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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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우는 레드 엑스의 공격 배후에 에릭 한센이 있음을 확인했다.
당사자가 직접 빈틈을 노출하고 대전차포 지원을 시인한 셈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이것으로 적아(敵我)가 다시금 명확해졌다.
에릭 한센과 네오메이슨은 먼 미래의 적이 아니다.
지금 당장 세계를 무대로 치열하게 싸워야 할 현실의 적이다.
레드 엑스를 동원한 것에 대한 맞불 작전으로 델피 한센의 스캔들을 터트린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에릭이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에릭은 당분간 델피의 구속 수사를 해결하기 위해 진땀을 흘릴 것이다.
빈틈이란 스스로 자각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막기 어려운 게 빈틈이다.
최치우는 에릭의 빈틈이 아물기 전, 결정타를 날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언제 이만큼 좋은 기회가 또 올지 모른다.
게다가 네오메이슨이라는 거대한 세력은 여전히 그림자 뒤에 숨어 있다.
에릭을 흔들어 그들의 실체를 끄집어내야 한다.
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전쟁을 치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에릭은 최근 대체에너지 회사들을 상대로 투자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어. 전기차 회사를 인수하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막대한 주가 차익을 올린 것과 같은 이유겠지.’
최치우는 뉴욕 월가의 산업 스파이들을 통해 에릭의 관심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에릭 한센이 곧 대체에너지 기업 몇 개를 인수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다만 델피 한센의 사건으로 타이밍이 늦춰졌을 뿐이다.
최치우는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체에너지는 부정할 수 없는 세계 경제의 트렌드다.
고등학생으로 환생한 최치우는 S대 에너지자원공학과를 선택했다.
그때부터 대체에너지 개발이 세계의 미래를 좌우할 거라고 알아봤던 것이다.
그가 처음 성공시킨 프로젝트도 독도 해저 자원 개발이었다.
대한민국의 가스 하이드레이트 개발사업단은 독도 인근 해저에서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실물로 추출해 내고 있다.
추출한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에너지로 상용화시키려면 몇 년이 더 걸리겠지만, 최치우 덕분에 일약 대체에너지 강국으로 가는 첫걸음을 뗀 셈이다.
석유의 시대는 길어야 100년 안에 끝난다.
인간은 100년 안에 반드시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인류가 쌓은 찬란한 문명과 과학도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설령 석유의 시대가 예상보다 오래 가도 환경이 문제다.
석유를 이용한 에너지 생산은 지구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친환경 대체에너지는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1년에 겨우 1만 대의 차도 못 만드는 전기차 회사의 주식이 독일 명품 자동차 브랜드보다 더 비싼 게 현실이다.
에릭이 한창 뜨거운 대체에너지 기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그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인수합병을 통해 단물만 쏙 빼먹을 게 분명하다.
반면 최치우는 다르다.
똑같이 대체에너지 개발에 뛰어들어도 최치우는 세상을 바꾸고 인류의 미래를 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성공을 거두면 돈은 자연히 따라온다.
어떻게든 주식을 뻥튀기해서 팔아치우는 것 자체가 목적인 에릭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덕분에 좀 일찍 시작하게 됐군.’
최치우는 남아공 광산 개발이 안정되고 나면 대체에너지 개발에 뛰어들 계획이었다.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기에 현금부터 확보하려던 것이다.
그런데 계획을 수정하게 생겼다.
에릭의 멘탈이 흔들리고 있는 적기를 놓칠 순 없다.
바로 지금, 에릭이 공들여 온 대체에너지 분야에서 올림푸스가 성과를 낸다면 타격은 엄청날 터.
네오메이슨의 케어를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온 에릭이라는 괴물을 일시에 무너트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서양 세계를 주무르는 집단,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변종인 네오메이슨 또한 최치우에게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까지 어둠 속에서 팔짱 끼고 있을지… 어디 한번 해봐.”
최치우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혼잣말을 읊조렸다.
세상을 움직인다며 기세등등한 네오메이슨의 실세들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그는 에릭과 똑같은 방법으로 대체에너지 사업에 뛰어들고 싶진 않았다.
가능성 보이는 기업을 인수하고, 그들의 기술을 빼내서 성장하는 M&A는 최치우 스타일이 아니다.
어차피 돈 넣고 돈 먹는 싸움으로 가면 압도적 자금력을 보유한 에릭과 네오메이슨을 이기기 힘들다.
세상에 없던 방식.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독도 해저 자원을 개발하고, 미쓰릴을 찾아냈던 것처럼 완전히 다른 판을 짜야만 승산이 있다.
다행히 최치우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존재한다.
그는 다른 차원에서 환생을 거듭하며 쌓은 지식과 경험을 현대에 적용시킬 것이다.
아슬란 대륙의 지식을 토대로 미쓰릴이라는 신금속을 발굴했듯 무궁무진한 방법이 나올 수 있다.
최치우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정답을 찾기 위해 눈을 감았다.
다른 차원의 경험과 현대의 비밀이 만나는 순간, 또 한 번 기적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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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는 괴수(怪獸)에 대한 목격담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불가사의한 환경이나 엄청난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 목격담이 늘어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괴수 목격담은 백두산 천지 괴물일 것이다.
백두산 천지를 방문한 관광객들은 꽤 빈번하게 깊은 물속 거대한 괴수를 봤다고 말한다.
