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큰손>
전금녀는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최치우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선택은 그녀 스스로 내려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역경의 세월을 살아오며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바로 전금녀다.
재벌들에게 현금을 빌려주는 존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었는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최치우는 최선을 다해 투자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 시점에서 세계적인 전기차 회사들의 지분을 구매하면 반드시 큰돈을 벌 수 있다.
당장은 주가가 오르락내리락 하겠지만, 3년만 지나면 엄청난 상승장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최치우도 단순히 돈만 벌기 위해서라면 주식 투자를 하면 된다.
하지만 그는 가는 길이 다르다.
여유 자금을 새로운 사업에 투자해 세상의 신비를 밝혀내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 올림푸스의 역할이다.
돈으로 돈을 불리는 방식은 최치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전금녀는 다시없을 적임자다.
우선 어마어마한 현금 자산을 가졌고, 평생 돈놀이를 해왔으니 감각도 탁월할 것이다.
올림푸스의 유동성 현금은 소울 스톤을 연구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남아공의 광산도 지속적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현재 2개의 광산에서 채굴이 진행 중이고, 20개의 광산을 모두 개발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만약 전금녀가 최치우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고민을 덜 수 있다.
에릭은 몇몇 전기차 회사의 지분을 대량으로 사들여 대주주가 됐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지속해 온 작전이었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그는 슬슬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기차 회사는 아직까지 현재의 매출보다 미래의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대주주 자격으로 재무 개선을 위한 대량 해고 등 구조 조정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렇게 되면 당장 회사의 현금 흐름과 재무 상황은 좋아진다.
자연스레 주가는 오를 것이고, 비싸게 주식을 팔아치울 기회가 생긴다.
아니면 허수아비 경영진을 내세워 회사를 통째로 접수할 수도 있다.
이제껏 에릭과 네오메이슨이 주요 기업을 인수하고 망가트린 작전 그대로였다.
그들은 우수 인력이 유출되며 회사의 미래 동력이 약해지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겉으로는 미래 산업에 투자하는 척 좋은 이미지를 만들지만, 실상은 추악한 금융 자본일 뿐이다.
“전금녀 여사가 T 모터스 주식에 이천 억을 투자하고, 드림 모터스에 천 억을 부으면… 주주총회에서 에릭 한센이 마음대로 날뛸 수는 없긴 할 겁니다.”
임동혁은 최치우의 시나리오를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금녀 여사와 최치우가 만날 수 있게 다리를 놓은 장본인이 바로 임동혁이었다.
한영 그룹의 후계자답게 국내 최고의 현금 부자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최치우는 임동혁을 바라보며 더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죠. 에릭은 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T 모터스와 드림 모터스의 주가를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금녀 여사의 자금이 들어가면 인위적으로 떨어지던 주가가 상승세로 돌아서게 될 겁니다.”
“그런데 삼천 억이면 전금녀 여사에게도 작은 돈이 아닙니다. 과연 대표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장담할 수 없죠. 그러나 눈빛이 다르더군요.”
최치우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그는 전금녀의 눈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읽었다.
“그냥 돈이 많은 할머니가 아니라… 승부사의 눈빛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사의 눈빛이다.
전금녀가 다른 차원에 태어났다면 전쟁터를 호령하는 여걸이 됐을 것 같았다.
최치우는 그녀의 승부사 본성이 빛을 발할 거라 예상했다.
전기차 회사에 3,000억 이상을 투자하고, 주식이 오르면 그녀는 떼돈을 벌게 된다.
10%의 수익률만 거둬도 무려 300억이다.
물론 돈놀이를 해도 만만치 않은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이건 레벨이 다른 게임이다.
한국에서 일가를 이룬 여걸 전금녀라면 세계 무대에서 한번 놀아보고픈 욕심이 있을 것이다.
원래 사람은 돈이 생기면 명예를 탐내게 마련이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명예에 대한 집착은 돈 욕심보다 커진다.
아무리 재계에서 알아주는 큰손이라 해도 전금녀는 그림자 속 숨겨진 사람이다.
하지만 T 모터스나 드림 모터스의 대주주가 되고, 최치우의 말대로 경영권을 방어하는 입장에 서면 세계적인 엔젤 투자자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예전 같았으면 전금녀는 망설이지 않고 최치우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70대 노인이 된 지금, 여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끌 것 같진 않았습니다. 전금녀 여사의 결정은 뒤로하고, 우린 또 다른 카드도 준비해야죠.”
“청와대에는 펜타곤의 신무기를 테스트하게 됐다고 전달했습니다.”
“꼬치꼬치 캐묻진 않던가요?”
“극비 사항을 다 공개하면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청와대에서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실 감각이 있군요.”
“홍석진 특보,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임동혁의 보고를 들은 최치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올림푸스는 펜타곤과 기술 제휴를 맺은 걸 계기로 한국 정부와도 약속을 했다.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 청와대는 올림푸스와 최치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다.
실제로 유영조 대통령이 네오메이슨의 존재를 알려줬고, 최치우는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일정 부분 보여주기도 했었다.
이번에도 청와대와 올림푸스, 유영조 대통령과 최치우의 협력 관계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동안 대표님이, 또 우리가 열심히 뛰어 다닌 덕분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임동혁이 자신 있게 말했다.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었다.
