대 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네.”
“돈을 숫자로 보지 않는다…….”
곱씹을수록 의미가 크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최치우는 전금녀가 어떤 뜻으로 자신의 인생관을 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여기 금고에 쌓인 현금만 오백 억 정도 될 걸세. 자네도 알겠지만, 보통 은행 지점에는 기껏해야 현금 오억이 전부라네. 명동 지점은 예로부터 본점 못지않게 특별한 곳이라 가능한 일이지.”
“확실히 금고의 규모부터 구조까지 평범한 은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헌데 말이야, 이 오백 억을 눈으로 보면 대단하지 않나? 그런데 숫자로 보면 별거 아니지. 0이 좀 많구나, 하고 끝나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착-
말을 이어가던 전금녀가 돈 더미에서 오만 원 지폐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현실에서는 오만 원, 이거 한 장이 없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허다하네. 심지어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지. 전기세를 못 내 자살한 모녀도 있지 않았나?”
“…….”
최치우는 전금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단순히 현금만 많은 수전노 노인의 꼰대질이 아니다.
삼천억 투자 여부를 떠나 최치우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시간이었다.
“돈이란 건 무릇 여러 사람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물건임을 잊지 말게. 이 노친네의 눈물과 억울함, 수치, 분노, 그 모든 오욕의 세월 또한 담겨 있지. 자네가 제안한 삼천 억… 또 자네가 이미 이룬 일조가 넘는 돈과 앞으로 벌게 될 돈까지……. 단순한 숫자가 아닌 수만 명, 수십만 명의 피땀으로 생각해 줄 수 있겠는가?”
최치우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어느 차원에나 그에게 깨달음을 주는 현자들이 존재했다.
이번에는 바득바득 현금을 모은 할머니 전금녀의 모습으로 현자가 찾아온 것 같았다.
전금녀는 단지 말년의 영광을 위해 삼천 억을 투자하려는 게 아니었다.
물론 최치우의 제안을 받고 다각도로 검토를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최치우라는 신성(新星)에게 자신의 지난 인생을 걸고 가르침을 준 셈이었다.
“어르신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의 결정에 따라 숫자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달라진 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움직이겠습니다.”
“홀홀홀, 그래야지. 나의 시대는 진즉 끝이 났네만, 누가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지 참으로 궁금하였네. 기꺼이 자네의 장기 말이 되어 주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최치우는 고마운 마음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았다.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라는 자신감 넘치는 대답으로 충분했다.
돈이 가득 쌓인 금고 안에서 전금녀와 최치우가 서로를 마주 봤다.
한국의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한 큰손과 미래를 열어나갈 주역이 손을 잡았다.
이로 인해 거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명동에서의 만남이 세계를 뒤덮고, 에릭 한센의 숨통을 조일지 모른다.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