네스호 괴물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괴수 목격담이다.
과연 그 모든 목격담이 사람들의 거짓말이나 환각, 또는 착시 효과일까.
최치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지구는 과학 문명이 주로 발달했지만, 다른 차원처럼 미스터리한 현상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다만 그 강도나 빈도가 다른 차원에 비해 떨어질 뿐이다.
최치우 자신이 그 증거였다.
그는 현대에서 마법을 익혔고, 무공을 수련했다.
마나와 기(氣)가 존재한다면, 다른 것 역시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
“정령…….”
최치우의 입에서 생소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그는 세계 곳곳을 덮친 자연재해와 괴수 목격담을 분석하고 있었다.
정령은 아슬란 대륙에서도 쉽게 접하기 힘들었다.
불, 바람, 물, 대지 등 자연의 속성을 다스리는 초월적인 존재가 바로 정령이다.
아주 간혹 정령과 계약을 맺은 정령술사들이 등장했으나 대부분 자연 깊숙한 곳에서 은거하길 즐겼다.
최치우는 현대에서 일어난 자연재해나 괴수 목격담이 정령과 관계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목격한 괴수가 정령(精靈)이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정령은 보통 자연의 기운이 극도로 강한 곳에 머물기 때문이다.
“지구에도 정령이 존재한다면… 그럼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지.”
정령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존재가 아니다.
자연 속성도 다르고,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인격을 갖출 정도로 성숙한 정령도 있지만, 단순한 의지만 지닌 채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정령도 있다.
중요한 건 정령이 소멸하면서 남기는 것이다.
정령석(精靈石), 또는 소울 스톤(soul stone)이라 불리는 보석에는 자연의 힘이 담겨 있다.
드물기는 해도 정령석을 이용해 만든 아티팩트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었다.
최치우는 정령석이 대체에너지 분야를 혁신하는 새로운 구세주가 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정령석의 속성을 연구해서 어마어마한 자연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올림푸스는 단번에 대체에너지의 선두 주자로 세계를 이끌게 될 것이다.
“풍력 발전을 위해서는 바람이 부는 지형과 넓은 땅이 필요해. 그곳에 풍력 발전기를 세워야 하고. 화력 발전, 해수 발전 모두 아직까지 효율성이 떨어져. 그런데 바람의 정령석으로 풍력 발전의 효과를 낼 수 있다면……. 화염의 정령석으로 화력 발전이 가능하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돋았다.
사실 최치우는 그동안 정령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었다.
그것 말고도 고민하며 집중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에너지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하며 생각이 트였다.
이런 걸 나비효과라고 한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바다 건너에서 태풍을 만들어낸 것과 같다.
에릭 한센이 레드 엑스를 움직여 올림푸스를 공격한 게 시초였다.
그 복수를 위해 최치우가 델피 한센의 탈세 스캔들을 터트렸고, 결국 빈틈을 보인 에릭 한센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대체에너지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만약 에릭이 레드 엑스를 움직이지 않았다면 최치우는 이렇게 일찍 대체에너지에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정령석으로 대체에너지를 개발할 생각도 한참 뒤에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마침 캘리포니아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재가 일주일 넘게 지속되고 있군.”
최치우는 워싱턴을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주로 미국 동부를 방문하는 편이다.
하지만 서부에도 볼일이 생긴 것 같았다.
서부 캘리포니아의 와인 생산지 소노마 카운티에서 일어난 산불이 일주일 째 계속되고 있었다.
원래 캘리포니아는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재의 강도와 지속력이 심상치 않았다.
소노마 카운티를 비롯해 나파 밸리 북부 등 여러 마을이 불길에 휩싸여 재로 변했다.
벌써 사망자가 50명이 넘었고, 실종자는 수백 명이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화재로 인해 캘리포니아 북부가 아수라장이 됐다.
오죽하면 소노마 카운티에서 가까운 대도시 샌프란시스코 주민들도 불안감을 느낄 정도였다.
최치우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재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정령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천혜의 환경이나 자연재해를 찾아야 한다.
최치우가 미국에 머물 때 기록적인 화재가 발생한 건 기회였다.
물론 피해자들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령이 개입했다면, 그 존재를 소멸시키는 게 불길을 약화시키는 방법이다.
정령도 찾고 화재도 진압하고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정령이 없으면 허탕 치는 거지만.”
최치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허탕을 두려워하면 아무 일도 못 한다.
언제나 대박의 그늘에는 쪽박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특별한 삶을 살 수 없다.
최치우는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검색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빌려 화마(火魔)가 기승을 부리는 소노마 카운티로 이동할 작정이었다.
인근 지역을 모조리 통제한 소방당국의 눈을 어떻게 피할지, 잘못하면 불길에 잡아먹히진 않을지 등 여러 걱정은 나중에 할 것이다.
일단 생각하면 움직이고 보는 게 최치우를 모든 차원에서 최고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 있다!”
그는 오늘 밤 비행기를 찾아냈다.
쇠뿔도 단김에 빼는 법,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막상 행선지가 정해지자 심장이 기분 좋게 뛰며 피가 뜨거워졌다.
그의 영혼에 각인 된 승부사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를 뒤덮은 최악의 화재가 기회일지 위기일지, 최치우는 기어코 몸으로 부딪쳐 확인하려는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비행기 티켓을 산 최치우의 눈동자는 불길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