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번째 환생-97화 (97/243)

# 97

***

아슬란 대륙의 정령술사와 마법사들은 정령의 체계를 간단히 나눴다.

하급 정령, 중급 정령, 상급 정령, 그리고 최상급 정령과 정령왕.

하급, 중급, 상급 정령은 인격을 지니지 못했다.

대신 부여받은 힘의 크기에 따라 나타나는 모습이 저마다 달랐다.

커다란 도마뱀으로 현신하는 샐러맨더는 상급 정령이다.

어떤 면에서는 인격을 지닌 최상급 정령이나 정령왕보다 더 까다로운 존재다.

최상급 정령, 또는 정령왕과는 의사소통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격이 없는 상급 정령은 막대한 힘을 제멋대로 휘두른다.

짐작은 했지만, 캘리포니아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산불을 미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로 만든 주범이 바로 눈앞의 샐러맨더였다.

‘엄청난 힘을 지녔군. 전력을 다해도… 쉽지는 않겠어.’

최치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불의 정령은 대체로 포악하고 파괴적인 속성을 지녔다.

샐러맨더가 지난 일주일 동안 잿더미로 만든 마을과 포도밭이 얼마나 넓은지만 봐도 알 수 있다.

화아아악-

샐러맨더의 몸통에서 불꽃이 거세게 일렁거렸다.

명백한 적의(敵意)가 느껴졌다.

샐러맨더는 최치우를 경계하는 동시에 적대하고 있었다.

불길 속으로 들어와 자신과 상극인 얼음 속성의 마법을 펼쳤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얼마 없다.

정령이 존재하는 걸 확인했으니 굳이 샐러맨더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무리할 필요 없이 이대로 돌아서면 샐러맨더도 끈질기게 추격을 하진 않을 것이다.

화재가 잦아들길 기다렸다가 다시 샐러맨더를 찾으면 지금보다 상대하기 수월할지 모른다.

어차피 샐러맨더도 언젠가는 포악질을 끝내고 잠잠해질 것이다.

캘리포니아 북부를 휩쓴 산불이 영원히 이어질 리도 없다.

그사이 하급, 중급 정령부터 찾아내서 소울 스톤을 확보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등을 보이면 최치우가 아니지.’

최치우는 다른 선택을 내렸다.

다른 차원에서 살아갈 때와 비교하면 최치우의 무력은 많이 약해졌다.

그렇지만 불굴의 투지를 지닌 영혼은 그대로다.

상급 정령이든 뭐든 적의를 드러내는 상대를 앞두고 등을 돌릴 순 없었다.

‘정령왕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상급 정령에게 겁을 먹을 순 없잖아.’

최치우는 영혼에 각인된 기억을 되살렸다.

S급 몬스터를 찢어버리고, 천마와 싸우며 드래곤 레어에 침입하던 순간들을.

그는 언제나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전투를 뒤엎는 존재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미 5서클 마법 프로즌으로 만든 얼음 결계가 많이 녹았지만, 상관없다.

“붙어보자, 도마뱀아.”

최치우의 목소리에서 투지가 느껴졌다.

샐러맨더도 기운을 감지한 듯 더욱 기다란 꼬리를 흔들었다.

불꽃으로 이뤄진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오면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싸우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치우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움이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야 비로소 싸울 준비를 마친 것이다.

아주 작은 공포가 몸을 경직되게 만들고, 결국 패배의 단초가 되는 법이다.

‘결계가 녹기 전에 승부를 낸다.’

프로즌으로 불길의 침범을 막았지만 5분이 한계였다.

이미 시간은 2분이 넘게 지났다.

주어진 시간은 3분.

180초 안에 상급 정령을 소멸시키고, 불길의 영역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다른 차원에서의 힘을 온전히 소유한 상태였다면 어렵지 않은 미션이다.

하지만 6서클이 마법과 금강나한권이 전부인 현대의 최치우에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미션이었다.

‘강해지는 데 너무 소홀했어.’

최치우는 자기 자신의 무력을 향상시키는 데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갑작스레 상급 정령을 마주치니 무력을 다소 등한시했던 게 아쉬워졌다.

화르르르륵!

샐러맨더는 최치우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가 불길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기운을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

번뜩!

샐러맨더의 푸른 눈동자에서 날카로운 빛이 쏟아졌다.

놈의 몸통은 붉은 화염으로 이뤄졌고, 눈동자만 시퍼런 청염(靑炎)의 구체였다.