올림푸스에 당장 시급한 현안은 없다.
남아공 광산 개발도 순조롭고, 위기를 겪은 헤라클래스는 누구도 무시 못 할 무장 단체로 거듭났다.
비록 테스트용이지만, 그래도 미쓰릴 필드라는 사상 초유의 신무기까지 더해졌으니 한결 든든했다.
프로메테우스의 추가 생산도 문제없었다.
30억 달러, 3조 원 규모로 데뷔한 올림푸스의 시가총액 역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였다.
별다른 이슈 없이 회사의 매출이 높아지니 당연한 결과였다.
최치우가 소울 스톤을 이용한 대체에너지 개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는 두 번째 소울 스톤을 찾아 나설 작정이었다.
김도현 교수가 미래 에너지 탐사대를 제대로 세팅하고, 본격적인 연구 성과를 내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사이 소울 스톤을 많이 찾으면 큰 힘이 될 것이다.
물론 정령이 그렇게 흔한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경쟁자가 끝도 없었던 아슬란 대륙 때와는 다르게, 현대에는 경쟁자가 전무하다.
정령술사도, 마법사도 없는 차원이기에 정령의 존재를 아는 것은 최치우, 단 한 사람이다.
지구는 면적으로 따지면 지구는 아슬란 대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지구의 모든 정령이 사실상 최치우의 독차지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드래곤 헌터도 아니고, 정령 헌터가 될 줄은 몰랐지만.”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치우는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임동혁을 쳐다보며 화제를 돌렸다.
“전금녀 여사의 연락을 받고, 그다음엔 해외 일정을 잡겠습니다. 당분간 해외 출장이 잦아질 것 같습니다.”
“업무 공백이 없도록 잘 챙기겠습니다.”
최치우는 새삼 임동혁이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재벌가의 미치광이였고, 지금도 사람 자체가 달라지진 않았다.
그렇지만 임동혁도 분명 성장했다.
올림푸스에 자신의 인생을 걸면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사님 덕분에 마음이 놓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대표님,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닙니까?”
둘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CEO 최치우, CFO 임동혁이 있는 한 올림푸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
최치우와 전금녀는 올림푸스의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전금녀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추가로 이것저것 물어볼 법도 했지만, 일체 감감무소식이었다.
투자를 제안한 입장에서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다.
보통 이런 경우 먼저 연락을 해 의향이나 심경 변화를 물어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최치우는 전금녀라는 사람을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연락을 먼저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주요 회의에서도 그녀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금녀가 삼천 억을 투자하지 않아도 에릭 한센과 네오메이슨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민국 제일의 큰손인 그녀가 나서주면 천군만마와 같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올림푸스는 대체에너지 개발에 집중하면서 에릭 한센의 계획을 봉인시킬 수 있다.
그러나 특정인 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할 만큼 올림푸스의 저력이 약하지 않다.
전금녀는 있으면 좋은 플러스 옵션일 뿐, 최치우의 행보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연락이 오건 말건 연연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태도가 신뢰를 사는 데 용이하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사람보다는 알아서 자기 일에 매진하는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최치우는 한강이 노을로 붉게 물들 즈음, 전금녀의 전화를 받았다.
사흘 만에 온 연락이었다.
“최 대표, 내 전화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니겠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홀홀홀, 아직 23살인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는 건 꼭 늙은이 같아서 신기하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이고말고. 내심 사흘 동안 자네에게서 연락이 올 거라 예상했네만…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지 뭔가.”
“저는 제안을 했고, 선택과 책임 모두 어르신의 몫이니 제가 재촉할 수는 없지요,”
“참으로 정석이면서 능구렁이 같은 대답이네. 그래, 내 늦지 않았다면 오늘 시간이 어떤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최치우는 저녁 일정을 확인하지 않았다.
다른 약속이 있어도 미뤄야 했다.
전금녀가 거절의 뜻을 밝히기 위해 만나자고 전화를 걸었을 리 없다.
‘팔부능선을 넘었다.’
특별한 변수만 생기지 않는다면, 전금녀의 3,000억 원은 에릭 한센을 옥죄는 무기가 될 것이다.
여동생의 스캔들로 주춤한 에릭 한센은 더 오래 발이 묶이게 된다.
그동안 올림푸스는 소울 스톤으로 대체에너지를 개발할 시간을 번 셈이다.
“명동으로 오게나. 보여주고 싶은 게 있네.”
“바로 가겠습니다.”
최치우는 예사롭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전금녀가 다른 곳도 아닌 명동으로 자신을 불렀기 때문이다.
명동은 그녀가 수십 년 넘게 돈놀이를 해온 터전이다.
굳이 베일에 싸인 본거지로 최치우를 부른다는 것은 의미가 남달랐다.
단순히 투자만 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장소에서 만나도 된다.
최치우는 폰으로 날아온 메시지 주소를 조회했다.
“특별한 건물은 아닌데… 일단 가봐야 알겠지.”
전금녀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
현금 3,000억이라는 칼을 대신 휘둘러 줄 사람이다.
최치우는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어느덧 쌀쌀해진 날씨는 곧 겨울이 다가올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제일의 현금 부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최치우가 움직였다.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도 이렇듯 세상의 물결은 거세게 요동친다.
최치우는 급격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중심이 됐다.
태풍의 눈이 명동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