이제 샐러맨더는 최치우를 쓰러트려야 할 적으로 명확히 인식한 것 같았다.

‘와라!’

최치우는 샐러맨더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상대의 빈틈을 포착하는데 둘째가라면 서럽다.

6서클의 마법과 금강나한권이 전부지만, 진짜 비장의 무기는 따로 있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싸움을 해본 경험이다.

최치우는 똑같은 마법도 언제 어떻게 써야 더 위력적인지 꿰뚫고 있었다.

화아악!

그때였다.

샐러맨더가 드디어 흉포한 공격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최치우도 미리 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상급 정령의 분노는 예상보다 거셌다.

후욱-

샐러맨더의 꼬리가 최치우를 스치고 지나갔다.

납작 엎드리듯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면 불꽃이 이글거리는 꼬리에 휘감겼을 것이다.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온몸이 불타는 것은 기본이고, 엄청난 충격으로 뼈와 장기가 으스러질 게 분명했다.

‘막을 게 아니다. 피해야 해.’

최치우는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샐러맨더의 꼬리를 쳐다봤다.

어설프게 막으려 하면 피해가 커진다.

무조건 피해야 한다.

다행히 스피드는 최치우가 샐러맨더보다 앞선 것 같았다.

‘몇 번이고 피하며 빈틈을 노릴 수 있지만… 문제는 시간이야.’

최치우에게 주어진 180초 중에서 벌써 10초가 날아갔다.

시간이 다 흐르면 6서클 마법 프로즌의 얼음 결계가 녹아내릴 것이다.

그때는 불길 밖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다.

얼음 결계가 완전히 사라지면 샐러맨더의 기세도 더욱 등등해질지 모른다.

기껏 캘리포니아 북부까지 날아와서 헛수고만 하고 위험에 처하게 되는 셈이다.

콰앙!

다시 한번 샐러맨더의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와 바닥을 쳤다.

움푹 파인 땅 바닥은 가뭄에 시달린 논밭처럼 쩍쩍 갈라졌다.

“키야아아악-!”

재빨리 피하는 최치우가 얄미웠을까.

샐러맨더가 입을 벌리고 괴성을 토해냈다.

단순히 고막을 찢는 소리만 터져 나온 게 아니었다.

쫙 찢어진 샐러맨더의 입에서 푸른 불꽃이 쏘아졌다.

“프로즌!”

최치우는 다급히 6서클 마법을 한 번 더 펼쳤다.

연달아 6서클 마법을 펼치면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치이이익!

샐러맨더의 입에서 날아온 푸른 불꽃이 허공에 돋아난 얼음과 부딪쳤다.

사나운 청염은 최치우가 만든 얼음 덩어리를 모조리 녹이고 사라졌다.

만약 프로즌을 다시 펼치지 못했다면, 완전히 녹아 사라지는 건 얼음 덩어리가 아닌 최치우였을 것이다.

‘이건 예상 밖, 그렇지만 빈틈도 더 커진다!’

최치우가 눈을 빛냈다.

샐러맨더가 푸른 불꽃을 토해낼 줄은 몰랐다.

절대 화력을 지닌 푸른 불꽃은 엄청나게 강력해 6서클 마법으로 겨우 상쇄시킬 정도다.

대신 불꽃을 토해내는 순간, 샐러맨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고정돼 있었다.

워낙 강력한 공격이기에 정신을 집중하고 힘을 모아야 되는 것 같았다.

위기는 곧 기회다.

샐러맨더가 건드리기 힘든 푸른 불꽃을 토해낼 때, 바로 그 순간을 노려야 한다.

이제 남은 시간은 대략 150초.

최치우는 연달아 날아드는 샐러맨더의 꼬리를 피하며 기운을 모았다.

‘열받지? 얼른 다시 뿜어내 봐, 그 시퍼런 불꽃을!’

쾅!

콰콰쾅-!

샐러맨더의 꼬리는 땅 바닥을 치는 걸로도 모자라 얼음 결계까지 뒤흔들었다.

덕분에 최치우가 애써 만들어놓은 결계에 균열이 생겼다.

생각보다 일찍 얼음 결계가 무너질 것 같았다.

‘130초… 아니, 이대로 저 도마뱀이 날뛰면 100초도 버티기 힘들다.’

과연 한 번의 기회가 올까.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최치우와 얼음 결계를 마구잡이로 노리는 샐러맨더의 꼬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키야아아악!”

그때 다시 샐러맨더가 비명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신호가 왔다.

최치우는 곧 샐러맨더의 입에서 푸른 불꽃이 쏘아질 거라 확신했다.

엄청난 위기인 동시에 마지막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답이 없다는 걸 최치우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멈췄다!’

거짓말처럼 샐러맨더의 몸이 정지했다.

이제 곧 벌어진 입에서 푸른 불꽃이 날아올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을 이용해야 한다.

“미니 퀘이크-!”

최치우는 또 한 번 6서클 마법을 펼쳤다.

벌써 세 번째 연달아 6서클을 캐스팅했다.

아무리 마나의 축복을 받았어도 육신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캐스팅이 완료된 주문은 권능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궁!

샐러맨더가 멈춰있던 곳의 땅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작은 지진이 일어나 샐러맨더를 집어삼킨 것이다.

“키요오오옷!”

샐래맨더는 괴성을 지르며 푸른 불꽃을 쏘았지만 이미 늦었다.

움푹 무너진 땅 밑에서 날린 푸른 불꽃은 하늘 위로 올라갔다.

최치우는 가만있지 않았다.

6서클 마법을 무리해서 펼친 후유증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여유가 없다.

그는 불의 상급 정령 샐러맨더를 잡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거나 처먹어.”

최치우는 자신이 일으킨 소형 지진의 시작점에서 샐러맨더를 내려다보며 주먹을 뻗었다.

고오오오!

감당하기 힘든 기운이 최치우의 주먹에 실렸다.

미니 퀘이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샐러맨더를 향해 황금빛 권풍, 아니 권기(拳氣)가 쏟아졌다.

파파파파팡-

수류탄 수십 개가 터지는 것 같은 파공성이 울렸다.

천보일권(千步一拳).

금강나한권의 최종 비기 중 하나로 소림사 백보신권보다 열 배 더 강력한 절기다.

권기의 물결이 땅속 깊이 처박힌 샐러맨더를 난타했다.

샐러맨더는 엄청난 타격을 받으며 몸부림쳤다.

최치우는 6서클 마법과 무공 절기로 샐러맨더를 궁지에 몰았다.

샐러맨더의 기력이 약해진 지금, 확실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러나 마나와 내공 모두 지나치게 소모한 탓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시간은 남았지만, 프로즌으로 생성한 얼음 결계도 급속히 녹고 있었다.

“진짜 마지막이다, 빌어먹을 도마뱀아.”

최치우는 다시금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마나를 받아들였다.

차가운 얼음 속성의 마나가 그의 몸을 매개로 현실에 구현됐다.

6서클 마법 프로즌을 캐스팅하려는 게 분명했다.

마법을 아는 누군가 이 장면을 봤다면 미쳤다고 혀를 찼을 것이다.

6서클 경지의 마법사가 연속해서 4번이나 6서클 마법을 펼치는 것은 자살행위다.

하지만 최치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계를 깨트리는 게 그의 오랜 취미이자 특기다.

“프로즌-!”

촤아아아악!

최치우의 손끝에서 펼쳐진 마법이 결빙 현상을 일으켰다.

기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직격탄을 맞은 샐러맨더의 온몸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최치우는 소형 지진이 만든 구덩이 아래로 뛰어내려 얼어붙은 샐러맨더의 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파자자작-!

얼음이 산산조각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얼어붙은 샐러맨더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것이다.

“후…….”

최치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앞에 여러 색감의 붉은 빛이 오묘하게 뒤섞인 구슬이 보였다.

상급 불의 정령 샐러맨더의 정령석, 소울 스톤이다.

이제 정령석을 챙겨 나가기만 하면 된다.

최치우는 기진맥진했지만 손을 뻗어 붉은 정령석을 만졌다.

화아아악-!

정령석을 만지자 화끈하고 뜨거운 기운이 몸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일시적으로 기력이 회복되고 있었다.

“역시, 물건이군.”

짙은 미소를 지은 최치우가 정령석을 품에 넣었다.

지긋지긋한 불길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가 샐러맨더를 소멸시킨 덕분에 캘리포니아 화재도 한결 쉽게 진화될 것이다.

최치우는 역사의 이면에서 세상을 구하며 자신의 야망 또한 이뤄가고 있었다.

정령석을 확보한 이상, 차원이 다른 대체에너지 개발로 에릭 한센과 네오메이슨의 숨통을 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류의 미래를 바꿀 획기적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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